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병치
- 흄의 입장에서 본 칸트와 사드
- 장자와 삽페
- 베른하르트와 벨라 타르
- 브레송과 왕충
- 왕충과 부르디외
- Ai로 대체 가능한 철학 vs 대체 불가능한 철학
2. 종합
-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 쾌락의 불평등
- 내가 신 안 믿는 이유
- 의사, 변호사 - 아우라의 몰락
- 학력자본 vs ai
- 정신과 의사와 ai
- 나는 문화적 기독교/불교인이다
- universitas
- 창작은 수능보다 위대하다
3. 시
- 문학읽기
- 만성통증
- 죽음
- 소꿉놀이
- 식물의 삶
- 영화는 기묘하다
4. 아카이브
- 도덕의 자기기만
- 성공이라는 허상
- 행복은 사기다
- 형이상학 비판
1. 병치
제목: 흄의 입장에서 본 칸트와 사드
흄의 입장에서 보면 칸트는 공감 없이 이성적 추론으로만 당위를 도출하고(존경심이라는 개념은 있으나 여전히 이성이 우위) 인위적 덕이 자연적 덕에 기초하여 발생한다는 점을 간과해서 문제다.
조너선 하이트 등의 현대 심리학자들은 이성이 정념의노예라는 흄의 견해를 지지하며 칸트는 물자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구축했으나 흄의 입장에서 이건 불에 태워버려야할 궤변에 불과하다.
반면, 사드는 공감도 유용성도 없이 경험적 사실(성욕은 본능이다)에서 도덕적(?) 당위(성욕을 추구해야 한다)를 도출해서 문제인거 같다.
흄에게 이성은 반성에 토대를 두고서 정념들이 차분한 결정을 하도록 교정하는 수단적 역할이지만(양선이, 2014, 흄의 도덕감정론에 나타난 ‘반성’ 개념의 역할과 도덕감정의 합리성 문제 pp. 55-87)
사드에게선 반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자신의 왜곡된 직접정념을 합리화하는데에만 집중하는거 같다.
라캉은 주이상스로 칸트-사드 엮었지만 난 흄의 입장에서 본성에 대한 오해라는 키워드로 엮어도 재밌을거 같다.
제목: 장자와 삽페 - 의식의 고통
기존의 합리주의 전통 철학자들은 의식이 있기에 인간이 특별하고 의식, 숙고(의식의 고도화)가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그 의식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만성통증을 앓고 있는 나는 사유, 의식보다 몸의 고통이 먼저 나의 존재를 증명시키며 자폐 스펙트럼, ADHD, 우울증, 불안장애는 그 고통을 더욱 악화시킨다.
몸의 고통은 언어를 파괴하고 나라는 세계를 파괴한다.(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그렇게 파괴된 세계에서 의식은 해결책은 커녕 오히려 고통을 유발하는 장치가 되며 그 의식의 고통은 다시 몸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서로가 서로를 좀먹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큰 공감이 되었던 고대 중국 철학자 장자, 그리고 20세기 노르웨이 철학자 페테르 베셀 삽페는 의식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해냈다.
이 둘은 시대도, 문화도, 분위기도 다 다르지만 의식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전복시킨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삽페에게 의식이란 과잉진화(마치 뿔이 과대하게 자란 큰뿔사슴처럼)의 산물이고 멈출 수 없는 비극이다.
“생명의 통일성에 난 구멍, 생물학적 역설, 가증스러운 것, 부조리, 끔찍한 본성에 대한 과장. 생명은 목표보다 한참 더 나아간 나머지, 자기 자신마저 산산조각 냈다. 종은 외견상 전능한 정신으로 지나치게 중무장했지만, 그만큼 스스로의 안녕well-being에 위협이 된다.“
-페테르 베셀 삽페 <마지막 메시아(1933)> 중 일부(토머스 리고티의 책 <인간종의 음모(이동현 옮김)>에서 발췌)-
짐승과는 다르게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걸, 우주에서 먼지만한 존재라는걸 ‘의식’함으로써 고통 받는다.
영화 <군중(1928, 킹 비더)>에서 주인공이 압도적인 숫자의 군중들 앞에서 절규하는 장면, 그리고 세계인구 80억명이 되어버린 2020년대를 살아가는 나라는 무력한 존재,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들이 고통이라는 감각을 공유하는 지구라는 행성과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 이 모든걸 지각할 수 있게 된 의식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체는 감옥보다 좁은데 의식은 우주보다 무한해졌다.
더 이상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의식하는건 불가능해졌다.
생존을 위해 진화해온 의식이 곧 생존을 의심할 수도 있도록 진화되어버린것이다.
삽페는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정직한 윤리주의자였다.
그가 말하는 의식의 고통이란 나 자신의 고통 뿐만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의식하는 고통 역시 포함되어 있다.
“Then woman awoke, too, and said that it was time to go out and kill something. And man took up his bow, fruit of the union between the soul and the hand, and went out under the stars. But when the animals came to their water-hole, where he out of habit waited for them, he no longer knew the spring of the tiger in his blood, but a great psalm to the brotherhood of suffering shared by all that lives.”
-페테르 베셀 삽페 <마지막 메시아(1933)> 영문(Open Air Philosophy 사이트에서 발췌)-
사냥할 시간이 다가왔으나 물웅덩이에 모여든 동물들을 보고 더 이상 호랑이(포식자)의 솟아오르는 기운이 아닌, 오히려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공유하는 고통이라는 감각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는 내용이 맨처음에 나온다.
그가 말하는 고통의 의식은 타자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밖에 없는 능력,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을 모든 생명체로 확장해 너무나도 뼈저리게 인식한 결과다.
결국 변호사 출신인 삽페는 세상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진단을 내린다.
기존의 변호사 출신 철학자들인 벤담이나 베카리아는 계몽주의 한복판에 서서 개혁을 외치는데에 집중했지만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해본 삽페에게 개혁 같은건 없으며 최선의 윤리는 번식을 중단함으로써 고통의 재생산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멸종하는 것이다.(반출생주의)
그리고 이는 단순한 냉담함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큰 우주적 공감피로로부터 도출된 결론이다.
