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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돌자 전국 한 바퀴 Ep.8

노스탤지어

by 언돌이

충청도-전라도를 지나 제주도를 찍고 남해안을 달리며 여행을 하던 우리는 어느새 동해바다를 종단하고 있다. 곳곳의 표지판에는 이 도로가 7번 국도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아시안 하이웨이’라는 표지판도 간간이 보였다. 왜 아시안 하이웨이일까 알아보니 이대로 쭉 가면 러시아를 횡단하는 도로가 나온다고 한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이 길 그대로 세계여행이 가능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우린 유럽까지 스쿠터 타고 갔을 것이다. 물론 준비가 부족하고 곳곳에 이상한 변수가 생겨 고생을 사서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열정으로만 가득 찬 우리는 어떻게든 해 내고 적응했을 것이다. 그늘막에 가까운 10인용 텐트에서 불편함 없이 잘 잤고, 3분 카레만 있으면 식사도 문제없다. 우리처럼 20대에 막 들어선 학생들이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것은 어쩌면 관례가 되었을 수 있다. 북한에 가로막혀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억울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동해바다의 큰 항구에서 오토바이나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출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육지로 여행하는 것과는 천차만별이다. 정 힘들면 다시 돌아가서 재정비해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텐데, 배로 가면 아쉬워서라도 쉽게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아시안 하이웨이라는 글자에 설렌 생각과 아쉬운 마음이 공존했다. 언젠가 우리도 오토바이를 배에 싣고 유라시아를 횡단 하자 약속했다. 그저 약속으로 끝날 것 같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옆 나라를 육지로 가는 외국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반도국가가 아닌 섬나라와 다름없다. 어서 아시안 하이웨이가 개통되길 바란다.


삼척에서는 환선굴을 관광했다. 오토바이는 매표소에 두고 걸어 올라가야 했다. 도보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매우 더운 낮기온을 기록했다. 동굴에 들어서자 밀양 얼음골처럼 누가 에어컨을 켜놓은 듯 시원했다. 3~4층 건물의 높이만큼 대 공간이 있는가 반면 좁은 곳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테마놀이동산 같다. 하트모양으로 뚫린 바위나, 티끌 하나 오염되지 않은 듯한 맑은 물도 있다. 내부에는 다양한 모양의 종유석이 있는데, 익숙한 이름을 갖다 붙여서인지 진짜 그렇게 보였다. 만리장성이나 도깨비방망이, 마리아상 등 엇비슷하게 보였다. 뭐 얼마나 크겠어?라고 생각했지만 1.6km의 코스이고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내가 경험했던 동굴 중에 제일 컸다. (첫 동굴체험이기도 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잠이 잘 안 오기도 했다. 밤을 새우다가 새벽녘이 밝았을 때 내가 밤을 지새웠다는 사실에 뿌듯하곤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싫어하시기에 일찍 깬 척을 하며 새벽 5시에 괜히 거실에 나가 티브이를 켰다. 정규 TV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에 애국가를 틀어주곤 하는데, 그때 영상 속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이때 촛대바위 위에 해가 딱 걸린 것을 보고 너무 근사하다 생각이 들었다. 초에 불이 붙은 느낌이 들었다. 이걸 보기 위해 오늘의 베이스캠프는 추암 해수욕장이다.


해변에 대충 텐트를 치려 했지만 관리인이 와서 캠핑존이 따로 있다 하여 소정의 돈을 내고 정식으로 자리를 배정받았다. 보통 자유롭게 수다를 떨었지만 옆자리에 혼자 자전거 여행을 하는 아저씨가 1인용 텐트를 펼치시더니 일찍 주무셔서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관짝 만한 작은 텐트가 세상에 존재하다는 것이 놀라웠다. 다음날 접었을 때 손바닥만 한 사이즈를 보고 우리의 10인용 텐트와 대조되었다. 부피가 10배 이상 차이 났다. 우리도 저걸 구입했으면 아마 10km/h는 더 속도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허술하게 여행을 해내갔다.


밤을 새우는 것은 쉬워도 해가 뜨기 전에 기상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너무 추워서 각자 침낭을 두른 채 해변으로 나갔다. 촛대바위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은 군사보호구역이다. 철조망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있자 총을 든 군인이 시간에 맞춰 개방해 주었다. 우르르 몰려 가 산책로를 올라가 보니 길게 뻗은 촛대바위 하나가 있었다. 해가 촛대바위 끝에 걸리자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애국가에서 보던 그대로이다.


