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자기기만

by 김명준

니버는 개인들이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사회가 반드시 도덕적이지는 않다고 밝혔다. 도덕적인 개인도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개인의 도덕적 행위가 집단의 도덕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나 크게 작용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집단의 구조, 제도 등이 개인 행위의 도덕성을 억압할 수 있고, 개인의 이기심은 결국 집단에서 더 강하게 표출되어 사회집단의 도덕성이 개인의 도덕성보다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http://m.reformednews.co.kr/11386)



도덕적 면허 효과(moral licensing effect)란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더 부도덕해지기 쉽다’는 의미의 사회과학 용어다. 사람이 선한 행동이나 도덕적인 행동을 할 경우, 도덕성에 대한 자기 이미지 혹은 자기 우월성에 빠지기 쉽다. 이런 긍정적 자기이미지가 ‘나는 선하다’는 자기 정당화의 방편으로 사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https://www.viva100.com/20230110010003078#:~:text=%EB%8F%84%EB%8D%95%EC%A0%81%20%EB%A9%B4%ED%97%88%20%ED%9A%A8%EA%B3%BC(moral%20licensing,%EC%9E%90%EA%B8%B0%20%EC%9A%B0%EC%9B%94%EC%84%B1%EC%97%90%20%EB%B9%A0%EC%A7%80%EA%B8%B0%20%EC%89%BD%EB%8B%A4.)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면서 그것을 내세우며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아원, 장애인복지시설, 동물보호시설, 환경보호단체 등 각종 시설이나 사회단체에 큰돈을 기부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것봐 내가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 나는 항상 주는 것을 좋아하는 관대한 사람이야“라는 분위기를 풍기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대한다. 그런 선행을 통해 ‘나는 타인들보다 우월하다’는 확인과 증명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형이다.

(https://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88


예를 들어, 마자와 종(Mazar & Zhong, 2010)의 연구에서 환경 제품을 소비한 사람들이 일반 제품을 소비한 사람들보다 후속적인 친사회적 행동을 더 적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환경 제품의 구매가 도덕적 가치감을 이미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의 친사회적 행동을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48221)


도덕적 공황(스탠리 코헨) 상태는 사회에서 발생한 집단들의 행위 또는 사건을 너무 과도한 왜곡에 의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적 개념이다.

(도덕적 공황 상태 분석에 대한 윤리문화적 접근 방안, 송선영, 2008, pp. 121-146)


도덕적 공황은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공동체 또는 사회 전체의 가치 , 안전, 그리고 이익에 위협이 된다는 광범위한, 대부분 비이성적인 두려움입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적 공황은 정치인들에 의해 조장되고, 언론에 의해 지속되며, 종종 공황의 근원을 겨냥한 새로운 법률이나 정책의 통과로 이어집니다.

(https://www.thoughtco.com/moral-panic-3026420#:~:text=%EB%8F%84%EB%8D%95%EC%A0%81%20%EA%B3%B5%ED%99%A9%EC%9D%80%20%EB%88%84%EA%B5%B0%EA%B0%80%20%EB%98%90%EB%8A%94%20%EB%AC%B4%EC%96%B8%EA%B0%80%EA%B0%80%20%EA%B3%B5%EB%8F%99%EC%B2%B4%20%EB%98%90%EB%8A%94,%EC%9D%B4%EC%9D%B5%EC%97%90%20%EC%9C%84%ED%98%91%EC%9D%B4%20%EB%90%9C%EB%8B%A4%EB%8A%94%20%EA%B4%91%EB%B2%94%EC%9C%84%ED%95%9C%2C%20%EB%8C%80%EA%B0%9C%20%EB%B9%84%EC%9D%B4%EC%84%B1%EC%A0%81%EC%9D%B8%20%EB%91%90%EB%A0%A4%EC%9B%80%EC%9E%85%EB%8B%88%EB%8B%A4.)


결국 사람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또 발뺌의 여지만 있으면 대부분이 남을 속인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보관(내면의 변호사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은 정당화를 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명수이다. 그래서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도 대부분은 남을 속인 후 실험실을 나가면서 애초 실험실에 발을 들일 때와 똑같이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남의 잘못을 알기는 쉬우나, 나 자신의 잘못을 알기란 어렵다. 사람들은 남의 잘못은 바람에 곡식 키질하듯 드러내고, 자신의 잘못은 노련한 도박꾼이 패를 숨기듯 감춘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실험자 : 자,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줄리와 마크가 섹스를 한 건 잘못인가요?


