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 주제를 시작하게된 이유
지하철 2호선 출근길.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보며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이 반복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질문을 철학적 사치라고 여겼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실존적 고민이냐고, 그냥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직장 생활이 길어질수록 자꾸만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규정은 언제부터 적용되는 건가요?" "원래 그래요."
"이 결정의 근거가 뭔가요?" "위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예요."
이런 대화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마치 투명한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넘을 수도 없는 벽. 논리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당연한 듯 일어나고, 나의 질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처음엔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숨겨진 규칙이나 암묵적인 룰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하게 되었다. 이건 내 이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카프카의 『소송』을 읽게 되었다. 주인공 K가 자신이 왜 기소되었는지도 모른 채 끝없는 법정을 헤매는 이야기.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내 일상의 기록 같았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 이해는 서로 다르다." (성, Der Schloss)
카프카의 문장이 마음에 박혔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겪고 있는 이 막막함에는 이름이 있었다. '부조리(不條理, Absurdität)'.
부조리란 인간의 합리적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감정이다. 우리는 세상이 논리적이고 공정하기를 바라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이해할 수 없는 결정들이 내려진다. 그 간극에서 우리는 당황하고, 분노하고, 때로는 무력감에 빠진다.
카프카가 부조리를 발견했다면, 카뮈는 그 부조리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말한다. 시지프는 영원히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지만, 그는 행복할 수 있다고.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어졌다"고 말했다.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져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일상의 평균성과 익명성에 빠져 사는 것을 경계하며, 진정한 자기 존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시리즈는 그런 만남의 기록이다. 내가 직장에서 실제로 겪었던 부조리한 순간들과, 그 순간들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철학자들의 통찰을 연결해보려는 시도다. (개인의 체험은 이 글을 쓰기 위해 변형되거나 재창조되었음을 부기한다.)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부조리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 안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
앞으로 우리는 함께 이런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먼저 카프카, 카뮈, 사르트르, 하이데거 같은 문학자, 철학자들이 부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들의 작품과 사상을 통해 부조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회사 내에서 실제로 존재할 법한 부조리한 순간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규정 변경, 왜곡된 회의록, 이해할 수 없는 인사 결정, 예측 불가능한 승진 과정. 이런 체험들 속에서 철학자들의 통찰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또는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규명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주변의 일상적 공간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의 어색한 침묵, 금요일 오후의 묘한 공허함. 이런 순간들 속에서도 부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시리즈를 읽는 당신도 아마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들, 벽에 부딪힌 듯한 순간들. 그런 경험들이 당신만의 특별한 불운이 아니라는 걸,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보편적 조건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 앞에서 우리가 완전히 무력하지는 않다는 것도. 부조리를 바꿀 수는 없지만, 부조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카프카는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은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때려 깨우지 못한다면 왜 읽는 거지? 책이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 이 시리즈가 당신 안의 얼어붙은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다면, 부조리한 일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이제 시작해보자. 부조리한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여행을.
다음 편 예고: 카프카, 부조리를 들여다보다 - 그레고르 잠자처럼 어느 날 갑자기 변해버린 세상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부조리한일상 #카프카와카뮈 #직장인의철학 #일상의성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