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17화
그날, 빗방울이 가늘게 떨어지던 오후였다.
우산 없이 잿빛 하늘 아래를 걷는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
젖어드는 어깨에도 이상하리만큼 마음 한구석은 고요했다.
그때였다. 코끝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음— 음음— 음음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콧노래였다. 누가 시킨 것도, 연습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정해진 곡조조차 없었다. 그저 마음이 먼저 움직이자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마치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숨결처럼.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시작하려면 큰 결심과 타당한 이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래 또한 그렇다. 혹 누가 들을까 두렵고, 음이 틀릴까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콧노래는 그런 부담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의식 이전의 생명이며, 말보다 먼저, 생각보다 앞서 존재한다.
마음의 온기가 입이 아닌 코를 타고 조용히 흘러나오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어쩌면 가장 솔직히 자신의 느낌을 알리는 소리.
놀랍게도 콧노래 안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회복의 에너지가 숨어 있다.
슬픔의 끝자락에서도, 절망의 저편에서도 우리는 가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그건 기적이다.
무너진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거라 믿었던 감정이 조금씩,
아주 조심스럽게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소리.
병실에서,
지하철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때론 전쟁터 같은 하루 속에서도 누군가는 콧노래를 부른다.
그건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래가 아니다.
나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래.
내 마음의 심지에 다시 불을 붙이는 작고도 단단한 불씨다.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흥얼거린다.
그건 어쩌면 내 무의식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몸짓이리라.
상처받은 마음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가장 부드러운 위로.
그래서 나는 믿는다.
콧노래는, 기적이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 안엔 생의 의지가 숨 쉬고 있다.
그 작은 선율 하나하나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 작은 소리가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기를.
그리고 언젠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도 또 하나의 작은 선율이 조용히 흘러나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