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론적 논증에 대해서
모든 것에 인과가 있으면 무한퇴행에 빠지니 제1원인이 있어야하고 그게 신이 있다는 증거라는 말은 전혀 공감이 안된다. 그럼 그 신은 어떻게 생겨났지라는 질문이 또 생길 수 밖에 없다.(특별 변론의 오류) 원인 없는 존재가 있다면 우주 역시 원인 없이 그냥 존재할수 있으며 그게 더 간명하다.(오컴의 면도날)
신은 원인없이 존재하기에 자유롭다는 말도 공감이 안간다. 흄이 말했듯, 자유의지는 원인의 부재가 아닌 구속의 부재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양립가능하다.
“독립은 타인과 공동체의 문화가 미치는 영향이나 설득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진공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좋은 삶은 공동체라는 여건과 분리될 수 없다. 공동체의 여건은 우리 삶의 가능성의 구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삶을 둘러싼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우리는 그 환경 안에서 살아간다. 자유주의는 인간이 이런 영향으로부터 탈출한 존재라거나, 탈출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단지, 타인들의 지배에 저항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이민열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민열(이한) 교수의 이 텍스트는 자유라는게 진공 상태를 뜻하는게 아니라 맥락 안에서 작동한다는걸 보여준다.
만약 신이 우주, 시공간이라는 맥락 밖에 존재한다면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자유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간의 산물에 불과하다.
전능도 마찬가지다.
능력이라는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을 뜻하는데 그 힘이라는거 자체가 이미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한다.
시간의 흐름이 없으면 당연히 힘도 변화도 작용도 해내야 할 일도 없다.
그리고 인간은 제한된 인식 내에서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추론할 수 있다. 우주 내 입자들 사이의 인과관계들을 봤다고 해서(흄에 따르면 그 인과율이라는 것도 논리적 필연성이 아닌 심리적 습관일 수 있다) 우주 전체에도 인과 법칙이 있을거라는 기대는 구성의 오류다. 그리고 가장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은 그 제1원인이 왜 하필이면 인간 형태를 띤 종교적 신이냐는거다.(아리스토텔레스 부동의 원동자처럼 인격신이 아닌 그냥 어떤 에너지일 수 있다.) 거기엔 인간이 특별한 무언가일거라는 전제조건이 있으며 흄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단순 관념들을 재조합해 만든 복합관념에 불과하다.(크세노파네스가 말했듯 소가 신을 그렸다면 소 형태의 신을 그렸을거다) 백번 양보해서 인격신이 있다고 쳐도 인격신이 존재한다(is)에서 그러니 인격신을숭배해야 한다(ought)라는 당위를 도출할 순 없다. 또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설계 논증에서 귀납적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귀납 좋아하면 공룡도 멸종하고 지구 역사상 존재했던 종들 거의 다 멸종했으니 인간도 언젠가 당연히 멸종해야 하는거 아닌가? 신은 인간에 대해 무관심할 수도 있다(에피쿠로스).
도덕적 논증에 대해서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가 신의 존재 증거라는 논증은 전혀 공감이 안된다. 도덕이 왜 꼭 신의 증거여야 하는가? 인간의 발명품일수는 없는가?
“성교를 하는 진화론적 동기는 명백하다. 아이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동기는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아이에 대한 욕망이 끼어들지 않는다. 다른 종들도 마찬가지다. 교미를 할 때 쥐들에게 더 많은 쥐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친절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친절하다. 다른 이들에게 친절했던 조상들이 그렇지 않았던 조상들보다 더 오래 살고 번식도 더 많이 했기 때문이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따라서 광인이 광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광인이 질병으로 인해 정상상태의 가장자리 쪽으로 옮겨 졌기 때문이 아니라― 광인이 우리(유럽)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경건한 것은 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 아니면 경건하기 때문에 신이 사랑하는 것인가?”
(만약 첫번째라면 경건의 기준은 자의적이다. 두번째라면 신이 ‘이미 존재하는 경건’을 사랑한다는건데 그럼 신은 경건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에우티프론 딜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