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 리뷰 (베른하르트)

by 김명준

나는 이 영화가 역겹다, 싫증난다, 구역질난다. 칸트는 예술 따위에다가 숭고를 말하고, 무관심적 관조를 말하고, 미학을 말한다, 칸트는 거짓말쟁이다, 칸트는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예술가들은, 브뉴엘은, 달리는, 나의 정신속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증오를 밖으로 토해내도록 유발할 뿐이며, 이들의 예술에 무관심적 관조란 있지도,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고, 그건 부르주아 취향이거나 부르디외 양반이 권력의 산물이라 폭로했던 그것이거나, 위선이거나, 허영이거나, 거짓이다. 프로이트는, 칼 융은, 라캉은, 지젝은,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은 무의식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특히 이 영화를 만든 브뉴엘은, 무의식을 모른다, 전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철저히 의식적이고, 철저히 의도적인, 그것도 아주 심술궂은, 교활할 정도로 의도적인 영화로 관객을 괴롭힐 뿐이고, 의식으로 무의식을 표현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오만은 반드시 실패한다, 실패한다, 실패한다! 면도날, 손의 개미들, 피아노 위 당나귀, 잘린 손, 배드엔딩 다 역겹다, 싫증난다, 구역질난다, 그리고 브뉴엘이 그러도록 유도했다, 브뉴엘이 이 영화를 싫어하도록, 스크린에 토마토를 던지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난 이 영화를, 아니, 이 증오의 대상을 증오한다, 동시에 집착한다, 증오할 가치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가치를 부여한다, 지루해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리뷰 역시 아무것도 없다, 이 영화는, 이 리뷰는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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