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후기
소설은 허구다. 모든 소설은 이상이고, 환상이며 현실이 되지 아니한다. 그것이 다른 책들과 다른 소설만의 매력이고, 소설이 갖고 있는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의 현실성을 따진다. 소설의 본 목적인 허구를 즐기라고 썼더니, 현실적이지 않은 내용은 싫다며 한탄하는 나 같은 독자를 작가들은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허구다. 희망과 꿈을 노래하다가도 우울과 공허를 토로하고 실존하면서도 실존하지 않는다. 소설은 모순. 실제로 저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저런 세상만큼은 드리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불러오는 모순이다.
잠깐 SF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SF라는 장르에 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호의적인 편에 가까우며 SF가 갖고 있는 매력을 사랑하는 편이다. 어쩌면, 내 말이 우스울지도 모른다. 현실성을 따진다는 사람이 SF에 대해 호의적이라니, 그야말로 모순이겠지. 하지만 조금만 더 억지를 부려 이 모순을 말한다면, 나는 SF가 갖고 있는 현실성을 사랑한다.
SF는 허구라는 이름의 희망이 섞인 현실을 얘기한다. 언젠가 미래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그 희망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서 작가를 움직이게 한다. 소설이 용인 해주는 ‘허구성’을 견고하게 쌓기 위해 작가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참으로 다정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했던, 여느 SF의 화려함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독자를 위하고 미래를 위한 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밤 하늘을 수놓은 자주빛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따뜻한 위로와 애정을 건네준다. 총 7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이야기들이 건네는 말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던 그런 책이었다.
누군가가 희망을 믿도록, 행복을 믿도록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타인을 납득시킬만한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와야 하므로, 이는 곧 논리적으로 허구를 설명함을 의미한다. 특히 책은 오로지 글로만 그 내용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독자가 흥미를 잃지 않도록, 계속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독자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소설은 가치를 잃는다. 꼭 행복함과 희망을 납득시키지 않아도 된다. 작품의 상황을, 감정을 이해시킨다면 그것은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나는 김초엽 작가가 내뱉는 말들이 좋았다. 얼핏 평범한 말들이지만 우리가 한 번쯤은 말로 표현해 보고 싶었던 그런 문장들을 작가는 소설에 부드럽게 녹여냈다. SF소설이지만, 어느 순간 나의 이야기를 보는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얼기설기 얽혀 있는 감정들을 어르고 달래어 하나의 정제된 문장으로 완성했다. 형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꾸려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문장일 것이다. 특히 어르신, 어른들이 청소년과 어린이에게 곧잘 하시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단순히 그렇게 느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세상은 불과 수십년, 수년만에 모습을 바꾼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우리 인류의 ‘우주로 향하는 목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허황된 꿈이라 여겨졌던 우주여행이 점차 진전이 보이고, SF의 전유물이었던 과학이 현실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과장되어 표현한다면, 우리 사회는 현재 ‘과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이런 과도기를 지나, 우주여행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와 우주의 교류는 오랜 기간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인류는 우주에 나가는 것에 거부감과 두려움이 없다. 특히, 주인공 ‘안나’는 이런 우주산업 발달에 크게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른바 ‘딥프리징’이라는 냉동인간 기술을 발명한 것이다.
소설 속 ‘남자’가 보기에, 그리고 소설 밖 독자들이 보기에도 안나는 미련하고 외로운 사람이다.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하였지만, 그녀의 이름은 잊혀졌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살아갔지만, 영영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별을 겪은 후 안나는 냉동인간이 되기를 자처하며 하염없이 폐관된 정류장에 우주 비행선이 오기를 기다렸다. 언젠가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언젠가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믿음을 품은 것이다.
안나는 왜 이곳에서 계속 기다리냐는 남자의 질문에, "물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겠지. 그래도 가보고 싶을 거야. 한때 내 고향이 될 수 있었을 행성을. 운이 좋다면, 남편 옆에 묻힐 수도 있겠지. (178p)" -라고 대답한다. 그녀의 이 대답은 ‘남자’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오히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미련한 짓을 하냐는 타박이 이어진다. 안나는 이어, 젊은이는 이해 못 할 것이 –라고 답하는데, 이 장면은 단편적으로나마 그들의 가치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세상이 변하며, 그들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그와 동시에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생겨나며, 아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그렇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무언가’가 사랑이라 믿는다. 세상이 아무리 변화하더라도, 절대로 변화하지 않을 가치. 그것은 바로 ‘사랑’이지 않을까.
모든 생물이 ‘우주’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이겠지만, 어쩌면 우주보다 크고 단단한 존재일 지도 모른다. 그들은 다양한 동기를 품고, 결심하며, 이를 실행으로 옮긴다. 살아가기 위해 노력을 하며, 단순히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 나아간다. 어찌 보면 이기적인 행동들을 반복하고, 실수와 결점을 품은 채 살아간다. 또한, 그들은 ‘사랑’을 한다. 타인을, 동물을, 식물을 사랑한다. (어떤 이들은 무생물을 보고도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하고는 한다.) 인간은 우주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나와 정반대의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소비하고는 한다.
