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
귀신에 씌인 듯 요란스러웠던 밤은 아침 햇살에 의해 물러갔다. 주말에 늦게 일어나면 한숨을 쉬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외할아버지는 우리가 늦게 일어나도 개의치 않으셨다. 포근한 온돌방에서 자고 싶은만큼 잤다. 늑장을 부리다보니 배가 고팠다. 부엌에서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다. 내가 요리했으니 나머지 놈들이 설거지할 줄 알았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내가 했다.
잠도 달아났고 배도 든든하니 어젯밤 고장 났던 진돌이의 오토바이를 보고 셋은 한숨을 쉬었다. 충청남도 금산군은 인구 5만 2천의 소도시이다. 인구 소멸 위기 도시에 항상 거론되는 마을이다. (25년 기준) 과연 오토바이를 고쳐줄 수 있는 정비소가 있을지 의문을 갖고 읍내로 향했다. 물론 어젯밤과 동일한 방식으로 가방끈을 진돌이의 오토바이에 연결해 내 스쿠터로 질질 끌고 갔다. 어젯밤에는 아무도 없어 신경이 안 쓰였지만, 낮에 그러고 다니니까 너무 창피했다. 인구소멸 도시라지만 읍내엔 꽤 우리를 보고 비웃을 정도의 인구는 충분히 있었다.
오토바이에 대해 선무당인 시절이라(지금 두 친구는 오토바이 회사에 꽤나 오래 근무해서 전문가이다.) 엔진이 퍼졌을 것이라 진단을 내렸기 때문에 별 기대는 없었다. 읍내에 하나 있는 오토바이 정비소를 발견했다. 전문가에 의해 스쿠터가 사망진단이 내려지면 바로 포기하고 집으로 가자고 합의 했다. 스쿠터는 정비소에 팔면 거마비 정도는 챙겨주겠거니 했다. 오토바이가 멀쩡한 나와 순돌이는 둘이서라도 계속 할지 아니면 죽어도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돌아갈지 의논을 나누고 있었다. 사건사고가 많았던 지난 날을 되돌아 봤을 때 아무래도 여행을 멈추는 의견으로 기울어진 찰나였다.
- 자 이리 와봐유
스쿠터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정비소 아저씨가 우릴 소환했다.
- 여기 밸브에 나오는 기름 보여유? 이게 애기 오줌보마냥 힘차게 나와야 하는데, 봐유 할아버지 오줌발 같쥬?
진짜 검은색 액체가 힘없이 나왔다.
- 세루모터(스타트모터)가 나간거에유. 이것만 고치면 돼유.
엔진이 붙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소식에 셋은 길거리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만큼 기뻤다. 10만 원 정도 나온다는데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상관없었다. (약간 소인배처럼 대전에 가서 세루모터 교체하는데 얼마인지 물어보고 별 차이 없다는 걸 확인하여 호구가 아니라며 안도 했던 것은 비밀) 그래서 언제까지 오면 되는지 여쭤보았다.
- 일주일 걸려유. 고치는데 1시간, 부품 오는데 일주일.
일주일이란 시간은 가혹하게 길었다. 한 2~3주 여행하다가 잠시 숨 고르기 차원에서 쉬는 것이라면 몰라도, 고작 여행 3일 차이다. 이때 어제 아침에 일어났던 사고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은 내 몸상태를 봤다. 아직도 온몸에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태다. 자, 그러면 일주일 동안 내 몸도 요양하고 진돌이 오토바이도 고치자는 결론이 났다. 근처에 있는 한의원에 가서 자전거 타고 넘어졌다고 얼버무리며 치료를 받았다. 소독약을 바를 때 고문받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구경하던 친구들이 낄낄거렸다.
덩그러니 시골동네에 남겨진 우린 뭘 할지 몰라 방황했다. 지도를 펴놓고 ‘보석사’라는 곳이 있길래 그곳에 갔다. (진돌이는 내 오토바이 뒤에 탔다.) 보석사라는 절은 매우 아담한 사찰이다. 그 앞에 있는 은행나무는 천년이 넘었고 거대했다.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너무 굵어 밑에서 지지대로 받쳐놨다. 인간으로 치면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중이라 보면 된다. 차이점이라면 인간은 늙을 수록 노쇠해지는데 은행나무는 나이 들수록 굵고 멋있어진다. 스관(스피드 관광)을 추구하던 우린 대충 빨리 보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주차장에 은색 렉서스 한 대가 멈추더니 한 아저씨가 내렸다.
