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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고독을 즐기자

패거리 싸움에서 탈출하라

by 엠에스

선각자들은 왜 고독을 즐겼나?

오늘날 우리는 초 연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끼리끼리 집단 문화, 소셜 미디어, 스마트폰,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어느 때보다 쉽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고독이나 혼자만의 시간을 부정적인 의미로 치부하여 왔다. 그러나 무작정 집단 문화나 남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혼자 있기를 선택함으로써 더욱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위대한 철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이들의 삶과 사유 속에는 ‘고독’이 단순한 외로움을 넘어서는 미학적, 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풍부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혼자 있기를 택했고 그 고독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자 했을까? 과연 그런 고독은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얻을 수 있을까?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의 차이.

일반적으로 외로움은 부정적 정서로 여겨진다. 즉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마음 한편은 텅 비어 있고, 누구도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괴로움을 뜻한다. 일종의 고립에서 연유되는 결과이다. 반면 고독은 외부 환경이나 타인의 부재 자체를 즐기고, 그로부터 긍정적인 가치를 이끌어내는 태도에 가깝다. 고독은 오히려 내가 진정 원하는 바를 되돌아보게 하고, 내면의 소리에 더욱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돕는 능동적인 상태다. 고립의 상대적인 독립에 가깝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말하는 고독이란 그저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등지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타인과 사유를 교류하고 역사와 전통을 연구하며, 삶 전체를 깊이 반추하기 위해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고독한 상황에 배치했다. 주변의 소음과 복잡함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렇게 얻은 통찰을 다시 타인과 나누는 순환을 통해 철학은 더 풍성해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참고로 비슷한 내용의 고립과 독립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독립은 스스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타인에게 의존해야 할 때 의존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또 누군가 자신이 필요할 때 기꺼이 도움을 준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자신감이 있다.

반면에 도움을 요청하면 자신의 주도권마저 타인에게 내줘야 할까 봐 선뜻 타인에게 도와 달라고 하지 못하는 경우, 그것은 독립이 아니라 고립이 되어 버린다. 혼자서 해결할 수도 없으면서 스스로 고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외로움은 고립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고 고독은 진정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고독의 역사

고독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전통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조용히 자연과 더불어 사유함으로써, 본질적인 지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광장에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철학적 사유를 전개했지만, 동시에 때로는 깊은 명상을 통해 자기 영혼을 들여다보곤 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 역시 내면의 성채를 지키는 방법으로 고독을 권장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명상록》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은둔처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 내면의 가치와 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는 세상사로부터 거리를 두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는 단지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치우쳐 혹은 감정에 휩쓸려 자신을 잃지 않도록 고독을 통해 자기 성찰의 균형을 유지하라는 의미였다.

자기 성찰, 창의성, 정신적 자유.

고독은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일상의 분주함이나 사회적 규범, 그리고 타인들의 기대 속에선 스스로의 욕망과 목표가 왜곡되기 쉽다. 하지만 고독한 순간에는 오롯이 자신과 마주해야 하므로, 내면 깊숙이 묻혀 있던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통찰을 도출할 수 있다.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때로는 타인과의 대화나 교류에서 나오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정제되는 과정에는 고독이 필수적이다. 정보를 과잉으로 접하거나 지나치게 사회적 시선에 얽매이면, 독창적 사유보다는 타인의 생각이나 유행에 편승하기 쉬워진다. 고독은 잡음 없이 사유를 발전시키도록 돕고, 자기 언어를 가다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독 속에서는 타인이 부과하는 도덕적, 사회적 제한에서 한 발 물러나 보다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다. 자신의 가치관, 윤리, 세계관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일반적 흐름에 곧바로 동조하기보다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철학자들에게 핵심적인 태도였으며 사유하는 그들을 빛나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니체의 고독.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고독을 스스로의 운명과 맞서는 방법으로 보았다. 그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인공 자라투스트라가 산속에서 긴 시간 고독을 보낸 뒤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인간들 사이로 다시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 장면은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고독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니체에게 고독은 그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은둔하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를 단련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기존의 도덕과 가치관을 모두 의심하고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는 그의 사유는 당시 사회의 통념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니체에게 있어서 고독은 자기 혁신의 장이면서도 기존 권위나 도덕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정신적 투쟁의 장이었다. 그는 고독의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철학적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기존 사고 체계에서 벗어나 초인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키르케고르의 고독.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개인의 주체적 신앙과 진리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군중 속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개인의 실존을 강조했다. 그에게 고독이란 신과 직접 대면하는 개인의 실존적 상태였다.