일출을 보며 시작한 하루는 매우 길었다. 추암에서 평창까지 갔다. 평창을 여행지로 삼은 이유는 허브나라를 가기 위함이었다. 도착할 즈음에는 어두워졌다. 산 속이라 더 빨리 해가 저물었다. 우리의 베이스캠프는 계곡 근처에 있는 공터이다. 이곳까지 도달하기 전에 저 멀리 별처럼 빛나는 여러 펜션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영덕, 추암 이틀 연속 야외취침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샤워도 이틀이나 안 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저런 곳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한 여행자이자 모험가. 목표로 한 공터에 도착하여 진돌이는 방수포를 깔았고 순자는 짐을 날랐고 나는 텐트를 쳤다. 셋 다 말없이 자동적으로 잘 곳을 마련했는데,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근데 아까 봤던 펜션들 되게 좋아 보이지 않았어?(언)

-너도 그 생각했냐? 나돈데?(진)

-이야 나도 그 생각했어!(순)


애써 다 차려놓은 텐트를 접기란 쉬운 결정이 아닐 텐데, 또 다시 텔레파시가 통한 우린 사뿐하게 텐트를 접었다. 근사해 보이는 펜션에서 잘 생각을 하니 히쭉히쭉 웃음이 났다. 아스라이 불빛을 뽐내던 펜션의 문을 두드렸다. 이런 협상은 진돌이가 아주 잘했다. 펜션의 주인과 방이 있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조율했다. 심지어 밤늦게 왔으니 가격을 깎았다. 인터넷 예약이 필수인 요즘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낭만이 그땐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노스탤지어 펜션에 도착했다. 퀸사이즈의 침대가 있었고 샤워실과 주방 그리고 야외 테라스에서 식사공간도 있었다. 떡진 머리, 남루한 얼굴을 한 우리는 차례대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TV동물농장에 가끔 떠돌이 누더기개를 구조해 엉킨 털을 깎아내면 아주 멀끔한 일반 강아지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야 사람다운 모습을 했다.


근처에 마트가 있어 삼겹살과 상추 쌈장 그리고 술을 샀다. 소백산맥이라 들어보셨는가? 소주, 백세주, 산사춘, 맥주를 섞으면 오묘하게 달달한 맛이 나는 폭탄주이다. 소주는 그저 쓰다는 이유로 잘 못 마시던 나와 순돌이는 홀짝홀짝 잘 마실 수 있었다. 고기는 진우가 주로 구웠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먹고 마셨다. 주전자에 섞은 술을 다 마시고 나니 앞이 흐려 보일 정도로 만취가 되었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하루종일 운전하느라 피곤해서 나는 먼저 자겠다 선언하고 비틀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 때 즈음 순돌이가 따라 들어와 옆에 누워 잤다.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로 고생하며 아침에 일어났다. 겨우 정신을 차리며 어젯밤 치우지 않은 테이블 위에 있는 식기류와 음식을 치웠다. 진돌이가 어제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야 어제 우리 옆집에 있던 여자 세 명 기억나냐?(진)

-응? 왜?(언, 순)

-너네 둘이 들어가서 자는 타이밍에 한 명이 와서 같이 놀자고 했어.(진)

-뭐?? 왜 안 깨웠어?(언, 순)

-나도 만취해서 싫다고 했어(진)

-야 이 미친놈아. 물을 뿌려서라도 깨웠어야지(언, 순)


추 후에 은근한 기대를 갖고 펜션을 종종 갔지만 이런 일은 절대 없었다. 여행 내내 아저씨들만 꼬이던 우리에게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여자들이 먼저 찾아온 순간을 폭탄주 소백산맥 때문에 날렸다. 그 뒤로 소백산맥은 절대 안 마신다.


체크아웃을 하고 간 허브나라농원은 동화 속 마을 같았다. 유럽풍 목재건물에 아기자기하게 수 백 종의 허브가 야외와 실내에 적절하게 배치가 되었다. 그럼 뭐 하나 수놈 3명이서 영혼이 빠진 채 걸어갔다. 소백산맥만 없었어도 3:3 데이트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뒤로 평생 소백산맥은 절대 안 마신다.


평창에서 남양주시까지는 135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렇다 할 계획이 없던 우리는 일단 서울방향으로 가다가 괜찮은 곳이 있거나 힘들면 자고 가자했다. 하지만 이제는 워낙 익숙해 이 정도 거리는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3주 정도 여행을 하다 보니 이제는 집에 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40km 정도 남기고 쉬는 시간 회의 끝에 이대로 집에 가자고 결정이 났다.

집에서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여태껏 일어난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기억이라는 것은 쉽게 휘발되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순간순간 떠올리며 저장했다. 다행히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 순간순간이 기억이 난다. 인생에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고 행운이라 생각했다. 이 여행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했고 그 친구들이 진돌이와 순돌이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더 정리해야 할 생각들이 많았지만 어느새 내가 살던 마을에 도착했다. 친구들은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여행이 끝나고 난 트루먼이 아니었다 증명했다. 어디가 심하게 다쳤으면 약국에서 대충 때우지 말고 병원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운전 중에는 카메라를 목에 매고 주행하는 것은 하면 안 되는 것도 알았다. 비가 모질게 오면 잠시 멈출 줄도 알아야 하고 초등학교 운동장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여행은 끝나도 여전히 금요일이 되면 모여서 술을 한 잔 했다. 병적으로 아낀 여행비는 결국 30만 원이 남았다. 이럴 거면 더 맛있는 것도 먹고 더 좋은 데서 잘 걸 그랬다. 그렇게 매주 한 번씩 5번 정도 모여 놀다가 진돌이와 나는 군대에 갔다.(순돌이는 재수해서 늦게 갔다.) 군대에 가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여행은 순수한 20대 초의 우리의 마지막 발악이다.


2008년도의 나의 여름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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