“동전은 심사숙고 후에야 거지에게 주어지지만, 아이는 고민 없이 잔혹한 우주에 내던져진다”
-페테르 베셀 삽페(https://youtu.be/u4m6vvaY-Wo?si=T_58-uF0AUWNPyIw 32분 30초부터)-
분쟁, 빈부격차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 장자는 의식이 쓸데없는 구별잣기(성심)를 하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된다고 봤다.
(성심이 긍정적인 의미(도와 합일하는 마음)로 쓰인건지 부정적인 의미(분별하는 마음, 작게 이루어진 마음)로 쓰인건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으나 <이종성, 2003, 장자 철학에서의 ‘성심’에 대한 성찰, pp.1-26>에 따르면 결국엔 부정적인 의미 쪽이 더 우세하다고 한다.)
의식이 우리에게 “이건 ‘나’고 이건 ‘나비’다.” 라고 선을 긋도록 만듬으로써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인위적으로 분별하려는 시비지심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는 ‘가정에서의 나’, ‘직장에서의 나’, ‘SNS에서의 나’ 등등 우리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분별을 한다.
그리고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정상성 담론은 장자가 비판한 성심이 어떻게 권력에 의해 제도화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심오한 틀이 된다.
푸코에 따르면,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시대 이후로 사회는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을 임의적으로 분별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문명(이성)이 스스로를 문명이라 정의하기 위해선 광기(비이성)라는 타자를 발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자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명백히 도와의 합일을 방해하는 성심이 발현된 어리석은 짓이지만 사회는 일부러 의식(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음으로써 이 성심을 유도했다.
와이즈먼 감독의 충격적 데뷔작인 티티컷 풍자극(1967) 같은 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메사추세츠 같은 학업능력(MIT 등)이 좋고 잘 사는 주조차 아니, 어쩌면 잘 사는 주였기 때문에 정신장애인이나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인권이 매우 좋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비정상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비정상이라고 여기고 나는 정상적이어야만 한다는 정상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비정상인 나’와 ‘정상이고 싶은 나’를 분별하지만 그 사이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고 더 큰 고통을 유발한다.
삽페가 말한 의식의 과잉은 진화적 측면에서, 장자가 말한 성심은 사회적 측면에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
다른 철학자들이 “고통을 어떻게 의식해야하는가?”를 묻는다면 장자와 삽페는 “의식하는거 자체가 고통이 될 수 있다.” 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 의식이 고통이 되는 메커니즘엔 ‘분열’이 있다.
삽페에게 이 분열은 의미를 갈망하는 유기체와 무의미한 우주 사이의 근본적인 균열이다.
반면, 장자에게 이 분열은 성심이 실재에 가하는 인위적인 구획이다.
삽페는 ‘생명의 통일성’(삽페의 표현대로라면), 장자는 ‘도와의 합일’이 의식에 의해 분열될때 고통을 낳는다.
의식이 고통이라는 비극적 부산물을 낳을 수 있다는건 심리학적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조성연, & 조한익, (2021), 대학생의 반추 하위유형인 자책 및 숙고, 긍정․부정 과거지향 사고 그리고 우울의 관계, pp. 449-478> 한양대 연구논문에 따르면 반추는 자책(침습적 사고)과 숙고(분석적 사고)라는 두 하위유형으로 나뉘는데 자책이 낮고 숙고만 높다면 우울 수준은 낮지만 자책이 높은데 숙고까지 같이 높아버리면 우울 수준도 제일 높아져버린다.
숙고가 해결책이 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자책을 더욱 깊게 파고들어 우울을 증폭시키는 고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숙고뿐만 아니라 우울증과 강하고 일관되게 연결되는 자책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자책이란 자신의 현재 상황을 달성하지 못한 어떤 기준과 비교할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장자의 성심이나 아까 전 삽페가 말한 지각의 비극과 유사하다.
“인간은 친숙한 세계 속에서 강인하지만, 삶의 품속에서 누릴 영적 조화, 순수, 내면의 평화를 내어주고 얻은 대가인 자신의 강인함을 저주한다.”
-페테르 베셀 삽페 <마지막 메시아(1933)> 중 일부(토머스 리고티의 책 <인간종의 음모(이동현 옮김)>에서 발췌)-
인간은 강인한 의식을 얻었지만 그 의식은 오히려 인간 자신의 결핍들(영적 조화, 순수, 내면의 평화)을 더욱 선명하게 보도록 만든다.
심리학적 자책과 삽페의 의식 모두 자신의 결핍을 지각하고 비교함으로써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또한, 뇌 회로인 DMN(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은 내면에 주의 집중 할때 활성화 되는 영역인데 이 영역이 지나치게 활성화 되는 순간 우울과 불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장자와 삽페가 말한 의식의 고통이 왜 일어나는지 그 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물론, 이들이 다루는 고통은 실존적,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심리학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하지만 심리학적 반추, 철학적 반추 둘 다 자기 참조적 의식의 반복적 작동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의식비판’ 이라는 키워드에는 묶이지만 진단에 있어서 차이점 역시 존재한다.
장자는 의식이 현실을 명료하게 보지 못하게 만들때 문제라고 진단하고 삽페는 의식이 현실을 너무 명료하게 보게 만들때 문제라고 진단한다.
이건 심리학계에서 말 많은 우울증적 현실주의(Alloy & Abramson의 가설) vs 우울증의 부정적 인지 왜곡(Aaron Beck) 논쟁과 비슷해 보인다.
<Metacognition and depressive realism: evidence for the level-of-depression account, Nicholas C Soderstrom et al. Cogn Neuropsychiatry. 2011 Sep.> 논문에 따르면 경미한 우울증은 현실적일 수 있으나 임상적 우울증은 부정적 인지 왜곡이 있다고 한다.
장자의 진단은 이 임상적 우울증에 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장자가 말하는 현실(도, 자연)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심리학에서 말하는 현실과 내용물이 다를 수 있으나 그 현실을 대하는 의식의 왜곡 방식(메커니즘)은 유사하다.)
삽페가 말한 고통은 우울증 여부와는 상관없지만 낙관편향이 사라졌을때 오는 불안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한, 장자의 성심은 예측 부호화 이론과도 접점이 있다.
예측 부호화 이론이란 뇌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내부적으로 생성한 세계 모델을 바탕으로 감각 정보를 끊임없이 예측하며, 실제 감각 입력과 예측 사이의 차이인 예측 오차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이론이다.
