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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돌자 전국 한 바퀴 Ep.2

종이지도

by 언돌이

분주하게 짐을 싼 뒤 안락함을 제공했던 모텔에서 나왔다. 얼마 가지 않아 약국에서 멈추더니 피로회복제를 사 먹자고 한다. 나는 여행비를 초반부터 쓰면 안 될 것 같아 반대했다. 찬성 2표가 나와 사먹기로 했다. 광고에서만 본 우루사는 처음 먹어봤다. 반신반의했지만 약간 남아 있던 피로가 바로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다. 투표에서 진 것이 분하지 않았다.


밤새 고압수처럼 내린 비는 오늘을 닦기 위해 그렇게 억수같이 내렸나 보다. 스팀다리미로 온 세상을 다림질 한 느낌이다. 날씨가 뽀송하다. 아마 어제 학교 경비원님이나 경찰관들의 반대에 무릅쓰고 텐트를 쳤다면, 오늘 아침 싸늘하게 발견되지 않았을까? 적어도 사고는 방지하기 위해 연출가가 심어 놓은 안전 요원이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했다.(또 트루먼 생각)


자 이제 순조롭게 출발하면 된다. 천안으로 향하는 중이다. ‘어서 오세요. 이곳부터 천안입니다.’라는 표지판을 보니 천안이지 싶었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불편감을 느낀 카메라 스트랩 때문에 잠깐 멈추고 싶었다. 멈춰서 오른쪽 크로스로 되어있는 스트랩을 왼쪽 크로스로 바꾸고 싶었다. 목에 담이 걸릴 것만 같았다.


- 야! 잠깐 멈춰봐!


나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리는 저 녀석들을 놓치면 안 된다 생각했다. 그래! 결심했어! 달리면서 바꾸자.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스쿠터의 스로틀을 1초만 왼손이 버텨준다면 금방 카메라를 벗을 수 있겠다 싶었다. 0.1초 만에 스쿠터는 뒤집어졌고 내 시야의 세상이 거꾸로 돌아갔다. 그제야 먼저 출발한 저 두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 돌아왔다.


- 야 미친 괜찮아?

다급하게 진돌이가 물었다.


-….. 에이 씨 실패했네...

나는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미친놈아. 백미러로 보고 있는데 너랑 오토바이가 한 바퀴 돌았어!


생각보다 다친 곳은 없었다. 찰과상 정도다. 어깨에는 피가 났고 오른쪽 다리가 긁혀 피가 났다. 어깨의 상처는 흉터가 되어 2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어디가 부러지진 않았다. 잠깐 길바닥에서 쉬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거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아까의 상황을 이실직고했더니 병신이라 놀리면서 박장대소했다. 그러다 진돌이가 이런 말을 했다.


- 어제 비 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왜 이렇게 인간극장 같냐.


라면서 셋은 인간극장 BGM을 입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때! 라는 멘트도 덧붙혀야 한다. 실없는 농담을 나누고 근처에 천안 단국대학병원을 갔다. 일요일이라 대학병원 응급실만 오픈했으리라는 아주 합리적인 사고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혼자 넘어졌으니 보험이 안되고 주말 응급실은 엄청 비싸게 나올 것이라는 원무과의 설명에 졸았고 왠지 괜찮은 느낌이 들어 에이 그냥 가다가 약국에서 빨간약이나 받자!라고 다시 출발했다. 20대의 나 완전한 상남자.


천안은 조사한 것이 없어 패스하고 바로 공주시에 향했다. (천안이 대도시인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들렀다. 공산성에서는 굴렁쇠나 옥사체험장 앞에서 곤장 맞기 체험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바로 사진을 찍어 남겼다. 무령왕릉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나무 하나 없는 길에 햇볕은 억세서 상처부위가 매우 따가웠다. 전시관에 들어서자 쾌적한 에어컨으로 그나마 한숨 돌렸다.


다음 도시인 부여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정신을 살짝 잃었던 곳이. 어떤 박물관을 갔는데 도저히 전시장을 들어갈 힘이 없어 홀에서 앉아 있을 테니 너네는 다녀오라 했다. 푹신한 로비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여 잠을 청했다. 금세 친구들이 상설전시물을 보고 나를 깨웠다. 정말 달고 단 꿀잠이었다. 친구들은 또 폭소를 하면서 이건 잠이 아니라 분명 기절일 것이라며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형광색 나시티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고 있었다. 아니 기절했다.


대전에 가서 달달한 빙수를 먹었다. 이제는 전국에 몇 볼 수 없는 캔모아에 갔다. 커플 그네 벤치에 레이스 식탁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자 셋이서 (한 명은 피 철철) 캔모아에서 빙수 먹는 모습이 웃길 것 같았다. 그래서 갔다. (성심당은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오늘 베이스캠프는 외할아버지댁이다. 대전 밑에 금산이라는 인구소멸위기에 처한 인삼이 유명한 작은 도시이다. 외할아버지댁에서 자는 이유는 단순하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날이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서둘러 금산으로 향했다.