붙임성이 가장 좋은 진돌이가 물어봤다. 금산에 혹시 가볼 만한 곳이 있을지 여쭤보았다. 아저씨는 같이 보석사로 걷자고 했다. 우린 다 보고 나오는 중이었지만 다시 절로 향했다. 아저씨는 깍두기 머리에 금목걸이를 메고 야쿠자 같은 선글라스를 꼈다. 조직에 몸담았던 사연이 나올 법했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그저 몸이 안 좋아져서 고향에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사진 찍는 것이 취미라 하셨다. 마침 나는 사진에 관심이 갔던 시절이라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는지 여쭤봤다. 구도가 좋아야 한다 했다. 나는 색감이나 아웃포커싱에만 관심이 있던지라 그의 말에 동의하는데 10년 이상 걸렸다. (당연컨데 사진은 구도가 9할이다.)
어쨌든 아저씨는 나의 한 달 아르바이트비와 맞바꾼 카메라로 우리를 찍어주셨다.(솔직히 불안했다. 가져갈까 봐) 당시에 아저씨가 찍은 사진은 아웃포커싱이 안되었네, 색감이 별로네 라는 혼자만의 불만이 있었다. 20년이 지난 뒤에 봐도 저가의 카메라와 번들렌즈로 참 잘 찍으셨다 생각한다.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포인트로 셋이서 앉아있는 사진 한 장과 소나무 숲에서 3분할 지점에 우리 셋을 둔 구도는 배울 점이 많다. 아마 유일하게 남이 찍어준 사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마운 아저씨 건강하세요.
금산 하면 십이폭포 그리고 조금 더 가면 운일암반일암이라는 곳의 아침이 절경이라 하셨다. 드디어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아저씨와 헤어지고 다음 날 대전으로 향했다. (응? 안 가?) 대전에서는 하룻밤 잤다고 했다. (난 전혀 기억에 없음) 찜질방에서 대충 잤고 우린 마음껏 그 근처 맥주집에서 수제맥주를 먹었다.(이상하게 맥주집은 또렷이 기억에 난다.) 민증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주소지가 ‘구리시’인 것을 보고 맥줏집 사장님이 고향사람이라며 서비스를 주셨다. 그 당시에도 대전의 명물 빵집 성심당이 유명했을 텐데 안 갔다. 몰랐다. 그저 지나가는 길거리에 여자들이 참 미인이 많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말이라도 걸어봐야겠다는 사고 자체가 없던 시절이다. 대전에 미인들 참 많다. 끝.
다음날 아침 다시 금산으로 향했다. 이틀 전 야밤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헤매던 동네를 지나쳤다. 주유소가 없더라면 기묘한 이야기에 이야기를 내보낼 수 있겠지만 떡하니 있었다. 우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계속 직진을 했다. 3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3시간이나 보내다니 참 기묘(멍청)했다.
오늘은 보석사에서 만난 아저씨가 알려준 십이폭포에 들리고 운일암반일암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다. 12개의 폭포가 있다 하여 십이폭포이다. 근데 한 3번 폭포부터 너무 덥고 지쳤다. 시원한 계곡물에 들어가려고 여행 전에 사두었던 구명조끼를 들고 갔지만 마땅해 보이는 곳이 없었다. 마침 건기라 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옷이 젖는 게 싫기도 했다. 우린 4폭포 즈음에서 낮잠이나 자고 운일암반일암으로 향했다.
시에서 건설한 걸로 보이는 널찍한 정자 하나가 보였다. 콘크리트 원형 기둥에 빨간색 페인트 칠 하고 한옥식 팔각지붕 그리고 화강석 물갈기 바닥으로 되어있는 혼종이다.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이제는 주변에 카페도 있고 오토캠핑장도 생겼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었다. 텐트 다 쳤는데 갑자기 경비아저씨가 썩 꺼지라할 경비실조차도 안보였다. 평택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극복할 기회가 생겼다. 다시 한번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내보았다. 텐트는 내가 쳤다. 건축과를 다닌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거 맞아? 친구들아?) 냄비밥의 달인 박순돌이는 밥을 짓고 최진돌이는 라면을 끓였다.