<이종성, 2003, 장자 철학에서의 ‘성심’에 대한 성찰, pp.5> 논문에 따르면 장자의 성심은 공간과, 시간과, 교육에 의해 구속되는데 이는 곧 예측을 고착화시켜 유동적인 실제 감각 입력(장자가 말하는 도(道), 자연)과 차이가 벌어지고 “나는 이런 사람이고 재는 저런 사람이다“, “나는 무조건 실패할거다”, “나는 비정상이다.”라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예측을 하게 되는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삽페가 말하는 지각의 비극은 오히려 이 예측 오차가 너무 최소화된 상태다.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와 의식의 고통이라는 세계모델이 미래에도 절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예측을 만들며, 실제 감각 입력(실제로도 이 의식을 없애는건 불가능)은 이 세계모델을 끊임없이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의식에 대한 비판 역시 의식을 통한 비판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식 역설이다.
의식을 넘어서기 위해선 먼저 의식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장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뒤 좌망(잠시 앉아서 모든 분별을 잊는다), 심재(마음을 비우다) 를 통해 진인이 되어 그 사다리를 걷어찰 수 있다고 말한다.
분별적 사유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무상 삼매와도 접점이 있다.
또한, 장자의 진단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론과도 유사하다.
소크라테스의 회의는 절대적 진리가 있을거라는 전제 위에서 그 진리를 찾기 위한 회의였지만 피론의 회의는 그 절대적 진리라는걸 찾으려는 의식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한다.
피론은 판단중지(에포케)를 통해 아타락시아에 도달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장자의 성심을 해체하는데에도 유용한 방법일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삽페는 그 사다리가 끝이 없으며 걷어찰 수 없다는 비극 그 자체를 말한다.
그에게 의식이란 오용(인식론적)이 아니라 오류(존재론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자와 삽페는 서로 정반대의 세계관(인간 의식은 자연의 일부로 회복될 수 있는 것 vs 인간의식 자체가 자연이 낳은 오류)을 전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즉, 의식이야말로 인간 고통의 핵심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삽페는 인간들이 이 고통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해 네 가지 방어기제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1. 고립(불안한 생각들을 회피)
2. 고정(가족, 자본 등 사회적으로 가치있어 보이는 것들에 기댐, 사회문화적으로 구속된 집단적 성심 역시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3. 주의전환(오락 등)
4. 승화(예술, 문학, 철학, 빅터 프랭클의 창조적 가치 등)
삽페는 네번째 방어기제를 택했으며, 내가 이 에세이를 쓰는것 역시 (삽페의 관점에서)네 번째 방어기제인 승화에 해당한다.
삽페는 이 모든걸 해결책이 아닌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폄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쓰기를 통해 의식의 고통을 잠시나마 내려놓는다.
이야기 치료에서는 ‘나’와 ‘문제’를 분리하는걸 ‘문제의 외재화‘라고 부르는데 글쓰기 역시 ‘고통에 압도당하는 나’에서 벗어나 고통을 텍스트라는 하나의 대상으로 옮김으로써 ’나‘와 ‘고통’을 분리하는 외재화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현대의 심리치료법 중 하나인 ACT(수용전념치료) 치료는 장자의 초월적인 해결책, 삽페의 불완전한 방어기제를 넘어선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ACT란 의식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관찰자의 입장으로서 의식을 수용하는 치료다.
불안하거나 우울한 생각이 들어도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내 머릿속에 ~~한 생각이 있구나“ 라고 바라보는 것이다.
장자의 해결책이 초월적이고 해방적인 분위기라면 ACT는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분위기다.
장자와 삽페 그리고 ACT까지 의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깊다.
추가)참고로 글쓴이는 삽페의 말에 더 공감하며 진정한 윤리는 아이를 낳지 않는것이라 생각한다.
장자(초월)나 ACT(관리)는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든 닦으려는 시도지만 삽페는 처음부터 엎지르지 않았다면 닦을 일도 없었다는걸 지적해준다.
의지를 오류로 본 쇼펜하우어나 존재 자체를 오류로 본 에밀 시오랑 등등 모두 삽페의 견해와 유사하며 반출생주의로 귀결된다.
(참고로 이 글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도덕의 끝인 칸트와 욕망의 끝인 사드 후작을 병치함으로써 보편적 원칙주의라는 동일한 메커니즘을 발견해낸 방법론에서 영감 받았다.)
제목: 베른하르트와 벨라 타르
“뇌 전문의사들이 내게 처방해준 수천, 수십만 개의 약 덕분에, 이 수백, 수천 가지 약 처방 덕분에 나는 살아가고 있다!… 나는 주사 기구를 언제나 주머니에 가지고 있다. 아니다, 나는 이제 산림학자가 아니다, 나는 이제 연구자가 아니다, 나는 이제는 도무지 연구자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스물다섯 살 나이에 나는 병든 인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모자를 쓸 권리가 없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김현성 옮김)> p.31-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장광설 문체는 역설적으로 침묵의 효과를 낳는다. 언어로 담는데에 실패하는걸 계속 보여줌으로써 언어 너머의 침묵을 보여준다.
그에겐 형식이 곧 내용이고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했던거처럼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에 더 집중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언어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한다는 역설을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을때 사다리를 걷어차야한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언어의 사다리가 아닌 언어의 미끄럼틀을 택한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려는 시도는 계속 실패하고 미끄러지지만 바로 그 올라감과 미끄러짐의 반복이 언어의 과잉과 언어의 한계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벨라 타르의 롱테이크 역시 형식이 곧 내용이 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베르그송이 시간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지속을 말했다면, 벨라 타르는 거의 질식할듯한 롱테이크로 시간의 무의미하고 피로한 지속을 말없이 직접 체감하게 해준다.(특히 <파멸(1988)> 이후 영화들) 베르그송은 흐름을 말했지만 이건 흐름이 아니다. 흐름이라는건 여전히 어떠한 유동성과 자유와 긍정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건 오히려 정체에 가깝다. 고통의 정체 속에서 시간만 지속되는거에 가깝다. 그리고 이 정체 개념은 베른하르트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베른하르트의 문체 역시 의식의 흐름이라기 보다는 의식의 정체에 가깝다.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의식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같은 생각을 곱씹고, 또 곱씹고, 계속 곱씹는 반추를 한다. 또한, 타르의 흑백촬영은 색채라는 해석을 거부한다. 색채를 비움으로써 날것의 진실을 드러낸다.
