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위한 용기
내가 어릴 적 홀로서기를 결심한 엄마는 젊은 나이에 웃음기 없는 얼굴의 가장이 되어 있었다. 엄마 혼자 우리 자매를 키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당연히 가정형편은 좋지 않았다. 엄마의 상황이 어린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서일까. 난 엄마에게 무언가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일찌감치 눈치라는 게 생겨 인문계가 아닌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고등학교에 입학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무용반이 있었던 거다. 신기하게도 특별활동으로 제대로 된 무용반이 존재했다. 무용을 전공하신 선생님이 계셨고 각종 무용복은 물론, 여러 장르의 무용을 배울 수 있었다. 무용반 선후배 간의 위계가 엄격한 것에 다소 위축되기도 했지만 사교육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에 학교에서의 무용 수업은 그저 감사한 시간이었다. 무용에 흠뻑 빠져 다리가 성할 날 없이 연습에 연습을 하면서도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방과 후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할 정도로 난 무용이 좋았고 학교 축제 때 무대 위에 오를 때면 진짜 무용수가 된 것처럼 그 순간을 즐겼고 행복했다. 딱 그때까지였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취업하기 위해 상업고등학교를 갔으니 취업을 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내가 좋아한 것이 무엇인지 서서히 잊혔다.
결혼 후 첫 딸을 낳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방과 후 수업으로 방송 댄스를 하겠단다. 딸은 방과 후 수업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댄스학원까지 다니며 춤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남편은 내가 아이에게 헛바람 들게 한다고 여기며 탐탁지 않아 했다. 공부가 제일이라 생각했던 그는 쓸데없이 댄스학원을 보낸다며 나를 못마땅해했다. 나는 공부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자신이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하길 바랐다.
결국 남편과 나의 의견차이로 딸은 초등학교 5, 6학년 경 다니던 댄스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중학교에 입학한 딸은 자유학기제 실시로 학교에서 한국무용을 접했다. 그때부터 딸은 무용을 정식으로 배우길 원했고 무용으로 대학을 가고 싶어 했다. 난 딸이 하고픈 것을 하길 바랐고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무용을 하려면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우리 형편에 부담이 클 것도 예상 됐다. 하지만 형편 때문에 아이의 꿈을 접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예체능계열이 쉽지 않은 길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남편은 딸에게 재능이 없다는 말로 상처를 주며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딸은 꿈을 포기해 버렸다. 아이의 미래에 대한 우려로 반대하는 남편의 마음도 충분히 헤아려졌다.어린 시절 가정 형편 때문에 말도 꺼내지 못했던 아이와 아빠의 반대로 꿈을 포기해 버린 아이. 두 아이의 심정이 맞닿아 있는 듯했고 내 가슴은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춤을 끊어버린 딸은 고등학교 진학 후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했다. 갈 길마저 잃었다고 했다. 대학은 갔지만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의욕이 없어진 딸에게 진로에 대한 이야기라도 나누려 시도하면 바로 화제를 돌리기 일쑤였다. 춤에 대한 열정이 아직 남아 있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아빠를 다시 한번 설득시켜 보자고, 용기를 내보자고 딸을 다독였다. 그때마다 딸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겠어.”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과거 남편을 설득시키지 못한 내가 죄인 같이 느껴졌다. 나 또한 남편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쏟아내기도 했다.
나는 딸에게 진로 상담움을 받아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다행히 딸은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상담 회기를 거듭할수록 딸의 마음은 용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방전상태였던 딸은 충전되고 있었고 점점 활기를 되찾았다.
어느 날 딸이 우리 부부에게 말했다.
“나 무용하고 싶어. 진심이야.”
“그래. 한 번 해 봐.”
“내가 그 말이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알아?”
딸의 진심이 통한 걸까. 남편과 딸의 담백한 대화에 코끝이 찡해졌다. 서로가 만족할만한 이 짧은 대화가 성사되는데 8년이 걸렸다. 딸은 휴학을 한 후 무용레슨을 받으며 그동안의 한을 풀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모하고 의미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더 큰 것을 얻었다. 딸의 행복! 용기를 내어 도전하는 딸은 행복할 자격이 충분하다.
당장 무엇이 되지 않아도 매 순간 진심인 딸은 언제나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고 살게 될 것을 믿는다.
너의 모든 것을 항상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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