텐트에 대해 짧게 설명하자면 무늬만 원터치 텐트이다. 물론 폴대와 천이 일체형으로 결합되어 원터치이다. 무게와 크기가 상당해서 쉽게 되지 않았다.(던지면 알아서 펴지는 원터치를 상상하며 구입하긴 했다.) 어느 정도 노하우가 쌓이니 제주도쯤에서는 눈감고도 쳤지만 초반엔 애를 먹었다. 한 10년 뒤에 캠핑을 취미로 갖게 된 친구들이 말하기를 사실 그건 텐트도 아니라 했다. 바닥과 몸체가 분리가 되었고 그 사이엔 바람도 들어오고 비도 들어오고 모기도 들어왔다. 잠깐 피크닉을 즐기기에 적합한 그늘막에 불과했다. 즉, 비나 바람이 심한 날에는 제 역할을 못하는 텐트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평택에서 그 비바람이 몰아치는 곳에서 이 허술한 텐트를 치고 잤다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모텔, 찜질방, 할아버지 집을 이용해왔던 우린 드디어 첫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할 수 있었다. 이곳은 더군다나 지붕아래 펼치는 것이니 걱정이 없다.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밤이 되었다. 산 중턱이라 그런지 해가 더 빨리 져버렸다. 남자 셋이서 이렇게 어두워지면 마땅히 할 게 없다. 핸드폰은 전화나 문자 말고 기능이 없는 2G폰이다. 소주나 마시고 화투나 치는 게 그나마 평범한 일상이다. 그렇지만 소주는 쓰고 맛없다. 화투만 쳤다. 고작 오늘 저녁 먹은 거 다 치우기 내기였다. 오늘은 내가 1등 했다. 다음날 아침 차리기 내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돌아 다음날 텐트 걷기 내기도 했다. 누가 이겼는지는 별로 안 중요하다. 어차피 다 같이 치웠다. (착했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호수 위로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다. 운일암반일암에서 나온 ‘운’ 자가 구름운이라 이름값 제대로 했다. 멋진 광경을 멋지게 찍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덜 멋져서 실망하였다. 좋은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오토바이 정비소에서 부품이 도착했다는 소식이다. 예상 시간보다 이틀이나 먼저 고칠 수 있게 되었다. 내 몸도 이제는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다. 생각보다 시간을 절약 할 수 있었다.
오토바이를 찾고 곧장 외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전주로 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주비빔밥을 먹기 위해 전주시로 향했다. 여행 내내 바다를 보면서 달리는 길도 매우 멋지지만 내륙 풍경은 금산-전주 가는 길이 제일 멋졌다. 중간에 대덕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고딕성당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매우 가파르게 높은 지형을 지녔다. 멋진 바위산과 누군가가 꽃꽂이라도 했는지 적절한 위치에 나무가 심어져 있다. 넋 놓고 주행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전주에 도착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보통 도로표지판이나 지도에서 ‘전주시’를 따라가다 보면 전주시청이 나온다. 대전시면 대전시청 부산시면 부산시청 이런 식이다. 지도를 따라가다 보니 전주시청 앞에 도착했다. 비빔밥 유명한 데가 어디 있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보자. 신호등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시던 양산 쓴 할머니에게 여쭤봤다. ‘한국관이 제일 유명하지~’라는 말에 감사인사를 건네고 한국관을 찾아 나섰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종이지도 여행 중이다. 지금이야 검색하면 10초 안에 어딘지 알 수 있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425라는 주소가 나온다. 경로검색 한번 누르면 교차로에서 좌로 우로 갈지 알려준다. 하지만 한적하고 단순한 시골길과는 다르게 전주시는 생각보다 큰 도시이다. 여러 갈래로 나뉘는 길이 연속으로 나온다. 분명 이 근처가 맞는 것 같은데 유턴을 몇 번이나 했음에도 한국관은 못 찾았다.
친절하게 알려준 길에서 만난 할머니의 정보는 정말 죄송하지만 다른 식당에 가야 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간판에 ‘전주비빔밥’이라 적혀있는 식당 아무 곳에나 갔다. 나랑 순돌이는 일반 비빔밥을 시켰고 진돌이는 육회 비빔밥을 먹었다. 생선회도 아니고 소고기 회라니, 참 특이한 식성이라며 순돌이와 함께 진돌이를 비난했다. 하지만 항상 입맛에 있어 선구적인 진돌이는 나보다 10년 이상 빨리 맛있는 육회라는 장르를 누렸다.(지금은 없어서 못먹는다.)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지만 놋그릇에 생각보다 고급스러웠다. 배부르게 전주비빔밥을 먹고 나와 순돌이와 함께 담배를 폈다. (진돌이는 비흡연자) 마주 보며 순돌이와 담배를 폈는데 순돌이 뒤편으로 보이는 배경에 초점이 맞춰지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 야 씨 저거 뭐야?
나의 외침에 두 친구가 내 손가락 방향을 향해 돌아보았다. 이내 나와 함께 소리쳤다. 바로 그 유명한 전주의 자랑 ‘한국관’이 길 건너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