베른하르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너무 많이 말함으로써(반-비트겐슈타인) 오히려 침묵에 도달하고(비트겐슈타인) 벨라 타르는 편집이라는 시간의 공간화를 거부(베르그송) 함으로써 오히려 시간의 공허(반-베르그송)에 도달한다.
아도르노가 서정시를 거부한거처럼, 하이네가 척추결핵 이후 낭만주의를 비판한거처럼 그들은 고통의 미화를 거부한다.
베른하르트에게 해피엔딩 같은건 있을 수 없다.
벨라 타르 역시 타르코프스키식 희망을 거부한다.
베른하르트는 냉소 뒤에 우스꽝스러움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지만 벨라 타르는 그마저도 거부한다.
그리고 나는 만성통증, 우울증, 불안장애, 적응장애가 있는 사람으로서 이 예술가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일레인 스캐리가 말했듯 몸의 고통은 언어를 파괴하고 ‘나’라는 세계를 파괴한다.
베른하르트는 언어의 실패를 통해 그 언어가 얼마나 표현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됐는지 보여준다.
타르는 파괴 이후 절망만 남은 폐허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파괴된 폐허 속에서도 시간은 맹목적으로 지속된다.
시간은 의식에 대한 형벌이다.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시간의 리듬에 맞출 수 없으므로 시간에 매달리거나 관조하지만, 나는 결코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김정숙 옮김)>에서 발췌-
제목: 브레송과 왕충
난 브레송을 초월, 구원, 은총 같은 테마들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내가 불가지론자인 건 둘째치고 브레송의 스타일 자체가 나무처럼 구원이라는 하나의 뿌리를 중심으로 가기엔 너무나도 리좀적이다. 브레송은 영화감독이지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배우가 아닌 모델을 쓰고 연극요소들을 모조리 배제하며 파편적 이미지들을 연결한 시네마토그래피를 추구한다. 신학적, 종교적으로 해석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단일한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그의 유작인 <돈(1983)>만 보더라도 위조지폐 하나 때문에 수많은 인과관계들이 서로 마주쳐 결국 한 인간의 삶이 파괴되는 비극을 그릴뿐 여기서 영적인 초월을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이건 가톨릭보다는 고대 중국 철학자 왕충과 더 가깝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람은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요한복음 3:8
영화 <사형수 탈출하다> 초반에 이런 자막이 나온다.
비록 이것이 성경에서 인용한 구절이기는 하나 나는 이것이 영적 구원을 암시하기보다는 통제 불가능한 우발성을 가리킨다고 봤다. 구절의 내용처럼 바람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부는 게 아니라 그냥 불고 싶은 대로, 임의적으로 분다. 바람은 시원할 수도 차가울 수도 있다. 그것은 여름에 부냐, 겨울에 부냐에 따라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퐁텐느의 탈옥 역시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그것은 퐁텐느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성공 여부는 오로지 경비병과 마주쳤느냐 안 마주쳤느냐에 달려있다. 퐁텐느가 조스트랑 만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퐁텐느가 밧줄을 꼬고 숟가락을 긁는 건 그러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하는 생존을 위한 필연적 노동이다.(왕충의 관점에서는 고) 조스트가 감옥에 잡혀온 것 역시 하나의 인과관계다. 그러나 둘이 마주치게 된 것은 왕충의 관점에서 우다. 그리고 퐁텐느는 내적 갈등 끝에 우를 받아들인다. 그는 조스트도 본인처럼 억울하게 감옥에 끌려왔고 불행은 누구에게나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제목: 왕충과 부르디외
사람들은 문화자본을 능력, 고(故)의 산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비투스(habitus)가 장(field)과 우(偶)연히 마주친(幸)것에 불과하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아비투스는 상속된 계급적 세계관에 따라 결정되고 내면화된다. 즉, 왕충의 표현을 빌리면 명(命)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아비투스는 곧 어떤 문화자본을 휙득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토대가 된다.
예를 들어서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같은 미술작품은 일반인들에겐 정말 까다로운 그림이다. 학교를 통해 미술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고 어렸을때부터 칸트의 무관심 미학 이론 등을 배우며 자라온 사람들만이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 즉, 문화자본을 얻게된다.
그러나 그 문화자본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주어진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계층 집안의 아이는 어릴때부터 미술관에 가 아비투스를 기르는게 익숙하지만 빈민층 집안의 아이는 미술관에 갈 일이 거의 없으며 문화재화를 위해 희생할 경제자본도 없다.
왕충의 관점에서 보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은 결국 장(field)과의 우연한 마주침이 있어야만 의미있어진다.
예를 들어서 대학학위라는 제도화된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어도 공무원이 되려면 공무원 시험을 따로 봐야된다.
대학 학위가 공무원이라는 장(field)과 만났을때는 큰 효력이 없는 것이다.
제목: ai로 대체 가능한 철학 vs 불가능한 철학
플라톤: 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만 ai로 3줄 요약 언제든지 가능.
디오게네스: 견유학파의 파르헤지아 정신은 아무도 흉내 못냄. Ai가 알렉산더 비켜라~ 라고 해도 그건 그냥 누가 프롬프트를 그렇게 하도록 설계해서 그런거지 진정성은 없음. 말하는 주체가 위험을 감수할때만 진정한 파르헤지아가 됨.
자크 라캉: 상징, 은유, 개념유희, 이론 중 상당수가 프로이트의 변형 -> ai도 일부 흉내가능. 그러나 거울단계나 창조적 오용(뫼비우스의 띠) 같은건 워낙 독특해서 완전 흉내는 불가능.
상징계(언어, 규칙, 법)는 흉내 가능. 실재계(균열, 과잉, 트라우마)는 흉내 불가능.
프란츠 파농: 폭력의 역사, 식민지배, 인종차별 등 민감하고 윤리적인 문제들이 섞여있음 -> ai로 대체 불가능
하이데거: 개념유희, 윤리적 책임 없음(나치한테 무릎 꿇음) -> ai로 대체 바로 가능.
레비나스: 홀로코스트 상처와 타자와의 대면 속에서 피어나는 충격 -> ai로 대체 불가능.
