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런 대학, 그저 그런 학과.
기훈은 아무 기대 없이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생활'이라는 단어에 덧붙는 낭만이나 자유 같은 말들은, 그에게는 현실감 없는 구호일 뿐이었다.
연극부에 들어간 것도 어쩌다였다. 누군가 전단지를 나눠주었고, 그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모임에 나갔다.
별 생각 없이 지원했고, 별 생각 없이 단역을 맡았다.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그는 단 한 줄의 대사를 외우는 것조차 버거웠다.
조명이 뜨거웠고, 관객석은 어두웠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이 더더욱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대에 서 있는 동안만큼은,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아주 미세하게, 아주 천천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단역이던 역할은 조금씩 늘어났다. 짧은 대사 한 줄이 두 줄이 되었고, 무대 위에 머무는 시간도 조금씩 길어졌다.
어느 날, 연출가가 그에게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아볼 것을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는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점차 설렘과 부담감이 뒤섞인 기분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이 시작되자 기훈은 본격적으로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동안 단역에 익숙했던 그는 이번 역할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야 한다는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을 느꼈다. 그 역할은 소외감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었는데, 기훈은 어딘가 그 캐릭터에게 자신을 투영하게 되었다. 연습이 거듭될수록 그는 그 캐릭터의 감정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연극 공연 당일, 그는 무대에 올랐다. 조명이 그를 비추자, 그는 갑자기 엄청난 감정의 파도가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무심한 표정 뒤에 숨겨 두었던 고독과 혼란, 삶에 대한 무기력이 역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는 무대 위에서, 타인의 삶을 흉내내며, 자신을 잊는 법을 배워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감각을 맛보았다.
처음이었다.
무대 위, 조명이 자신을 비출 때, 관객들의 숨죽인 몰입이 자신을 향할 때, 그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후배가 다가와 말했다.
"선배, 오늘 연기 정말 좋았어요. 무대 위에선 전혀 다른 사람 같았어요."
기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무대 아래 내려오는 계단 위에서 멈춰섰다.발끝에 힘이 빠진 채 그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내려가고, 관객들은 떠나갔지만, 그 순간만큼은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그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을 길게 뱉었다. 가슴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오래 묻어둔 무언가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기훈의 내면은 이제 단순한 무력감과 무기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무대에서 배우는 대사와 정서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고, 고통에 잠식되지 않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연극은 단순히 위로를 주는 별책부록을 넘어 그의 내면을 붙잡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여전히 잿빛 속에 갇혀 있었다. 자신과 동질감을 느꼈던 연극 속 인물들이 겪는 흔한 사랑의 열정이나 설렘도 그에겐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는 사랑을 바라는 마음조차 억제한 채,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진심이 다가오는 순간 그의 세상이 깨어질까 두려워하는 듯이.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죽음』은 이제 두번쩨 단계로 들어가네요.
고독과 삶의 조각들을 함께 따라가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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