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와 장애학

by 김명준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같은 예술 작품이라도 감상자가 어떤 계급이냐에 따라 취향이 갈린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같은 미술작품은 일반인들에겐 정말 까다로운 그림이다. 학교를 통해 미술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고 어렸을때부터 칸트의 무관심 미학 이론 등을 배우며 자라온 사람들만이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 즉, 문화자본을 얻게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 문화자본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계층 집안의 아이는 어릴때부터 미술관에 가는게 익숙하지만 빈민층 집안의 아이는 미술관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 이후 아우라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예술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말했지만 부르디외는 접근성만 좋아졌을뿐 결국 취향이라는 또 다른 권위가 세워졌다고 폭로한다. “나만 이 예술을 가지고 있다.”는 권위에서 “나만 이 예술을 이렇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는 권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 불평등을 주로 계급의 측면에서 다루었지만 나는 장애학,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도 확장 가능하다고 본다. 나 처럼 자폐나 만성통증, ADHD가 있는 사람에게는 해석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집중자체가 어려울때가 많다. 결국 예술 작품 감상은 문화자본 뿐만 아니라 특정 신체적 조건과 인지적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오디오북이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촉각예술,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통역 등등 다양한 시스템과 형식이 보급되고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건 “나만 이 예술을 이렇게 이해한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는 이 예술을 이렇게 다양하게 감상하며, 우리의 경험 모두가 정당하다.”라는 인정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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