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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터 Jul 22. 2022

나의 고향에 눈이 오던 날

윗 지방은 맑고 아랫 지방에서는 눈이 내리는 기이한 날이었다. 그 기이함은 남부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더 잘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 날 나는 우짖는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고향을 내려가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안그래도 추운 곳에서 이젠 눈까지 내리는 그곳을 향해 재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그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글은 대단한 사람, 말하자면 글재주가 뛰어난, 작가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써야 하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또는 인지도가 있으면서 어느 정도의 정제된 글을 쓸 줄 안다면 그렇게 책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전자도 후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모든 것이 핑계라는 줄을 알면서도 글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일상 생활을 하다가도 글거리가 불쑥불쑥 생각이 났고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때 꿈이 작가였던 적은 분명히 있다.

어릴 때였나, 소설 작가, 드라마 작가, 다양한 작가군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멋있어 보였고 무엇보다도 재밌었다. 나는 평생을 어떤 소재로든 글을 썼으니까. 때로는 본명이 되었다가 때로는 닉네임이 되었고 때로는 익명 뒤에 숨어 나만의 조악한 글을 써내려갔다. 어떤 소통 창구로든 내 취향에 꼭 들어맞는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웠다. 모든 인생이 그렇듯 때로는 다시 펼쳐보고 싶지 않은 글들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글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열차 안은 따뜻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입고 탄 롱패딩을 꼭 끌어안고 있고 싶었다. 조금의 온기가 더 필요했던 것 같다. 그 온기에 뒤덮여 깜빡 졸았다가 혼자 혀를 살짝 깨물어 번쩍 하고 깼다. 이번에는 오래 잠들었길 바라며 시간을 확인했지만 역시 내리려면 아직 2시간이나 더 남아있었다. 나는 차든 비행기든 뭐든 간에 운송 수단에서 잘 잠들지 못하는 편이었고 이번에도 역시 굉장히 짧게 잠들었던 것이다.


고향을 내려갈 때면 어딘가 짤막한 여행을 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창 밖의 풍경 구경하기를 정말 좋아했다. 계절마다 느껴지는 자연의 계절감이 좋았다. 벼가 익은 너른 평야는 지금이 가을임을,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은 지금이 겨울임을, 그렇게 시각적으로 일깨워지는 경험을 매년 반복하고 있지만 어쩐지 질리지가 않는다. 아쉽게도 늦은 시각 탑승한 열차의 창문 밖은 깜깜한 어둠과 저멀리 미약한 불빛 조금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이런 날도 좋았다. 마치 이세상에 열차 안의 나와 이 사람들만 존재하는 느낌, 영원히 내리지 않고 이대로 내리 달릴 것만 같은 순간. 잠을 자며 수많은 불빛들을 지나치다가도 이렇게 눈을 뜨고 다시금 바깥을 바라보면 아까와 같은 어둠, 아까와 같은 불빛 같다. 하지만 분명 아까와는 다른 어둠, 그리고 다른 불빛일 테다.


문득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아까워진 것은 어디서부터 눈이 오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그 경계가 있을 것인데, 밖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그 경계도 볼 수가 없다. 눈의 경계는 어쩐지 불리워지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울 것 같아서.


아침에 아버지가 눈이 쌓일락말락하는 인도 위 사진을 찍어 보내주셨다. 남부 지방에서 눈이 온다는 것은 큰 이벤트다.

자주 오지 않으니, 게다가 와도 잘 쌓이지 않으니 한번 쌓이면 대비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나는 눈이 올 때 우산을 쓰는 광경을 스무 살 때 상경해서야 처음 보았고, 아직도 눈이 온다는 예보에도 우산을 잘 챙기지 않는 버릇이 있다. 우산을 쓸 때까지 눈이 오지 않는 지방에서 나고 자란 습관이 몸에 밴 터다. 벌써 상경 9년차 지만 눈이 펑펑 내리는 날씨와는 아직도 낯을 가린다. 매번 초면같다.


지금 고향에 내려가고 있는 것은 부모님의 건강검진 때문이다. 건강검진을 잘 하지 않으려 하는 부모님때문에 속을 태운 적도 있었기 때문에, 이 소식은 분명 반가워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때늦은 연말의 건강검진 소식은 조금 답답하게 다가왔다. 레귤러 방송에 특집 방송, 후임의 인수인계까지 몰아치는 업무 속에서 나는 부모님의 자영업까지 도와주러 내려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추운 곳에서 눈까지 내리는 곳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나만의 고속열차가 필요했다. 너무 지쳐 있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그러다 때로는 깜빡 잠들 지라도, 이 내리는 눈과 끝없는 어둠, 미약한 불빛 사이를 빠른 속도로 헤쳐나가주는 나만의 고속 열차. 그리고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고속열차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야만 한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어느새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화면에는 순천이라는 두 글자가 크게 보였다. 사람들은 내리기 위해 줄을 서 있었고 그 줄을 따라 나도 조심히 내렸다. 나에겐 2021년의 첫눈을 맞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마냥 좋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매년 첫눈을 맞을 때마다 듣는 노래를 틀면서 재빨리 역을 빠져나갔다. 일단 너무 추웠기 때문에. 당연히 조금 쌓여있는 눈을 밟을 때면 미끄러질까 발걸음을 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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