피험자 : 네, 섹스를 한 건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요, 그러니까 제가 종교에 독실한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근친상간은 어쨌든 잘못이라는 생각이 그냥 드는데요. 잘은 모르겠지만.


실험자 : 근친상간이 어디가 잘못이라는 건지 말해주겠어요?


피험자 : 음, 근친상간의 개념이 전부요. 그러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그런데 이게 맞는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근친상간을 할 경우 여자가 임신하면 아이가 기형이 됩니다. 근친상간을 하는 경우엔 대부분요.


실험자 : 하지만 이들은 콘돔과 피임약을 썼는데요?


피험자 : 아, 그렇군요. 맞아요. 그랬다고 했죠.


실험자 : 따라서 이들에게 아이가 생길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피험자 : 음, 그렇다면 절제야말로 섹스의 가장 안전한 길이어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음, 어······.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하는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잘 모르겠네요. 당신이 내게 뭘 물었죠?


실험자 : 그 둘이 섹스를 한 것은 잘못일까요?


피험자 :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실험자 : 저는 당신이 그것을 왜 잘못이라고, 무엇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피험자 : 알겠습니다. 음······그러니까······가만있자, 생각을 좀 해보고요. 음······그 둘이 나이가 얼마나 되죠?


실험자 : 대학에 다니고 있으니까 스무 살 정도입니다.


피험자 : 아, 나 이거 참(낙심한 표정으로). 잘 모르겠네요. 전 그냥······그렇게 배우며 자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제 경우엔 그렇다는 뜻이에요. 물론 다들 그럴 테지만(웃음). 그냥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저도 그렇고요. 제 이유는, 음, 아마 이런 걸 겁니다. 그냥, 음······우리는 그렇게 배우며 자라지 않았다고요. 우리는 그런 일은 못 봐요. 용납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막가는 행동이잖아요.


실험자 : 하지만 자라면서 용납 안 될 일이라고 배웠다고 해서 그것을 다 잘못이라고 할 순 없을 텐데요, 안 그런가요? 예를 들어, 당신이 자라면서 여자들은 직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고 칩시다. 그때도 당신은 여자들이 직장에서 일하는 게 잘못이라고 할 건가요?


피험자 : 음······글쎄요······. 아, 아이고. 이거 어렵네요. 음, 뭐라고 얘기해도 내 맘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둘의 행동에 대한 제 느낌은, 그리고 제 생각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저 미친 짓이라고밖에는!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근거라는 것들은 사실 (해당 주장에 대한) 사후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마골리스)



이성은 정념의 노예다

(데이비드 흄)


논쟁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어느 쪽도 추론을 통해서 자신의 신조를 끌어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정(情)에 호소하지 않는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이 더 올바른 원칙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데이비드 흄)


성교를 하는 진화론적 동기는 명백하다. 아이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동기는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아이에 대한 욕망이 끼어들지 않는다. 다른 종들도 마찬가지다. 교미를 할 때 쥐들에게 더 많은 쥐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친절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친절하다. 다른 이들에게 친절했던 조상들이 그렇지 않았던 조상들보다 더 오래 살고 번식도 더 많이 했기 때문이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사람들이 음식을 먹거나 성관계를 가질 때보다 타인을 도울 때 생존과 번식을 더 많이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진화는 우리 안에 특정인의 운명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불어넣고, 타인을 가엽게 여기고 배려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타적 인간이 되게 했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실제로는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이타주의자를 할퀴어 상처를 내라. 그러면 위선자의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마이클 기셀린)


독일 병사들을 살해한 그 남자들은 사디스트도 사이코패스도 아니었다. 그들은 강한 도덕 감정에 자극을 받았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여기서 명심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객관적인 의미에서 선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동기’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애덤스의 말은 악이 선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악이 저질러진다는 뜻이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세상에는 도덕이 지나치게 많다. 자력구제를 통한 정의를 추구한답시고 저지른 모든 살인과 종교 전쟁과 혁명 전쟁의 사망자, 피해자 없는 범죄와 일탈 행위 때문에 처형된 사람, 이데올로기적 집단 살해의 피해자를 다 더하면, 틀림없이 도덕과 관계없는 포식과 정복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을 것이다.

(핑커 <Better Angels>)


두 사람이 동일한 테마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과정에서 A가 B의 생각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의 본성상 A는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내기 위해 우선 자기 생각을 점검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전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항상 자신이 옳아야 한다는 생각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존재이다.

