서울이 이 정도면, 지방은 어떠한가
― 서울이 이 정도면, 지방은 어떠한가
“국회의원은 공천권을 쥐고 군림하고, 지방의원은 이권을 챙기며 충성을 다툰다.”
최근 불거진 이른바 ‘공천 헌금’ 의혹은 특정 정치인의 일탈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이 사건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것이 한국 정치의 오래된 구조적 병폐를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공천권을 무기로 지역을 지배하고, 지방의원은 공천을 생존 조건으로 삼아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한 채 충성 경쟁에 나서는 구조. 이는 우연이 아니라, 제도가 만들어낸 필연에 가깝다.
서울에서 이런 일이 드러났다면, 지방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감시가 느슨하고 언론의 조명이 닿지 않는 곳일수록, 유사하거나 더 노골적인 유착과 거래가 반복되고 있을 가능성은 상식에 가깝다. 문제는 “누가 더 나쁘냐”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이다.
주민의 대표가 아닌, 정치권력의 하급 관리자
지방의원은 원래 주민의 삶을 대변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핵심 축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많은 지방의원은 주민보다 국회의원을 먼저 바라본다. 다음 선거의 공천권이 그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공천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정치적 충성을 증명하며, 때로는 지역 민원과 예산, 인허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순간 지방자치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지방권력의 사유화다. 주민의 위임은 형식으로만 남고, 실질적인 권력은 공천권을 가진 중앙 정치인에게 집중된다. 민주주의는 제도만 남고, 정신은 증발한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지방자치를 “민주주의를 학교처럼 가르치는 장치”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의 지방정치는 민주주의의 학교가 아니라, 권력 복종을 학습하는 훈련소가 되어버렸다.
정당 공천제, 정책 경쟁이 아닌 금권과 줄 세우기의 통로
정당 공천제는 본래 정책 책임성과 정당정치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지방선거에서 이 제도는 기능을 상실했다. 정책 경쟁보다는 줄 세우기, 능력 검증보다는 충성도 평가, 주민 평가보다는 중앙 정치인의 눈치가 우선한다.
국회의원은 공천권을 통해 ‘지역의 작은 왕’이 되고, 지방의원은 그 권력에 기생해 지역 이권을 관리하는 하청 구조에 편입된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개인의 도덕성 강화나 윤리 교육만으로는 부패를 막을 수 없다. 부패는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구조의 합리적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몰락과 오늘의 지방정치
역사는 반복된다. 조선 말기 국가 붕괴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지방 행정의 붕괴였다. 중앙 권력은 형식적으로 유지됐지만, 지방에서는 수령과 향반이 권력을 사유화했고, 백성은 수탈당했다. 국가는 서서히 안에서부터 썩어갔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그 시절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방권력이 주민의 삶이 아니라 권력 유지와 이권 관리에 봉사하기 시작할 때, 국가의 기초 체력은 무너진다는 교훈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래부터 잘 사는 나라였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국민 다수가 쌀밥을 배불리 먹기 시작한 것은 불과 반세기 남짓한 일이다. 국가는 수많은 국민의 노동과 희생으로 일어섰지만, 정치가 그 성과를 잠식하고 있다.
이제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정치 개혁은 인물 교체로 끝나지 않는다.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사람만 바뀐 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첫째, 지방자치선거에서 정당 공천제 폐지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최소한 기초의회와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공천권을 주민에게 돌려줘야 한다. 지방정치를 중앙정치의 하위 부속물에서 분리하지 않는 한, 자치는 허울에 그친다.
둘째, 지방자치단체장과 교육감의 행정 책임성을 강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러닝메이트제든, 권한 조정이든 핵심은 책임의 분산이 아니라 명확화다. 권한은 나뉘어 있는데 책임은 흐려질수록, 행정은 정치화된다.
셋째, 지방의회 구조 자체에 대한 재설계가 필요하다.
인구 대비 과도한 정원, 상근직화된 의정 구조, 각종 특혜 논란은 지방의회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 명예직 전환, 정원 축소, 보상 체계의 투명화는 더 이상 금기어가 아니다.