초기 비트겐슈타인(화이트칼라): 책상에 앉아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철저히 구분, 언어 분석 -> ai로 대체 가능
후기 비트겐슈타인(블루칼라): 교수직 그만두고 시골 내려가서 초등학교 교사, 정원사 하면서 깨달은 언어게임, 삶과 생활의 맥락을 중시 -> ai로 대체 불가능, 철학버전 모라벨의 역설
2. 종합
제목: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법의 목적은 예방이지 벌을 위한 것이 아니며(베카리아) 사형제도로 인한 범죄 억제의 효과가 유의미하다는 근거는 없다.(https://www.humanrights.go.kr/webzine/webzineListAndDetail?issueNo=7602456&boardNo=7602463)
반면, <Rate of false conviction of criminal defendants who are sentenced to death, Samuel R. Gross et al., PNAS, 2014> 에 따르면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인의 약 4.1프로가 무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득은 불확실한데 해악은 비가역적이다.
10명의 죄인을 놓쳐도 한명의 무고한 자를 벌하지 말라는 블랙스톤의 비율이 붕괴된다.
재판결과는 판사의 아침식사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https://www.pnas.org/doi/10.1073/pnas.1018033108)
분노는 사형의 이러한 위험들을 과소평가하고(https://psycnet.apa.org/record/2001-07168-011 ) 세상이 통제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통제가능성에 대한 지나친 환상은 오심으로 인한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멜빈 러너 <공정한 세상 가설>)
또한, 사형제가 부활하는순간 생명은 천부인권, 절대적 가치가 아닌 조건부 가치가 된다.
그럼 대체 그 조건을 누가 정할거냐는 질문이 따라올 수 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흉악범들에게만 해당되는거 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치만 봐도 유대인, 열등한 유전자가 죽여도 되는 생명이 됐었고 아감벤 호모 사케르 같은 개념들 나오고 그랬었다.
사형제도가 정말 범죄예방을 위한 것인지, 벌을 통한 도파민과 쾌감을 위한 것인지(나카노 노부코 <정의 중독>) 생각해보아야할 문제 같다.
제목: 쾌락의 불평등
“내재적 쾌락은 꽤 다대한 비용의 삶의 불운을 대가로 치르고서 얻어진 것이다.”
-데이비드 베나타-
소변 보는 쾌락을 느끼려면 일단 소변 마려운 고통을 느껴야한다.
헤도니아라 불리는 감각적 쾌락은 결핍의 해소, 항상성의 회복을 전제할때 더 강력하다.(배고플수록 더 맛있어진다)
노르웨이의 심리학자 시리 레크네스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예상보다 고통의 강도가 덜해질 때 고통을 실제보다 덜 느끼며 심지어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쾌락과 고통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처음부터 소변이 마렵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배출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쁘지 않다.
배출하는 쾌락을 느끼지 못했다는 박탈감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억지로 배출하려는거야말로 고통이다.
그리고 소변 보는게 무조건 쾌락인지도 의문이다.
나 같이 만성 골반 통증 증후군 있거나 전립선염, 요로결석 등등 무쾌감증이 있는 사람한테 소변은 고통일 뿐이다.
헤도니아(감각적, 순간적 쾌락)가 아닌 유데모니아(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아실현의 행복)로 불리는 예술 감상의 쾌락 역시 조건적이고 불평등하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같은 예술 작품이라도 감상자가 어떤 계급이냐에 따라 취향이 갈린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같은 미술작품은 일반인들에겐 정말 까다로운 그림이다. 학교를 통해 미술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고 어렸을때부터 칸트의 무관심 미학 이론 등을 배우며 자라온 사람들만이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 즉, 문화자본을 얻게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 문화자본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계층 집안의 아이는 어릴때부터 미술관에 가는게 익숙하지만 빈민층 집안의 아이는 미술관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 이후 아우라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예술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말했지만 부르디외는 접근성만 좋아졌을뿐 결국 취향이라는 또 다른 권위가 세워졌다고 폭로한다. “나만 이 예술을 가지고 있다.”는 권위에서 “나만 이 예술을 이렇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는 권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 불평등을 주로 계급의 측면에서 다루었지만 나는 장애학,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도 확장 가능하다고 본다. 나 처럼 자폐나 만성통증, ADHD가 있는 사람에게는 해석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집중자체가 어려울때가 많다.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이 실패하는 것이다. 결국 예술 작품 감상은 문화자본 뿐만 아니라 특정 신체적 조건과 인지적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유데모니아는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연결을 핵심으로 두고 있다.
이 역시 불평등하다. 적응장애나 눈 마주침조차 어려운 자폐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장애인, 저소득층, 난민, 동성애자 등은 사회적 배제의 위험을 겪는다.
사회는 인권, 평등을 좋아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유데모니아를 느낄 자격의 유무를 따진다.
그리고 그 기준은 매우 자의적이다.
시대에 따라 광기가 낭만의 상징일수도 낙인의 대상일수도 있는거처럼 말이다.(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총 다섯가지다.
1. 헤도니아적 쾌락은 고통을 전제로 할때 더 강력하다.
2. 고통이 없는 존재에게 쾌락 결여는 손해가 아니다.
3. 쾌락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4. 어떤 존재에게는 쾌락의 보상조차 없다.
5. 쾌락은 생리학적 구조이며 신체 조건에 좌우된다.
쾌락은 조건적이며 고통과 죽음은 필연적이다. 삶에 있어서 고통이 더 본질적이며 따라서 쾌락 추구보다 고통 최소화를 더 우선으로 생각해야한다. 물론 제일 좋은건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도 이에 동감한다.
제목: 내가 신 안 믿는 이유
우주론적 논증에 대해서
모든 것에 인과가 있으면 무한퇴행에 빠지니 제1원인이 있어야하고 그게 신이 있다는 증거라는 말은 전혀 공감이 안된다. 그럼 그 신은 어떻게 생겨났지라는 질문이 또 생길 수 밖에 없다.(특별 변론의 오류) 원인 없는 존재가 있다면 우주 역시 원인 없이 그냥 존재할수 있으며 그게 더 간명하다.(오컴의 면도날)
신은 원인없이 존재하기에 자유롭다는 말도 공감이 안간다. 흄이 말했듯, 자유의지는 원인의 부재가 아닌 구속의 부재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양립가능하다.