타인의 죽음과 아픔에 슬퍼하고, 타인의 행복과 축복에 함께 기뻐하는 것은 다 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인류는 셀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왔고, ‘전쟁’과 ‘학살’이란 이름의 끔찍한 짓도 수도 없이 저질렀다. 그럼에도, 현재의 삶을 만들어낸 것 역시 인류의 봉사와 헌신 덕분이다. ‘안나’가 딥프리징 기술을 개발한 것도, 모두 그녀가 인류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남자’가 안나를 끝끝내 붙잡지 못했던 것도, 그녀의 삶을 축복(사랑)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꾸준히 사랑한다. 실수와 잘못을 포용하고 헌신과 애정으로 고쳐나간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해도, 이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누군가에게는 ‘미련’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일지라도, 이 행동은 아주 오랫동안 인류의 삶을 완성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181~182p)
관내분실
나에게 도서관은 도피처였다. 부모님께 혼이 나거나, 동생과 싸운 날이면 도서관을 찾고는 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아니면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을 때 꾸준히 도서관을 가고는 했다. 2번의 이사를 했지만, 집 근처에는 늘 도서관이 가까웠다. 그래서 종종 도서관을 갔다. 초등학교 때는 집 근처 도서관에 꾸준히 가기보다는 학교 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책을 빌렸고, 하루 종일 책을 읽고, 다음날 반납했다. 일종의 출근 도장이었다.
내게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을 때 간 곳이 도서관이었다면, 소설 속의 도서관은 반대로 ‘가족’을 만나기 위한 곳이 되어 있었다. ‘마인드’를-일종의 죽은 사람의 영혼-만나기 위해 가족들은 도서관을 찾았다. 소설 속 주인공 ‘지민’ 역시 이러한 연유로 도서관을 찾았다. 오랜 시간을 원망하고 사랑한 어머니를 보기 위해 3년만에 그녀를 찾은 것이다.
지민의 어머니, 은하는 ‘마인드’가 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세상에서 잊히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민과 은하는 일종의 평행선과 같은 길을 걸었다. 어미니와 딸의 관계가 늘 그렇겠지만, 작가는 그 둘의 관계를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엄마는 죽었다. 그 사실이 더는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 저편으로 밀어놓았던, 무의식이었든 의식해서였든 생각하지 않았던 엄마의 부재가 물밀 듯이 지민을 덮쳤다. (229p)’
자신을 낳고 산후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를 바라보며, 지민은 자신에게서 그 원죄를 찾았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좀 더 자유로운 사람이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이었다. 은하의 직접적인 심리는 나오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자신을 지워달라’는 부탁에서 알 수 있듯이 은하 역시 가족들을 향한 적지 않은 죄책감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부모가 되는 데에는 자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를 갖게 된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며 자격을 부여받는 것도 아니다. 곧장 모성애(부성애)라는 것이 생겨나지 않고, 가족을 책임질 준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아이를 기르면서 천천히 배워가고 가꿔나가는 것이다. 부모가 되는데 준비가 된 자는 없다. 모두가 어설프고 서투르다. 그렇기에, 지민의 ‘엄마를 이해해요. (271p)’라는 문장이 많은 이들을 울린 것 아닐까.
가족에게 품은 마음은 사랑보다 미안함, 혹은 원망이 더 클 것이다. 수십년을 부대끼고 마주 봐야 했던 가족은, 우리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타인,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가족’이란 이름의 사람들이다.
만약에 내가, ‘현욱’이었다면 은하의 동의가 없더라도 은하를 ‘마인드’로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뒤늦은 후회와 미련을 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면 당연히,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까. 한없이 사랑하고 한없이 미워한 가족이 그렇게 쉽게 잊혀질리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의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억지로라도 ‘마인드’를 만들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죽은 가족의 유언을 따르는 방향으로 시스템이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족은 ‘가족’이란 이름 안에서 여러 가지 책임과 역할을 맡고 있다. 좋은 가족이라도 결점과 부정적인 면모가 존재하고, 그것을 묵인하고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다른 가족이 겪어야 하는 길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부딪히고, 깨지고, 상처를 주었다. 아무리 애정 표현을 한다 해도, 아무리 사과한다 해도 각자의 고통이 사라질까. 수십년의 애증이 단 하룻밤만에 사라질 수 있을까. 감정이란 것은 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서 자신의 감정이라도 조절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남겨진 가족은 무엇이든 하려 하지 않을까.
‘인덱스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엄마의 과거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직장에 다니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그녀의 이름이 쓰인 무언가를 만들었으리라는 생각도. 지민이 알던 엄마는 언제나 집 안에서 무기력한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몰랐을까. 당연한 일이었다. 은하에게도 지민을 낳기 전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란 족쇄에 아직 걸리지 않았던 때, 그리고 어쩌면, 엄마의 진짜 삶을 가졌던 때가. (262~263p)’
언젠가 친구에게 '나는 보라색 상상을 좋아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친구의 황당한 표정도, 그 당시 민망하고 불편했던 분위기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럼에도 나는 곧잘 저 말을 내뱉는다. 저 표현 외에 나의 생각을 말할 수는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무맹랑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상상일지라도 결국 미래를 꿈꾼다. 공허하고 음울할 지라도 그 안에서 밝은 이면을 찾아낸다. 산뜻하고 활기차더라도 그 속의 결점을 발견한다. 보라색 상상이란 건 그런 상상이다.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것들 속에서 어쩌면 그조차 괜찮을 거란 확신을 주는 공상을 나는 보라색 상상이라 부른다. 어쩌면 행복의 동의어라 부를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들은 행복해지도록 하자. 우리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라도, 상처와 고통을 겪더라도 결국에는 행복해지도록 하자. 김초엽 작가가 보여준 미래의 모습처럼 각자의 최선을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자. 후회와 미련에 오랜 시간 괴로워하다가도, 한순간의 변화가 자신의 삶을 이끌어줄 것이다. 어렵고 난해한 감정들은 어느 순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우린 정말로 ‘빛의 속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