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아저씨들
일주일 동안 발목 붙잡혀버린 우린 성급해졌다. 하루에 최대한 많이 달리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진돌이의 오토바이가 언제 또 망가져버릴지 모르겠으니 최대 속도 60km/h를 넘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공랭식 엔진이라 50분 주행하고 10분 정도 길거리에서 쉬었다. 그렇게 8시간을 타면 200km 정도 주행 할 수 있다. 무더위가 지속되는 여름에다 계속되는 진동 때문에 스쿠터보다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이 더 죽을 맛이다. 주로 돗자리를 깔고 길바닥에 누워서 자거나 순돌이와 나는 담배를 태웠다.
전주의 한국관 건너편 지하상가에 있던 전주비빔밥집에서 점심을 먹은 우린 50분 주행 10분 휴식을 원칙을 잘 지키며 남원으로 향했다. 도착할 때 즈음 비가 오기 시작했다. 평택 트라우마가 떠올랐지만 남원의 비는 추적추적 운치 있게 내렸다. 남원시에 가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저층 건물들이다. 도시 중간에 있는 하천을 중심축으로 건물과 길이 가지런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이런 도시에 비까지 살랑살랑 내리고 있으니 낭만이 가득했다.
스쿠터 여행자에게 우산은 사치다. 가방에 넣어둔 우비를 꺼내서 광한루를 돌아다녔다. 비닐 우비로 떨어지는 빗소리도 낭만으로 치환했다. 이러니 내 기억 속 광한루는 그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이후로도 어행으러 5번 정도 다녀왔다. 마침 춘향제가 한창일 때도 찾아갔고 명절에도 식사도 하고 쉴 겸 찾아갔다. 일 때문에도 간 적이 있었다. 연못, 그 위에 오작교, 그 아래 비단잉어, 그 중간에 대나무 숲과 정자, 그 건너편에 커다란 광한루.. 모든 게 완벽해서 그런지 20년째(아마 100년 후에도) 큰 수정 없이 같은 디자인으로 남아있다.
오늘의 종착지이자 베이스캠프는 곡성시이다. 우리 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남원에서 곡성은 매우 가까운 편이다. 왕복 2차선 도로인 섬진강 길을 주행하고 있으면 뒤에 3~5대 정도 자동차가 쌓여있다. 선두로 달리던 순돌이는 갓길에 대고 손짓으로 차를 보낸다. 그렇게 또 출발하면 자동차가 쌓여 다시 보내느라 갓길에 세웠다. 한 세 번 정도 쌓여있던 자동차들을 보내고 나니 50분 주행을 주행했고, 10분 휴식을 위해 경치 좋은 곳에 세웠다.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스쿠터로 여행을 하다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오토바이 여행자들끼리는 반대되는 차선에서 마주하면 손을 흔드는 것이 전통이다. 마치 버스 기사님들이 같은 회사 버스를 마주할 때 손을 들고 인사하는 것 과 같다. 다르점이 있다면 다른 종류의 오토바이라도 무조건 손을 흔든다. 첫 손인사는 집에서 출발한 지 30분도 안돼서 이뤄졌다. 반대편에 말굽소리를 내며 주행하는 할리데이비슨 아저씨들이 우릴 보고 손인사를 해줬다. 우리 셋은 그 사실에 진정한 여행을 하고있다는 환희와 어떤 소속감을 느꼈다. 이후에 모든 오토바이를 보면 손 인사를 먼저 건네주었다.
쉬는 동안에도 여러 오토바이들이 지나갔다. 우린 쉬는 시간에도 성실하게 손인사를 건네었고 다들 답변해 주었다. 혼자 주행 중이던 아저씨에게도 손인사를 건네었는데 우릴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다. 한 200미터를 지나가더니 유턴을 하며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봤다. 순간 좀 쫄았다. 우리가 뭐 잘못한 거 있나? 별로 돈도 없는데, 털지 않아 줬으면.. 따위의 걱정이 앞선 건 사실이다.
- 이렇게 여행하는 거예요? 귀엽네
아저씨는 혼다쉐도우 400이라는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일주한다 했다. 가끔 더우면 웃통 벗고 두건만 쓰고 주행하는데, 인증숏을 보여주며 식스팩을 자랑하셨다. 얼굴도 배우 최민수 님과 닮으셨다. 우리의 형형색색 스쿠터와 부산스러운 짐들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모습이다. 검은색 옷, 검은색 오토바이, 검은색 두건, 검은색 선글라스로 색깔을 맞췄다. 직업도 지나가는 민간오토바이를 털어가는 마피아가 아닌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선량한 시민이다. 아저씨와 우린 한 번도 안 할 연락을 하자며 번호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할머니댁에 도착했다. 그때까진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라며 맞이해 주셨다. (요즘은 안 해주신다. 증손자들한테 똥강아지 타이틀을 뺏겼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평생을 곡성에서 거주하셨다. 부모님을 비롯해서 집안 어르신들이 편한 도시로 이사할 것을 권유해도 고사리밭 매실밭 밤밭을 일궈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셨다. 두 발이 자유로운 사람임에도 곡성에 뿌리를 내려 움직일 수 없는 나무 같은 분이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근처 태안사라는 절에서 몇 년 동안 보살님으로 지내셨다. 덕분에 여름방학 때 장기간 템플스테이 비슷한 것도 해봤다. 한국 불교에서는 식사를 한 뒤 물을 부어 마시는 행위를 발우공양이라고 한다. 한 번은 카레가 나왔다. 그것만 빼면 그럭저럭 할만 했다.