“독립은 타인과 공동체의 문화가 미치는 영향이나 설득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진공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좋은 삶은 공동체라는 여건과 분리될 수 없다. 공동체의 여건은 우리 삶의 가능성의 구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삶을 둘러싼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우리는 그 환경 안에서 살아간다. 자유주의는 인간이 이런 영향으로부터 탈출한 존재라거나, 탈출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단지, 타인들의 지배에 저항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이민열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민열(이한) 교수의 이 텍스트는 자유라는게 진공 상태를 뜻하는게 아니라 맥락 안에서 작동한다는걸 보여준다.
만약 신이 우주, 시공간이라는 맥락 밖에 존재한다면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자유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간의 산물에 불과하다.
전능도 마찬가지다.
능력이라는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을 뜻하는데 그 힘이라는거 자체가 이미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한다.
시간의 흐름이 없으면 당연히 힘도 변화도 작용도 해내야 할 일도 없다.
그리고 인간은 제한된 인식 내에서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추론할 수 있다. 우주 내 입자들 사이의 인과관계들을 봤다고 해서(흄에 따르면 그 인과율이라는 것도 논리적 필연성이 아닌 심리적 습관일 수 있다) 우주 전체에도 인과 법칙이 있을거라는 기대는 구성의 오류다. 그리고 가장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은 그 제1원인이 왜 하필이면 인간 형태를 띤 종교적 신이냐는거다.(아리스토텔레스 부동의 원동자처럼 인격신이 아닌 그냥 어떤 에너지일 수 있다.) 거기엔 인간이 특별한 무언가일거라는 전제조건이 있으며 흄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단순 관념들을 재조합해 만든 복합관념에 불과하다.(크세노파네스가 말했듯 소가 신을 그렸다면 소 형태의 신을 그렸을거다) 백번 양보해서 인격신이 있다고 쳐도 인격신이 존재한다(is)에서 그러니 인격신을숭배해야 한다(ought)라는 당위를 도출할 순 없다. 또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설계 논증에서 귀납적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귀납 좋아하면 공룡도 멸종하고 지구 역사상 존재했던 종들 거의 다 멸종했으니 인간도 언젠가 당연히 멸종해야 하는거 아닌가? 신은 인간에 대해 무관심할 수도 있다(에피쿠로스).
도덕적 논증에 대해서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가 신의 존재 증거라는 논증은 전혀 공감이 안된다. 도덕이 왜 꼭 신의 증거여야 하는가? 인간의 발명품일수는 없는가?
“성교를 하는 진화론적 동기는 명백하다. 아이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동기는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아이에 대한 욕망이 끼어들지 않는다. 다른 종들도 마찬가지다. 교미를 할 때 쥐들에게 더 많은 쥐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친절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친절하다. 다른 이들에게 친절했던 조상들이 그렇지 않았던 조상들보다 더 오래 살고 번식도 더 많이 했기 때문이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따라서 광인이 광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광인이 질병으로 인해 정상상태의 가장자리 쪽으로 옮겨 졌기 때문이 아니라― 광인이 우리(유럽)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경건한 것은 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 아니면 경건하기 때문에 신이 사랑하는 것인가?”
(만약 첫번째라면 경건의 기준은 자의적이다. 두번째라면 신이 ‘이미 존재하는 경건’을 사랑한다는건데 그럼 신은 경건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에우티프론 딜레마-
제목: 의사, 변호사 - 아우라의 몰락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란?
“벤야민의 두 저작을 통해서 나타나는 ‘아우라’란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즉 유일한 예술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점하면서 갖게 되는 일회적 현존재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아우라’에는 시공간적 의미로써 진품성, 역사성, 전통성과 같은 개념이 공존한다. ”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Article.do?cn=DIKO0011063234)
옛날
- 의사 수 적었음
- 사법고시 1년에 합격자수 100명 내외(심지어 노무현 시절엔 60명 밖에 안 됨)
- 상고 출신 노무현도 아우라가 있었음
현재
- 매년 의대 정원 3000명(증원한다는 소리까지 나옴)
- 매년 로스쿨에서 변호사 1700명씩 찍어냄
- AI의 기술복제 시대
- 제의가치(신성한 법정) -> 전시가치(병원, 로스쿨 홍보, 의사, 변호사들 유튜브에 나와서 노래 부름)
- 아우라의 몰락
그럼 아우라가 사라진 자리에는?
-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가 등장
- SKY 로스쿨인지 아닌지 따짐(상징자본)
- 연봉이 얼마인지 따짐(경제자본)
- 상류층 고객과 말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분위기가 고급진지 따짐(체화된 문화자본)
절대적 권위 -> 상대적 위계
평등(x)
권력의 세밀화(o)
제목: 학력자본 vs ai
초등 의대반 -> 가성비 최악의 길
지금 초등학생이면
초/중/고 졸업+N수+의대 6년+인턴/레지던트/군의관 =약 20~30년
그럼 2045~2055년쯤에 사회에 나오는데
그때쯤이면 영상의학과 같은 일부 과들은 이미 중국 ai한테 먹혔을 가능성 매우 높음.
ai가 완전 대체는 불가능하겠지만 제프리 힌튼이 경고했듯 영상의학과 의사라는 직업의 가치 폭락은 거의 확실.
또한, 매년마다 의대에서 3000명씩 데려간다 가정하면 그 20~30년 동안 의사가 6만~9만명 더 늘어나있음.
지금도 편의점보다 병원이 더 많다 소리 나올정도로 많은게 의사인데 여기서 수만명 더 늘어난 상태로 경쟁해야함.(의사 몇몇 은퇴한다쳐도 수만명 늘어나는건 확실)
개원비용도 수억~수십억 듦.
권력도 없어서 정부에서 증원하라 하면 해야 됨.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다른 직업들이 의사보다 더 위험할수도 있다는거.
대기업 화이트칼라는 아무리 일잘해도 결국 하는 일이 ai로 대체되기 딱 좋은 일들임.
대기업 화이트칼라=연봉 수천만
구글 제미나이=월 3만원 연 36만원
당연히 후자를 씀.
ai는 화이트칼라가 어느 대학 출신이든 스펙이 어떻든 그딴 거 관심도 없음.
