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송과 왕충

by 김명준

난 브레송을 초월, 구원, 은총 같은 테마들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내가 불가지론자인 건 둘째치고 브레송의 스타일 자체가 나무처럼 구원이라는 하나의 뿌리를 중심으로 가기엔 너무나도 리좀적이다. 브레송은 영화감독이지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배우가 아닌 모델을 쓰고 연극요소들을 모조리 배제하며 파편적 이미지들을 연결한 시네마토그래피를 추구한다. 신학적, 종교적으로 해석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단일한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그의 유작인 <돈(1983)>만 보더라도 위조지폐 하나 때문에 수많은 인과관계들이 서로 마주쳐 결국 한 인간의 삶이 파괴되는 비극을 그릴뿐 여기서 영적인 초월을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이건 가톨릭보다는 고대 중국 철학자 왕충과 더 가깝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람은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요한복음 3:8

영화 <사형수 탈출하다> 초반에 이런 자막이 나온다.

비록 이것이 성경에서 인용한 구절이기는 하나 나는 이것이 영적 구원을 암시하기보다는 통제 불가능한 우발성을 가리킨다고 봤다. 구절의 내용처럼 바람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부는 게 아니라 그냥 불고 싶은 대로, 임의적으로 분다. 바람은 시원할 수도 차가울 수도 있다. 그것은 여름에 부냐, 겨울에 부냐에 따라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퐁텐느의 탈옥 역시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그것은 퐁텐느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성공 여부는 오로지 경비병과 마주쳤느냐 안 마주쳤느냐에 달려있다. 퐁텐느가 조스트랑 만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퐁텐느가 밧줄을 꼬고 숟가락을 긁는 건 그러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하는 생존을 위한 필연적 노동이다.(왕충의 관점에서는 고) 조스트가 감옥에 잡혀온 것 역시 하나의 인과관계다. 그러나 둘이 마주치게 된 것은 왕충의 관점에서 우다. 그리고 퐁텐느는 내적 갈등 끝에 우를 받아들인다. 그는 조스트도 본인처럼 억울하게 감옥에 끌려왔고 불행은 누구에게나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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