(쇼펜하우어 <토론의 법칙>)


고착ANCHORING: 폭풍우 몰아치는 혼돈의 바다에서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공인되고 믿음직하며 침대 속처럼 편안하다는 느낌에 도취되도록 만드는 ‘진리들’, 즉 신, 도덕, 자연법, 국가, 가족에 고착하기로 공모한다.

(페테르 베셀 삽페의 방어기제, 토머스 리고티 <인간종의 음모> 중에서)


비인간 종의 멸종에 관하여 우려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멸종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그 삶이 중단되는 개별 동물들에 관하여 우려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멸종을 우려할 가장 강한 이유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한데도 말이다. 동물 멸종에 관한 대중적인 우려는 보통 인간들에 대한 우려이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삶의 부담이 더 클수록, 친구와 가족의 이익이 존재를 중지하는 자살의 이익을 복멸시키기에 충분한 도덕적 비중을 가질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가족 성원에게 극도의 고통과 수모(degradation)의 조건 하에서도 계속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 사람의 품위를 존중하지 못하는(indecent) 일일 것이다. 그러한 여건에서는, 설사 그녀가 계속 살아 있다고 해도, 그들에 대한 그녀의 의무 중 많은 것 또는 대부

분을 이행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비록 그들은 그녀가 죽으면 그녀의 존재를 그리워 할 테지만, 그녀의 삶의 조건은 그녀에게 지속된 존재를 요구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이 된다. 그러한 여건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끝내는 것이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계속 살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기적인 일이다.

(데이비드 베나타 <인간의 곤경>)


학문의 규범은 학문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유혈을 부르는 성취 능력이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내가 여기에서 비합리적인(도구적 합리성) 것이라고 의도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전체 사회의 목적을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존을 영위시켜 주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것으로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갖고 있는 사회의 설치를 통해서 전체 사회의 고유한 목적에 반대되는 것인 전체 사회 자체에 고유한 존재 이유와 전체 사회에 고유한 합리성을 대립시키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대립관계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비합리적인 것을 일단 보게 되면, 이른바 비합리적인 제도들 스스로 어떤 기능을 갖게 됩니다. […]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설치가 갖고 있는 비합리성이 수많은 모멘트들에서 ―내가 여기에서 의도하는 모멘트들은 시간적인 것들이 아니고, 수많은 관점에서 보이는 모멘트들입니다― 통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왜 범죄 피해자를 괴롭히는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실험을 소개하겠습니다. 1966년 미국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Lerner, 1929~)는 72명의 여성들을 모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별 이유도 없이 잔인하게 전기 고문을 받는 한 여성을 각각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한 그룹에는 고문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줬고, 다른 그룹에는 주지 않았죠. 시간이 흐른 후 러너 박사는 두 그룹에 각각 고문받던 여성에 대한 인상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선택권이 없었던 그룹의 사람들이 고문받던 여성의 외모나 성격을 훨씬 나쁘게 기억했다고 합니다. 즉, 피해자를 비난한 겁니다.

(https://m.sedaily.com/NewsViewAmp/1Z2NOXN58Y)


유학자들은 하늘과 땅이 ‘의도를 가지고故’ 인간을 낳았다고 하지만, 이 말은 허황된 것이다. 대체로 하늘과 땅이 기를 합할 때, 인간은 ‘우발적으로偶’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왕충 <논형>)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앎을 추구하려는 자는 더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장자 <양생주>)


미디어의 보도 방식은 또한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강화시켰다. 많은 뉴스가 테러리스트들의 배경, 종교, 문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청자들은 특정 집단 전체를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슬로빅이 말하는 ‘집단 휴리스틱’의 예다

(이동현 <폴 슬로빅의 심리학 위험지각이론 톺아보기>)


시스템 정당화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합의(즉, 현상 유지)를 방어하고 강화하며 정당화하려는 동기를 부여받습니다(상황적 및 성향적 요인에 따라 정도가 달라집니다). 시스템 정당화 동기는 다양한 방식(예: 고정관념, 이념, 귀속 측면)으로 나타나며, 암묵적(즉, 무의식적)으로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발생하고, 인식론적, 실존적, 관계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이론화됩니다.