여태 평택-천안-공주-부여-대전까지 가는 길이 순조로워 보일지 모른다. 우린 2008년 최신 지도(개정판)를 들고 여행을 했었다. 당시에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것 이라곤 전화와 문자만 가능한 폴더폰이었다. 내비게이션이라는 개념조차도 모르던 시절이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것은 여행 후 군대 다녀와서 진돌이와 곱창에 소주 마시다가 술김에 동네 핸드폰가게에 찾아가 개통했을 때가 처음이다. 나는 시리우스, 진돌이는 갤럭시 1을 선택했다.


어쨌든 종이지도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굉장히 철학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그래도 가장 큰 도움이 되는 힌트는 예를 들어 ‘43번 국도’라는 표지판 같은 것들이다. 그럼 지도에서 그대로 43번 국도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국도는 생각보다 너무 길다. 때문에 나의 위치를 한 번에 알 수는 없다. 그럴 땐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고 지도에 있는 등고선으로 유추해야 한다. 거기에 주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해당 지역 사람이라면 대답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인 시대였다. 보통 이런 식으로 길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다시 금산으로 가는 길. 이제는 어둑어둑해진 밤이 되었다. 점점 가로등 하나 없는 기나긴 국도가 나타났다. 주변 지형은 물론 지나가는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길 찾기 방법 3가지를 모두 할 수 없었다. 갓 길에 세워 몇 번이나 종이지도를 보며 여기가 어디인지 회의했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명절만 되면 오가던 곳이라 자만했지만 도저히 모르겠다. 다행히도 저 멀리 주유소가 보인다. 기름도 채울 겸 직원 아저씨에게 oo마을을 물어보니 직선의 국도 너머에 있는 저 반대편 마을이라 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가르쳐준 마을로 향했다. 내가 기억하는 마을 입구에 비석 하나가 있는데 그 비석만 발견하면 식은 죽 먹기이다. 자꾸 막다른 길이 나온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니 다시 그 막다른 길이 나온다. 뫼비우스의 띠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세 번째 아까 봤던 막다른 길이 나오자마자 이건 분명 귀신에 씐 것이 분명하다 싶었다. 저 주유소 아저씨부터 귀신이었을까? 어릴 적 밤새 도깨비와 씨름하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결론은 정신 차려 보니 밤새 커다란 나무와 씨름하는 사내의 이야기)


순돌이는 그 아저씨의 말은 무시하고 일단 큰 도로에 나가 직진해 보자 했다. 아무래도 직진이 맞는 것 같다면서 가보자 했다.(결과적으로는 잘한 짓이다. 아마 이런 식이면 밤새 이름 모를 마을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세 번까지 돌았는데 똑같은 장소이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직진해봤다. 유난히도 기나긴 직선 구간에서 순돌이-나-진돌이 순서대로 주행했다. 갑자기 후미에 달리던 진돌이가 소리쳤다.


- 야!! 멈춰봐!!


야밤이고 주변에 자동차가 하나 없어 나는 진돌이의 외침에 반응을 했다. 순돌이는 우리의 소리를 못 듣고 계속 직진하는 중이다.


- 왜? 또??

내가 돌아서서 진돌이 쪽으로 향했다.


- 오토바이가 섰어!


스쿠터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엔진이 퍼진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을 했다. 평택에서 한 바퀴 구르질 않나, 박물관에서 기절을 하질 않나, 이건 진짜 인간극장 취재팀이 와서 찍어주면 시청률이 꽤나 쏠쏠했을 것이다. 또 인간극장 BGM을 부르며 꽤나 낙관적인 생각을 했다.


저 멀리 순돌이가 역주행하면서 돌아온다. 중앙선은 펜스로 막혀 건너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과감하게 역주행했다. 지나가는 자동차는 아예 없기도 했다. 아무튼 이게 무슨 일이냐면서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일단 어찌 됐든 외할아버지댁까지 가야 하니 순돌이가 매고 있던 가죽 가방끈을 분리시켜 내 오토바이와 진돌이의 고장 난 오토바이를 연결했다. 그나마 내 스쿠터가 힘이 좋았다. 가죽끈도 힘이 좋았다.


직진이 맞았다. 나는 가까스로 뇌리에 깊이 박힌 마을 비석을 발견했고 할아버지는 온 마을 사람들과 트럭을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그 아저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길을 알려준 것일까. 진짜 귀신이나 도깨비가 아니었을까? 충청도 사람인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놀란 표정은 처음 봤다. 손자라는 녀석은 몸에 피를 흘리질 않나, 오토바이 하나는 고장이 나서 가방끈으로 질질 끌고 오질 않나, 내가 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살아있으니 됐다는 마음이신지 이내 안정감을 되찾으셨고 방을 내어주셨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자기 전에 아직 체력이 남아있는지 셋이 나란히 누워 수다를 떨었다. 도대체 이 여행은 왜 이렇게 역경이 많은지 탓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사건사고 없이 평탄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이후로 무탈하게 여행을 했다.) 그렇게 자려는데 순돌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 아까 나 혼자 직진할 때, 밤하늘의 별들이 가득한 거야. 아 이런 거 보려고 여행하는 것이고 진짜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을 하면서 너네한테 밤하늘을 보라고 뒤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어..”


셋 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낄낄 대면서 기나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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