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조끼
다음날 아침, 목포의 항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꽤 활기차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커다란 배는 처음 봤다. 일반 자동차를 수십 대 싣고 심지어 5톤 트럭이 여러 대 들어와도 남아도는 배였다. 건설 현장 트럭, 우체국 트럭 등 다양한 차들이 배에 실렸다. 그에 비해 우리의 스쿠터 3대는 아주 작았다. 오토바이다 보니까 넘어지지 말라고 양쪽에 단단한 끈으로 고정시켜주었다. 육중한 배가 움직이자 목포가 점점 멀어진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벗어나는 경험을 하는 중이다. 남해의 수많은 섬이 있다는 것은 지리시간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작고 큰 섬까지 꽤나 다양한 섬이 실존했다. 사이사이로 배는 유유히 지나갔다. 설레는 마음에 갑판 위에서 사진도 찍고 갈매기한테 새우깡도 줬다.
1시간 동안 그러고 있으니 이내 지루했다. 생각보다 배가 느리다. 지루함을 못 이기고 나머지 두 놈은 아까 내부에 있는 홀에서 봤던 오락실에 가 1945 비행기 게임을 하고 오겠다 했다. 나는 여기서 남을 테니 다녀오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커다란 배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 뒤보다 좌우로 흔들리는 게 더 고통인 것을 알게 되었다. 속이 너무 안 좋아졌지만 야외라서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락을 하고 온 두 놈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게임을 하는데 너무 어지러워서 중간에 멈추고 돌아왔다고 한다. 진돌이는 화장실에서 버튼을 누르고 왔다고 했다.
-응? 버튼이 뭐야?
-(손가락으로 혀를 누르며) 우웩
그 뒤로 ‘버튼을 누른다.’는 우리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밥을 먹다가 채한 느낌이 오면 가서 버튼을 누르고 와.라고 하던가, 술을 과하게 마셨을 때도 버튼이나 누르고 와야겠다.라는 식으로 오랫동안 써먹었다. 그 외에도 유행어가 꽤 있는데, 유행어 만드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우린 셋 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생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전 학년생을 대상으로 수학여행지를 투표했었다. 제주도와 지리산이 후보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내 주변 모든 친구들이 제주도를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큰 마음을 먹어야 겨우 갈 수 있는 곳이 제주도였다. 신혼여행지, 부모님 효도여행지 등 압도적 1위 여행지로 유명했다. 게다가 비행기도 탈 수 있다. 반면 지리산으로 가면 버스 타고 5시간을 가야 한다. 17년 인생동안 지겹게 명절마다 오고 가서 잘 알고 있었다.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제주도를 찍자며 선동했다.
2014년 ㅁㅁ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지 결과는 (두구두구두구) 지리산!
아 물론 지리산 좋다. 빼어난 산세 빼어난 산세 빼어난 산세.. 하지만 매 년 두 번씩 오는 동네보다는 바다 건너 제주도가 더 가고 싶었다. 이제 나의 설움이 느껴지시는가? 나뿐만 아니라 같이 간 순돌이와 진돌이 역시 같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드디어 설욕할 기회가 찾아왔다. 망망대해를 지나 저 멀리 제주도가 보인다. 우린 아래층으로 내려가 오토바이를 결박했던 끈을 풀고 시동을 걸었다. 배가 제주항에 정박한 후 해치가 열렸다. 해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비단 태양빛만이 아니다. 설렘, 희망, 꿈, 모험심 여러 감정이 쏟아져 내려왔다.
드디어 제주도에 입도한 것이다. 생각보다 발전된 도시여서 놀랐다. 야자수 나무가 이국적이고 길이 너무 잘 닦여있어 놀라웠다. 전국을 누비면서 국도의 도로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하지만 제주도는 미끄러워지듯이 앞으로 나아갈만큼 관히가 잘 되어있다.
제주항에서 얼마 가지 않아 용두암에서 사진을 찍으러 갔다. 교과서에서 본 그대로 용머리처럼 멋진 형태이다. 가까이서 사진을 찍기 위해 검은색의 현무암 바윗돌 위로 걸어가야 했다. 이끼가 끼고 바닷물에 의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바윗돌 사이사이 처음 보는 형태의 바닷벌레들이 바글바글했다. 이런 내용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다.
