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평소 집안일이라고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우리 셋은 여행을 하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베이스캠프에서 각자의 역할을 했다. 텐트를 치고 밥을 지어먹고 수다를 떤다. 다음날엔 다시 텐트를 접고 주행하기 좋게 짐을 싣는다. 매우 비효율적으로 보이고 번거롭다. 이렇게 3주를 반복하면 너무나 당연해지는 루틴이 된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 된다.
29살이 되자 또 나의 세상은 끝나는 것 같았다. 아직 마음은 17살 철부지인데 곧 30대가 된다. 그래서 마지막 발악이라는 차원에서 홀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유럽 한 바퀴를 돌았다. 2달 걸렸다. 한 도시에 많게는 일주일 적게는 2일 정도 있었는데, 나의 캐리어는 일주일치 속옷과 양말 그리고 옷이 담겨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면 빨래를 해야 하는데, 보통 주말에 코인 세탁소에 갔다. 누가 훔쳐갈까 봐 자리를 지키며 빨래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케아 잡지나 봤다.
이렇게 루틴이 생겨버리니 여행 자체가 나의 일상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나라는 사람을 설명을 할 때 보통 남성, 29살, 직업으로 정의되기 쉬운데, 이 순간은 그저 여행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한 달 뒤면 여행이 끝이 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러한 일상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을 얻기 위해 인간은 여행을 떠나는가? 견문을 넓힌다. 자아를 실현한다. 나를 정의한다. 등등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다녀오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행을 하기 전의 나로 다시 돌아올 뿐이다. 돈과 시간을 버렸다면 맞는 이야기 일 수 있다.
돈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스쿠터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주실 리도 없고) 그래서 1학년을 마치고 바로 휴학계를 내어 돈을 벌었다.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해 한 달 월급으로 카메라를 샀다. 다음 달 월급으로 스쿠터를 사려했지만 워낙 외진 곳에 있는 레스토랑이라 망해버렸다. 택배 회사의 사무직이 편해 보여 다음 알바로 한 달간 일했다. 엑셀 속 수 백개의 데이터를 쳐다보면서 무의미함을 느꼈다. 매 번 졸면서 실수를 연발하니 한 달 만에 잘렸다. 이때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안 망하고 안 잘린 알바장소가 영화관이다. 키오스크로 모든 것을 관객이 담당해야 하는 요즘과는 다르게 인건비가 저렴한 사람을 써서 서비스를 제공했다. 크게 두 가지 포지션이 있는데, 표를 판매하는 파트와 표를 검사하는 파트가 있다. 돈 계산은 나에게 좀 어려워 보였다. 실수하면 모자란 돈은 아르바이트생이 메꿔야 한다는 소문 때문에 검표를 전담해 일을 했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을 내보내고 의자 손잡이를 내리고 팝콘이라도 흘렸으면 청소 아주머니와 치워야 했다. 10분 사이에 이뤄져야 하고 바로 다음 영화가 상영하기 전에 관객을 안내해주어야 한다.
어느 날은 영화가 끝나기 전에 미리 상영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바로 앞에 있었는데, 내가 있는 층에 멈추면 수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구경했다. 수많은 인파 속에 어떤 여자가 특히 눈에 띄었다. 저 여자랑은 평생 말도 못 섞겠다 싶었다. 얼굴도 조그맣고 눈도 엄청 크고 도도한 분위기를 내는 미인이었다. 알고 보니 매표소에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고 출근길에 내가 목격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검표와 매표가 나뉘어 있기에 점심시간이 되면 차례대로 한 명씩 짝지어 밥을 먹는 룰이 있었다. 매표의 누구누구를 찾아 밥을 먹고 오라는 선배 말에 그 사람을 찾으러 갔다. 방금 말한 그 매표 직원이었다. 같이 지정된 식당에 가서 김치찌개, 비지찌개를 각각 시켰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해외축구를 좋아하는 털털한 누나였다. 도도한 외모와는 다르게 매우 털털했고 말도 잘 통했다. 모든 찌질한 남자들이 그렇듯이 식장은 어디로 해야 할지 애는 몇 명을 나을지 중년에 열심히 일해서 노년에 여행이나 다니는 삶을 계획했다.
나는 꽤 나 계획적인 사람이다. 17년이 지난 지금 그때 세웠던 계획을 실천 중이다. 10년 친구 사이를 정리하고 2년의 연애 끝에 강남에서 결혼을 했고 아직 애는 없다. 안락한 노년을 위해 현재 열심히 일 하고 있다. 그녀와.
다시 내 여행론으로 돌아와 여행을 하면 얻는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이 여행 덕분에 아내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평범한 나와 함께 동행한 내 친구들 순돌이와 진돌이에게 오글거리는 감사를 표한다. 저번 처럼 광화문에서 소주나 한 잔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