키르케고르는 “진리는 주체성이다”라고 말하며, 진리를 발견하는 여정은 결코 집단적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공통의 믿음을 공유한다고 해도 개인이 자기 내면에서 그 믿음을 진정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때 개인은 자기 자신과의 진지한 대화 즉, 고독한 내면의 여정을 통해 비로소 자기 신앙을 결정짓는다.


또한 키르케고르는 군중 심리 속에서 개인의 책임과 선택이 흐려진다고 보았다.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거나 대세에 편승함으로써, 자기 삶에 대한 진정한 결단을 회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단독자라 칭하며, 고독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방식과 선택에 대해 책임지는 실존적 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몽테뉴의 고독.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수상록》에서 자기 고유의 경험과 사소한 일상, 감정 등을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의 시도는 철학적 글쓰기의 새 지평을 열었는데, 그 중심에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꾸준한 관찰과 성찰이 있었다.


몽테뉴는 혼자서 사유하고 글을 쓰는 활동을 통하여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가고 타인의 삶과 견주어 자기 삶을 비춰보려고 했다. 그는 “나는 내가 아는 유일한 대상이다”라는 말로, 고독을 통해 개인이 자기 자신을 연구하고 성찰하는 일을 가장 우선시했다.


또한 몽테뉴의 고독은 ‘자발적인 은둔’과도 연결된다. 그는 정치나 사교 생활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개인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사고함으로써 인간의 본질과 자연, 사회에 대한 통찰을 쌓았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선택된 고독은 그에게 있어 지적인 자유와 자율성의 온상이었으며, 이를 통해 에세이라는 독특한 문학·철학 장르가 태어날 수 있었다.

현대 사회의 고독.

오늘날 우리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수많은 사람, 정보와 연결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잉 연결’ 상태가 가져오는 피로감도 적지 않다.


또 끼리끼리 집단문화 패거리 싸움으로 사회가 분열되고 같은 패거리 안에서도 주류 또는 비주류로 분리되면서 종국에서는 극도의 이기적 밥그릇 싸움만 지속하고 있는 혼탁한 사회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철학자들이 말했던 고독의 가치가 오히려 현대에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공적인 영역에서 요구하는 역할 수행, 혹은 사회적 기준과 대중의 시선에 맞추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꾸미고 맞추어 왔다. 나아가 최신 정보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정작 자기 자신은 물론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간을 잃어버리곤 한다.


이럴 때 의식적으로 고독을 찾아 떠나보는 행위가 사회적 기준과 남의 시선으로 오염된 현대인에게 디지털 디톡스 같이 작용할 수 있다. 잠시나마 사회적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지, 타인이 기대하는 내 모습이 아닌 나 자신으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를 차분히 돌아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의 고독.

고독은 결코 화려하거나 자극적인 개념이 아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불편함을 유발하고, 때로는 두려움마저 안겨줄 수 있는 상태다. 그러나 고독은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스스로 서있는 위치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통로임을 철학자들은 반복해서 이야기해 왔다.


니체는 고독을 통해 스스로를 혁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키르케고르는 고독 속에서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세웠으며, 몽테뉴는 혼자만의 사유와 글쓰기를 통해 인간 본성과 일상에 대한 통찰을 기록했다. 이들에게 고독은 결코 방종이나 고립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풍부하게 삶을 이해하고 진실로 자신이 되고 타인과의 관계까지도 성찰할 수 있는 통로였다.


현대인에게 고독은 피해야 할 고통으로 비치곤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과의 끊임없는 연결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참된 외로움으로 이어지기 쉽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고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필요한 순간에 의식적으로 고독을 선택할 줄 아는 지혜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독은 결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거나 무관심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독립적으로 혼자 있기를 통해 더 명확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의 쉼표이자 발상의 전환의 기회다. 고독은 자신을 잃지 않는 상태에서 타인과 만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도 자유로운 장치인 것이다.


위대한 선인들이 혼자 있기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군중에서 벗어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독을 통해 자기 정체성과 사유의 본질을 탐색하고, 나아가 사회의 통념을 넘어서는 혁신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을 얻고자 했다. 고독은 위험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진실로 깊은 사유와 자율적 존재 방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통로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끼리끼리, 팬덤 등 집단문화에 둘러싸여 자아를 망각하고 군중심리를 좇아가는 패거리 싸움으로 사회적 홍역을 치르고 있다. 고독과 독립을 통한 깊이 있는 사유로 자아 성찰과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사회의 공동 가치를 함께 추구할 수 있도록 내면을 살피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떨까?

눈앞의 끊임없는 연결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의도적으로 고독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그 순간 우리는 더 선명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그 참선의 결과물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더욱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로 이끌어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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