애월읍 쪽으로 향했다. 우연히 공룡랜드를 발견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순돌이가 공룡을 좋아한다며 급작스럽게 들어섰다. 매표소에 있는 입장료를 보니 너무 비쌌다. 순돌이가 먼저 너무 비싸다며 그냥 가지 말자고 했다. 순돌이는 출입구 앞에 있는 티라노사우르스 모형 위에 올라 타 사진을 요구했다. 나는 미친놈 취급하면서 한 컷 찍어주고 누가 뭐라고 할까봐 얼른 내려오라 했다.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1시간을 달린 후 스쿠터의 휴식을 위해 잠깐 멈췄다. 둘러보니 안개가 자욱했다. 저 멀리 민둥산 하나가 신비스럽게 자리 잡았다. 사진 찍기 너무 좋아 보여 온갖 똥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새별오름이라는 곳이다. 신기하게도 나무 한 그루 없는 풀만 무성한 곳이다. 제주도는 화산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한 지점에 용암이 크게 분출해서 만들어진 것이 한라산이다. 하지만 용암은 액체 상태이니 여러 군데로 흘러갈 수 있다. 힘이 부족해 작게 분출한 탓에 낮은 언덕처럼 보인다. 제주도의 뾰루지라고 이해했다. ‘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아서인지 이름이 ‘오름’이다. 제주도에는 이런 오름이 몇 백개나 된다고 한다. 이 또한 고등학교 한국지리 시간에 배웠다. (유일하게 1등급 과목)
자욱한 안개, 신기루 같은 새별오름, 바닥에 널브러진 수많은 말똥. 가장 완벽한 날에 우린 새별오름을 발견했다. 꽤 그럴싸한 여행 중이다. 여행이 끝나고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는 다른 친구들이 나에게 물어보면 새별오름을 가보라고 했다. 다들 하나같이 일정이 안 맞아서 라는 이유로 다녀오지 않았다. 아직까지 나와 내 친구들만 새별오름을 누렸다. 그거면 되었다. (TV프로그램에서 새별오름이 소개된 이후 약간 유명해지긴 했다.)
밤이 되자 마지막으로 ‘건강과 성 박물관’에 갔다. 여기도 갑자기 들린 곳이다. 출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남자의 성기모양의 석상과 나체의 여자 석상이 우릴 반겼다. 가격이 비쌌지만 공룡랜드와는 다르게 만장일치로 티켓값을 지불했다. 온갖 야한 사진과 전시물에 홀린 듯이 구경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주변을 살펴보니 전부 커플 단위로 왔다. 민망해져서 후다닥 빠져나왔다. 머스마들 셋이서 성박물관은 오아시스 같았다. 그 기점으로 친구들과 성에 대해 수많은 토론을 했다. 이 녀석들과 이러고 있다는 사실에 이내 외로워졌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숨을 쉴 때도 틈만 나면 외롭다고 했다. 이것도 ‘버튼’을 뒤이은 유행어가 되었다. 진돌이는 아침이 되어 일어나자마자 외롭다고 했다. 힘차게 외롭다!라고 하면 안 된다. 힘앓이 없이 아 외롭다..라고 해야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 내내 아저씨들만 꼬이니 무언가 잘 못되긴 했다. 정말 외로웠다.
제주도의 가장 좋은 점은 해수욕장 차고 넘쳤다는 것이다. 텐트를 쳐도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하지 않는다. 우릴 쫓아내는 관리인도 없는 무명의 해수욕장도 많이 발견했다. 건축학과 출신인 내가 텐트를 쳤고(얘들아 진짜 이거 맞는 거지?) 나머지 둘은 먹을 것을 사러 다녀왔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불멍을 하다 보니 어느새 여행의 반은 지나간 느낌이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건 사고가 많아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그에 대한 보상일까? 굵직한 사건 이후로는 항상 평화롭게 여행을 했다. 오설록 티뮤지엄, 여미지 식물원, 영화박물관, 천지연폭포, 섭지코지, 성산일출봉 등 패키지여행자처럼 관광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이 했다.
배를 타고 우도로 향했다. 목포에서 제주도에 갈 때만큼 큰 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토바에 세 대와 여러 자동차가 실리는 배다. 조사한 바로는 우도에는 산호초 해수욕장이 있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필리핀 같은 바다라니 기대가 많았다. 실제로 바닥이 보였고 일반 모래 해수욕장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필리핀 바다와는 조금 다르게 푸르스름한 바다색이 아닌 투명에 가까운 바다였다. 이곳에서 우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명조끼를 입고 해수욕장에 입수했다. 어린아이처럼 신나 했고 구명조끼를 입은 채 최대한 안전하게 놀았다. 어느 정도 수영이 가능한 순돌이는 그마저도 갑갑하다며 벗어던지고 맨 몸으로 깊은 물에 떠 있을 수 있었다. 그저 평화로웠다. 또 평화를 누렸다.
한번 더 입수할 기회가 있었긴 했다. 돈내코 유원지라는 곳에서 시원한 계곡이 있기에 구명조끼를 들고 찾아갔다. 발부터 담궈보니 뼈가 시려울 정도로 차가웠다. 나와 진돌이는 두 손 두 발 들고 바위에 앉아있었다. 용감한 순돌이는 과감하게 몸을 담궜다. 하지만 10초 이상 못버티고 온갖 욕을 하면서 나왔다. 구명조끼는 방석으로 사용했다.
여기까지 읽다 보니 구명조끼는 전혀 쓸모없어 보인다. 왜 그딴 걸 샀냐 비판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8월 중순이 지나니 밤이 되어 오토바이를 타면 꽤나 쌀쌀하다. 우린 그저 ‘여름’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반바지 반팔만 준비했다. 그래서 전혀 추위에 대비가 되질 않았는데, 그때 사용한 것이 구명조끼이다. 몸통이라도 보온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른다. 이쯤 되면 구명조끼가 아니라 보온 조끼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