아무튼 할머니는 손자와 그 떨거지들(진돌이 순돌이)이 왔으니 한 상 가득 밥을 차려주셨다. 전라도 분이시라 맛은 이미 보장되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참치김치찌개는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하지만 평소 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인생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찌개는 할머니가 해주신 김치찌개라 자부한다.) 친구들도 입맛에 맞았는지 코 박고 먹기만 했다.
아직도 명절에 놀러 가면 그때 그 친구들의 안부를 물어보신다. 감사하게도 기억해 주셨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다음날 할머니댁에서 일찍이 나왔다. 아침식사는 거르면 안 된다며 전 날 먹은 만큼 차려주셨다.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광주로 향했다. 이때가 2주 차이니 이제는 조금 동네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살면서 가족여행, 수학여행뿐이던 우리는 대견하게도 주체적인 여행을 하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사실 뭐 한 게 없다. 점심을 먹었고 광주비엔날레가 열린 큰 건물을 갔다. 행사는 이미 끝이 났는지 아무도 없었고 그냥 대충 사진이나 찍었다. 당시에 남자라면 보통 취미가 피씨게임이 기본값이었다. 거의 중독자와 다름없다. 그런 애들이 2주간 게임을 못했으니 금단현상에 못 이겨 피시방에 갔다. 피파온라인을 하면서 간간히 골을 넣으며 오두방정을 떨며 좋아했지만 대부분 패배했다. 지는건 익숙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현질은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재능도 없기도 했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 목포시로 향했다. 예로부터 평야 지역이 많아 논농사의 1등 지역으로 유명한 전라도는 실제로도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평평하고 드 넓었다. 코너나 오르막 없이 직진만 하다보니 반쯤 졸면서 갔다. 이정 도면 자면서 가도 되지 않을까 라는 미친 생각에 잠깐 눈도 감아봤다. 5초 정도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갓길로 벗어나 가드레일과 몸통 박치기를 할 뻔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시 또 한 바퀴 뒹굴 수 없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목포시에 들어서니 어느새 어둑해졌다. 텐트를 칠만한 베이스캠프를 찾아 헤매 다녔다. 생각보다 도시는 건물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았다. 평택에서 호되게 당한 우린 학교 운동장은 더 이상 고려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다음날 아침부터 배를 타야 하기에 미리 길을 외우자는 생각에 목포항국제여객터미널 가보았다. 혹시나 항구 근처에 베이스캠프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해보았지만 마땅한 곳은 없었다.
잠깐 쉬고 있는데, 자전거 여행중이시던 아저씨 무리도 있었다. 그 중 아저씨 세 분이 다가왔다. 4-50대는 되어 보였다.
- 이런 건 얼마나 해?
우리의 귀여운 스쿠터를 보고 말을 걸어주셨다. 300만 원쯤 해요.라고 거짓말 했다. 알바비 모아 중고로 90만 원 주고 샀지만 꿀리고 싶지 않아 3배를 불렀다.
- 우리 자전거는 얼마 같아?
자전거가 그래봤자 자전거 아닌가? 우린 손으로 당기기만 해도 자동으로 나아가는 오토바이보다 저렴할거라 생각했다.
- 한 70? 하지 않나요?
우리의 때 묻지 않은 세상물정에 푸하하하 폭소를 터트리신다.
- 안장 가격만 70이여~
한 대에 1,200만 원도 넘는 자전거라고 하셨다. 이 아저씨들도 3배튀기 했을까? 감안하더라도 우리 오토바이 세대 값보다 비싸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사진이나 같이 찍었다. 섬진강에서 만난 아저씨와는 다르게 번호를 교환하진 않았다.
캠핑은 불가한 것으로 판명이 나 근처 여관에 가격을 물으러 다녔다. 야놀자니 여기 어때니 없던 시절이다. 제일 처음 간 여관이 3만 원이라 한다. 가격이 만족스러워 딜 했다. 현관은 목재문으로 되어있으며 잠금장치도 어딘가 허술했다. 밤사이 괴한이 쳐들어올까 불안해서 현관 앞에 수 많은 짐을 쌓아두었다. 방에는 티브이 하나와 이불만 있는 단촐한 여관방이다. 화장실엔 샤워기는 고사하고 세면대도 없었다. 냉온수 수도꼭지 두 개와 대변기가 끝이다.
우린 또 3분 카레와 밥을 사 와 밥을 먹었다. 추 후에 목포에 놀러 가니 낙지가 유명한 곳이다. 아무리 비싸도 사먹어야 했을 정도로 맛도 있었다. 하지만 우린 3분 카레를 먹렀다. 돌이켜보면 참 불쌀하고 무식하게도 여행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맥주를 사와 작은 호사를 누렸다. 우리는 낡은 티브이 앞에서 베이징 올림픽 배드민턴 남녀 혼성 시합을 봤다. 이용대 선수와 이효정 선수는 금메달을 땄다. 피파온라인으로 골을 넣었을 때보다 더 큰 도파민이 터졌다.
고등학교 시절 윤리시간에 배운 쾌락주의 사조인 에피쿠로스 학파가 생각이 난다. 쾌락이라 해봤자 거창하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예를 들어 평일 내내 열심히 노동을 하며 맛대가리 없는 마른 빵을 먹다가 주말에 겨우 카스테라 정도의 부드러운 빵을 먹는 것이 쾌락이라 정의한다. 우리에게 쾌락은 그저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이다. 우리의 여행은 에피쿠로스 학파 교과서에 실릴만 하다.
그렇게 오늘도 쾌락적인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