변호사도 이미 하는 일들이 ai로 꽤 많이 대체되고 있음. 의사보다 더 빨리.
반면, 판/검사는 사법권력의 영역이기 때문에 ai가 쉽게 대체할 수 없음. 아마 대체되더라도 가장 마지막에 대체될 가능성이 높음.
이건 공무원도 마찬가지.
블루칼라도 의외로 대체되기 힘듦. 팔다리 달린 로봇은 복제되기도 어렵고 일단 물리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내야 되는데 돈도 많이 들어감. 배터리 문제도 있음.(모라벨의 역설)
인간의 동물성, 육체능력은 수억년의 진화 속에서 피어난 것임
제목: 정신과 의사 ai
정신과 의사는 영상의학과, 병리과 같은 곳에 비해서 ai에 상대적으로는 안전할 것으로 예상.
대신 공감능력이 매우 중요해질듯.
대충 상담하고 약만 줄거면 언제든지 ai로 대체될 수 있음.
ai는 추론능력이 없음.
그리고 추론능력이 없는게 오히려 공감능력 없는 의사보다는 나을 수 있음.
의심하지도 판단하지도 해석하지도 않고(칼 로저스) 24시간 공짜(혹은 월 3만원)로 경청해주기 때문에 내담자가 속마음을 더 잘 털어놓을 수도 있음.
그래서 이미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조사에서도 속마음을 llm에게 털어놓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게 드러남.
인간 의사, 상담사에게 제일 어려운 영역인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이 ai에게는 너무나도 쉬움.(새로운 모라벡의 역설?)
인간 의사는 아무리 훈련을 많이 해봤어도 결국 한계가 있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확신하는 것이며 고통에 관해 듣는 것은 의심하는 것이다. -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p.22)
물론 좋은 의사들은 분명 ai시대에도 끝까지 살아남을거임.
경청은 ai가 잘하지만 정서적 공감은 여전히 인간 의사가 더 잘함.
좋은 의사가 ai를 잘 활용하면 더 좋아질거임.
반면 날로 먹는 의사들은 바로 걸러짐.
이게 바로 ai의 최고 순기능.
제목: 나는 문화적 기독교/불교인이다
신은 안 믿지만 기독교, 불교 영향 아래에 있다는건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인도 아프면 기도가 아니라 병원가서 의학의 힘을 빌려야 하고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도 윤리를 논할땐 기독교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버트런드 러셀도 분석철학, 수학철학에선 신을 부정할 수 있었지만 서양철학사를 논할땐 기독교를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인간은 기독교인이자 동시에 불교인이며 동시에 의심과 질문을 놓지 않는 소크라테스다.
모든 건 불교의 연기처럼 연결되어있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건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현대 정치학은 마르크스, 롤즈, 노직, 홉스, 루소, 벤담, 베카리아의 짬뽕에 불과하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황금비율로 짬뽕 할까를 고민해야지 순수좌파, 순수우파 같은건 없다.
있다면 그건 파시즘보다 더 한 미친 나라다.
“브리콜라주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의 원시부족을 연구하고 1962년 발간한 <야생의 사고>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원주민들은 야만인이나 원시인이 아닌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만의 ‘야생의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그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일을 해내는 부족사회의 문화담당자인 ‘브리콜뢰르’에 주목했다. 프랑스어인 브리콜뢰르(bricoleur)는 사전적 의미로 ‘여러 가지 일이나 작업에 손을 대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부족사회에서 한정된 재료와 도구를 가지고 다양한 일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브리콜뢰르는 이전에 필요에 의해 만들었던 결과물을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별개의 대상을 상황에 따라 하나로 통합하는 능력을 가지는데 이러한 기술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6368)
제목: universitas
대학교를 뜻하는 university의 어원은 라틴어 universitas다.
universitas는 전체, 공동체를 뜻한다.
즉, 대학교는 모든 학문들이 서로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고 시너지를 낼때 제일 강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의대쏠림이 너무 심하며 다른 학문들, 특히 취업이 안되기로 유명한 문사철 같은 학문들은 인기가 너무 없고 통폐합 얘기까지 나온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앨런 코맥은 케이프타운 대학교 물리학과를 나온 물리학자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낡은 병원의 엑스레이 기술을 보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된다.
물리학도가 의학에 손을 댄다는게 굉장히 무모한 시도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결국 CT 기술을 개발해 197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고 영상의학의 아버지가 된다.
제목: 창작은 수능보다 위대하다
적어도 두 종류의 게임이 있다. 하나는 유한 게임, 다른 게임은 무한 게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한 게임은 승리를 목적으로, 무한 게임은 게임 자체의 지속을 목적으로 한다.
- 제임스 P. 카스-
수능은 결국 제로섬 게임에 불과하다.
모두가 100점을 받으면 100점의 가치는 추락한다.
1등급을 받았다는건 곧 누군가는 9등급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노력이 성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시험도 아니다.
타고난 인지 능력 (기억, 처리속도, 언어 민감도)과 환경, 컨디션, 운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수능이라는 시험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이 시험 하나에 비이성적으로 목숨을 거는게 문제다.
수능 말고도 성취할 수 있는건 많다. 심지어 비제로섬이라 훨씬 더 의미있을수도 있다.
창작이 대표적이다.
창작은 누군가의 실패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창작 그 자체로 의미있다.
수능에서의 시간은 소모되는 자원이자 1분 1초가 줄어들수록 긴장감이 증폭되는 적이지만 창작에서의 시간은 창조적인 흐름이라는 점에서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과도 닮아있다.
3. 시
제목: 문학읽기
문학읽기는 나에게 고문이다.
ㅁ의 감옥은 나를 가두고 ㄹ의 미로는 두통을 유발한다.
동사는 흰종이에 박제되어 동력을 잃고 명사는 본질을 담는데에 실패한다.
마침표는 종결을 약속하는데 접속사는 그 종결을 지연시킨다.
ADHD는 당장의 감각을 요구하는데 문학은 다음의 문장을 요구한다.
자폐는 구체를 요구하는데 문학은 추상을 요구한다.
우울증은 파괴를 요구하는데 문학은 생성을 요구한다.
육체는 지금-여기서 신음하는데 문학은 손에 잡히지 않는, 잡을 수 없는 난해한 단어들로 고통받는 나를 조롱한다.