AI 시대, 낡은 정치의 민낯
AI와 데이터의 시대는 정치에도 투명성과 성과를 요구한다. 국민은 더 이상 명분이 아니라 결과를 본다. 그런데 정치만 여전히 구정물 속에서 패거리 싸움과 이권 나눠 먹기에 머물러 있다면, 그 괴리는 결국 체제 불신으로 이어진다.
정치는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구조가 강제하지 않으면, 권력은 언제나 가장 쉬운 길을 택한다. 언론과 시민이 이제는 인물 비난을 넘어 제도 개혁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다.
정치가 바뀌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정치가 바뀔 수밖에 없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방자치는 희망의 제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갉아먹는 또 하나의 고비용 부패 시스템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정당 공천이 없으면 무능한 사람이 당선된다”는 오해
정당 공천제를 옹호하는 쪽은 늘 같은 반론을 든다. “정당 공천이 없으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난립하고, 지역 토호나 인기 위주의 선거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을 절반만 본 이야기다.
정당 공천이 실제로 수행해 온 검증은 정책 역량이나 도덕성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충성도와 조직 순응성이었다. 유권자 검증이 아니라 ‘윗선 통과’였고, 공개경쟁이 아니라 밀실 평가였다. 그 결과 지방의회는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공천 관리에 능한 정치 기능인들로 채워졌다.
미국·유럽의 많은 지방선거가 무소속 또는 약한 정당 개입 하에서 운영되지만, 지방행정이 혼란에 빠졌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지역 문제에 정통한 인물, 시민사회에서 검증된 활동가, 행정 경험을 가진 실무형 인사가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다. 정당 공천은 ‘질 관리 장치’가 아니라 ‘진입 장벽’이 되어버린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지방의회는 왜 늘 ‘문제의 현장’이 되는가
지방의회 비리 뉴스는 낯설지 않다. 해외연수 명목의 외유, 이해충돌 논란, 지역 업자와의 유착, 방만한 의정활동비. 문제는 이것이 개인 윤리의 문제로만 소비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구조를 보면 답은 분명하다.
지방의원은 권한에 비해 책임이 약하고, 보상에 비해 감시가 느슨하다. 더 치명적인 것은, 주민 평가보다 공천 평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정치철학자 제임스 매디슨이 말했듯, “권력은 감시받지 않을 때 타락한다.” 한국의 지방의회는 바로 그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명예직 전환이나 정원 축소는 지방의회를 무력화하기 위한 제안이 아니다. 오히려 ‘직업 정치인화된 지방권력’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자는 요구다. 지방의회는 생계 수단이 아니라, 공적 봉사의 장이어야 한다.
중앙집권 비판하면서, 지방의 중앙집권은 외면하는 위선
많은 정치인은 중앙정부의 권력 집중을 비판한다. 그러나 정작 국회의원이 지역에서 행사하는 공천권 독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중앙의 제왕적 권력을 비판하면서, 지역의 제왕적 권력은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의 핵심은 단순한 행정 분권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분산이다. 그런데 지금의 구조는 중앙정부 → 국회의원 → 지방의원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권력 사슬을 더욱 공고히 만들고 있다. 지방은 분권 된 것이 아니라, 하청화 되었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은 함께 행동할 때 생기고, 폭력은 고립될 때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오늘의 지방정치는 주민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 고립된 권력자들끼리만 연결되어 있다. 그 결과가 바로 정치 혐오와 무관심이다.
개혁의 본질은 ‘정치 불신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권은 종종 말한다. “지금 개혁을 하면 혼란이 크다”, “국민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개혁을 미루기 위한 언어일 뿐이다. 국민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득권이 내려놓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지방자치 개혁의 목적은 정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있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뢰를 요구할 수 있는 정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신뢰는 선언으로 생기지 않는다. 제도에서 나온다.
결론: 사람을 바꾸는 정치에서, 구조를 바꾸는 정치로
문제는 몇몇 정치인의 도덕성도, 특정 정당의 일탈도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다. 그리고 구조는 바꿀 수 있다.
지방자치가 지금처럼 유지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훈련장이 아니라 국가 자원을 소모하는 정치 실험실로 남을 것이다. 서울이 이 정도라면, 지방은 이미 경고선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질문은 하나다. 이 구조를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능인가, 공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