(https://psycnet.apa.org/record/2011-21802-017)


따라서 광인이 광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광인이 질병으로 인해 정상상태의 가장자리 쪽으로 옮겨 졌기 때문이 아니라― 광인이 우리(유럽)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교사들은 학생들을 평가하면서 뛰어난 학생/성실한 학생, 우아한 행동/거친 행동과 같은 형용사를 동원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수식어에는 이미 귀족적 가치와 소부르주아 가치관이 대립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빈민층이나 노동자들의 세계관은 배제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학습 능력을 평가하는 교사들의 기준들이 대부분 효율성이나 합리성에 근거하며, 이것이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효율성이나 합리성의 이념을 은연중에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성민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취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혐오감,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한 공포감 또는 본능적인 짜증에 의해 촉발되는 불쾌감이다. ”취미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마라“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모든 취향이 자연(본성)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각 취향이 스스로를 자연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말 거의 그렇기 때문에 취향은 아비투스가 된다. 그리하여 다른 취향을 비자연적이며 따라서 타락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거부하게 된다. 미적 불관용은 가공할 만한 폭력성을 갖고 있다. 다른 생활양식에 대한 혐오감은 각 계급을 갈라놓고 있는 가장 강력한 장벽이라고 할 수 있다. 계급내의 동족결혼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대중은 탄원자보다는 지배자를 사랑하고, 자유를 부여받기보다는 어떤 적대자도 용서하지 않는 교리 쪽에 훨씬 더 만족을 느낀다. 대중은 수시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쉽사리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대중은 잘못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에 대한 정신적 폭행의 파렴치함도, 자기들의 인간적 자유에 대한 악랄한 억압도 깨닫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성향의 사람은 관대하고 동정심이 있다. 순수함을 추구하는 성향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성 요한 클리마쿠스)


자기기만은 내가 나를 속이는 거죠. 말은 헷갈리게 들리지만, 이런 겁니다. 우리 안에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이 있다면, 의식적인 마음이 모르도록 현실을 애써 담아두려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진실된 정보는 무의식적 마음에 저장되고 거짓이 의식적인 마음에 저장되죠. 같은 사건을 접해도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보를 선택해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는 타인을 기만하는 데도 들통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하고요. 이 주제에 대해 책을 쓰기까지 저는 40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로버트 트리버스 https://www.khan.co.kr/article/201506152131255/amp)


(자기의) 행동을 유발하는 모듈과 (타인들에게) 도덕적인 규칙에 동의하라고 촉구하는 모듈은 서로 다르다. 비난과 양심이 제각기 다른 모듈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종종 상충된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이런 것을 모두 규합해 보면 인간 마음의 모듈 설계가 위선을 보장한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로버트 커즈번)


법적으로 관련이 없는 상황적 결정 요인(이 경우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유사한 법적 특성을 가진 사건에서 판사가 다르게 판결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법이 불확실하다는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https://www.pnas.org/doi/10.1073/pnas.1018033108)


인간의 뇌는 범법자나 배신자 등 누가 봐도 비난받아 마땅한 대상을 찾아 벌하는 데 쾌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져 있다. 타인에게 ‘정의의 철퇴’를 가하면 뇌의 쾌락중추가 자극을 받아 쾌락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 쾌락에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며, 항상 벌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타인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상태를 정의에 취해버린 중독 상태, 이른바 ‘정의 중독’이라 부른다. 인지 구조가 의존증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카노 노부코 <정의 중독>)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고 당위를 주장하는 사람의 삶이 도덕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은, 개인적인 불완전함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오류는 관심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공공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즐기고 그들을 낙인찍고 배제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낀다.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도덕성이란 우리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고자告子는 ‘성무선무불선론性無善無不善論’을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本性이란 선善도 아니고 불선不善도 아니라는 얘기다. 즉,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모두 정신적 판단에서 나오는 상대적인 가치이므로,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하고 논쟁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견해이다. 그는 ‘식색성야食色性也’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오직 식욕과 성욕이라는 것이다. 정신적 윤리나 도덕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마광수 <마광수의 뇌구조>)


사드는 극단적인 형태로 욕망이 윤리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칸트 윤리학의 숨은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덕의 위기에 대응하려는 칸트의 시도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는 것이다. 라캉의 말대로 사드는 칸트 윤리의 '장애물' 또는 '실패'로 나타난다.(79)정신분석은 욕망의 윤리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면서도 사드라는 도착(perversion)의 함정을 피하는 길을 모색한다.

(김용수 <자크 라캉>)


약자의 화폐위조, 자기기만의 목적은 약자인 자신이 선하다고 말함으로써 강자인 타자를 악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하지만 그러므로 충고하건데 친구들이여, 남을 벌하려는 충동이 강한 자들 모두를 경계하라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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