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르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 위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프카의 『변신』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사람이 갑자기 벌레가 된다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정인가 싶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몇 년 하고 나서 이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다.
'아, 이거구나.'
그레고르가 느꼈을 당황스러움이 갑자기 이해되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규칙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나도 해봤기 때문이다.
어느 월요일 아침, 내 책상 위에는 A4 용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업무 절차 변경 안내'라는 제목의 공문이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내가 몇 달째 진행하던 프로젝트의 승인 절차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기존 3단계였던 절차가 7단계로 늘어났고, 제출 서류도 두 배로 증가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가 '즉시 적용'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건 언제부터 논의된 건가요?" 담당 부서에 문의했다. "지난주에 결정됐어요." "그럼 미리 공지를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공지는 지금 하고 있잖아요."
나는 그레고르 잠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제까지 내가 알던 세상의 규칙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몇 개월 후, 나는 새로운 기획안을 제출했다. 꽤 공들여 만든 것이었다. 시장 조사부터 예산 계획까지 빠짐없이 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 후 돌아온 건 간단한 한 줄이었다.
"검토 결과 부적절함."
부적절한 이유가 뭔지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요?" "전반적으로 기준에 미달됩니다." "그 기준이 뭔가요?" "내부 기준입니다."
카프카의 『소송』이 떠올랐다. 주인공 K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누가 자신을 고발했는지, 어떤 법에 의해 재판받는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내 상황도 비슷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제 속에서 살았다. 그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면서 거대한 시스템 속 개인의 무력함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의 작품들은 바로 그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소송』의 주인공 K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체포된다. 죄명도 모르고, 고발자도 모르고, 재판 일정도 불분명하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법정과 관련이 있다고 하지만, 정작 그 법정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게 바로 현대 조직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지만, 그 시스템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잘 모른다. 규정은 있지만 해석은 제각각이고, 절차는 있지만 그 절차가 왜 그런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카프카의 또 다른 소설 『성』에서 주인공 K는 성에 도달하려 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성과 소통하려 해도 메시지는 왜곡되거나 무시된다. 성의 관리들은 있지만 그들과 직접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 조직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정작 그 '위'가 누구인지,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중간 관리자들은 있지만 그들도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메시지는 계층을 거치면서 변질되고, 원래 의도는 사라진다.
내가 경험한 것을 돌이켜보면, 카프카적 상황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변화는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레고르가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었듯이, 조직의 규칙도 하루아침에 바뀐다.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한 사전 설명이나 준비 기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에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공문이 내가 몇 달째 진행하던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 순간처럼 말이다.
둘째는 불투명성이다. 결정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종합적 판단', '내부 기준', '상황상 어려움' 같은 모호한 표현들로 가득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마치 안개 속에서 길을 찾으려 하는 것 같다. 목적지는 있다고 하는데, 그곳으로 가는 지도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셋째, 문제 해결이 계속 미뤄진다는 점이다. 『소송』의 K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진실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공정한 판단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 "다음 회의에서 논의하겠습니다"는 말이 몇 달째 반복되고, 그 다음 회의는 또 다른 다음 회의로 미뤄진다. 시간은 흐르지만 진전은 없다.
마지막으로 고립감이 있다. 이상한 것이 자신뿐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 같고,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질문하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회의실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만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하지만 회의 후 개별적으로 만나면 그들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혼자만 그런 것처럼 느끼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다.
카프카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무엇인가? 그는 현대 사회의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그 시스템은 합리성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필연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스템이 너무 크고 복잡해서 개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개인의 필요는 고려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레고르 잠자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카프카의 세계는 절망적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카프카가 계속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카프카는 부조리를 해결하려 한 것이 아니라 드러내려 했다. 우리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그 감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가 미쳐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미쳐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겪고 있는 답답함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카프카가 우리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다.
카프카는 부조리를 발견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는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좌절하거나 체념한다. 하지만 카프카 이후에 등장한 철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카뮈는 부조리를 인정하되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모색했다. 사르트르는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이데거는 일상의 평균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존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카프카가 문제를 정확히 진단해주었다면, 이제는 치료법을 찾을 차례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카뮈가 제시한 해답을 살펴볼 예정이다. 시지프스처럼 끝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 부조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어떻게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벌레로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선택의 여지가 바로 우리에게 남은 희망이다.
다음 편 예고: 카뮈, 부조리 속에서 살아가는 법 - 시지프스의 바위와 월요일 아침, 끝없는 반복 속에서도 어떻게 의미를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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