뇌는 고전(苦戰)하는데 학교는 고전(古典)을 요구한다.
제목: 만성통증
내 몸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단 하루도 휴전하지 않고 있다.
매순간마다 내 몸, 내 영토에 적군이 득시글거린다.
내가 종전 시킬 수 있으면 좋을텐데 나는 영토에 불과하다.
내가 참전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내전이라서 쉽게 끼어들 수 없다.
제목: 죽음
죽음이 수면이라면 인생은 난치성 불면증.
뇌는 피곤해하는데 눈은 감기지 않는다.
수면제는 말을 안 듣고 마취주사는 병원에서 놔주질 않는다.
너무 깨어있는 바람에 이제는 자는 법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편히 잘 수 있을거라는 확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잠을 더 못잔다.
이왕 자는거 1초라도 더 빨리…
제목: 소꿉놀이
소꿉놀이하다가 소꿉을 부숴뜨려도 아무 일 없었다는듯이 해맑게 웃는 어린아이는 행복하다.
부숴질 일이 없는 최첨단 소꿉을 가지고 놀지만 쉽게 질리는 아이는 불행하다.
사물보다 중요한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
제목: 식물의 삶
식물로 살고 싶다.
햇빛 하나면 족한 삶을 살고 싶다.
더 있는 자 보다 덜 있어도 되는 자가 행복하다.
알렉산더 대왕도 내 햇빛을 막을 순 없다.
식물엔 위계가 없기 때문이다.
강우엔 하늘에서 음식을 내려준다.
가지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독립적이면서도 같이 성장에 기여한다.(마이클 마더)
식물은 하늘이 선택한 최고의 생명체다.
제목: 영화는 기묘하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모든 것들은 지금 현재가 아닌 과거에 존재했었던 순간들이다.
그러나 카메라 속 프레임은 그 과거의 조각들을 마치 영원히 현재형인 것처럼 박제시키고 편집은 그 박제된 조각들을 이어 붙여 거대한 스크린에 비춘다.
죽었던 과거가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다시 되살아나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 현존과 부재, 카메라의 눈과 관객의 눈 사이의 경계마저 허물어지는 참으로 기묘한 현상.
4. 아카이브
제목: 도덕의 자기기만
도덕적 면허 효과(moral licensing effect)란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더 부도덕해지기 쉽다’는 의미의 사회과학 용어다. 사람이 선한 행동이나 도덕적인 행동을 할 경우, 도덕성에 대한 자기 이미지 혹은 자기 우월성에 빠지기 쉽다. 이런 긍정적 자기이미지가 ‘나는 선하다’는 자기 정당화의 방편으로 사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https://www.viva100.com/20230110010003078#:~:text=%EB%8F%84%EB%8D%95%EC%A0%81%20%EB%A9%B4%ED%97%88%20%ED%9A%A8%EA%B3%BC(moral%20licensing,%EC%9E%90%EA%B8%B0%20%EC%9A%B0%EC%9B%94%EC%84%B1%EC%97%90%20%EB%B9%A0%EC%A7%80%EA%B8%B0%20%EC%89%BD%EB%8B%A4.)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면서 그것을 내세우며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아원, 장애인복지시설, 동물보호시설, 환경보호단체 등 각종 시설이나 사회단체에 큰돈을 기부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것봐 내가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 나는 항상 주는 것을 좋아하는 관대한 사람이야“라는 분위기를 풍기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대한다. 그런 선행을 통해 ‘나는 타인들보다 우월하다’는 확인과 증명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형이다.
(https://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88)
예를 들어, 마자와 종(Mazar & Zhong, 2010)의 연구에서 환경 제품을 소비한 사람들이 일반 제품을 소비한 사람들보다 후속적인 친사회적 행동을 더 적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환경 제품의 구매가 도덕적 가치감을 이미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의 친사회적 행동을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48221)
도덕적 공황(스탠리 코헨) 상태는 사회에서 발생한 집단들의 행위 또는 사건을 너무 과도한 왜곡에 의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적 개념이다.
(도덕적 공황 상태 분석에 대한 윤리문화적 접근 방안, 송선영, 2008, pp. 121-146)
도덕적 공황은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공동체 또는 사회 전체의 가치 , 안전, 그리고 이익에 위협이 된다는 광범위한, 대부분 비이성적인 두려움입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적 공황은 정치인들에 의해 조장되고, 언론에 의해 지속되며, 종종 공황의 근원을 겨냥한 새로운 법률이나 정책의 통과로 이어집니다.
(https://www.thoughtco.com/moral-panic-3026420#:~:text=%EB%8F%84%EB%8D%95%EC%A0%81%20%EA%B3%B5%ED%99%A9%EC%9D%80%20%EB%88%84%EA%B5%B0%EA%B0%80%20%EB%98%90%EB%8A%94%20%EB%AC%B4%EC%96%B8%EA%B0%80%EA%B0%80%20%EA%B3%B5%EB%8F%99%EC%B2%B4%20%EB%98%90%EB%8A%94,%EC%9D%B4%EC%9D%B5%EC%97%90%20%EC%9C%84%ED%98%91%EC%9D%B4%20%EB%90%9C%EB%8B%A4%EB%8A%94%20%EA%B4%91%EB%B2%94%EC%9C%84%ED%95%9C%2C%20%EB%8C%80%EA%B0%9C%20%EB%B9%84%EC%9D%B4%EC%84%B1%EC%A0%81%EC%9D%B8%20%EB%91%90%EB%A0%A4%EC%9B%80%EC%9E%85%EB%8B%88%EB%8B%A4.)
결국 사람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또 발뺌의 여지만 있으면 대부분이 남을 속인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보관(내면의 변호사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은 정당화를 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명수이다. 그래서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도 대부분은 남을 속인 후 실험실을 나가면서 애초 실험실에 발을 들일 때와 똑같이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남의 잘못을 알기는 쉬우나, 나 자신의 잘못을 알기란 어렵다. 사람들은 남의 잘못은 바람에 곡식 키질하듯 드러내고, 자신의 잘못은 노련한 도박꾼이 패를 숨기듯 감춘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실험자 : 자,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줄리와 마크가 섹스를 한 건 잘못인가요?
피험자 : 네, 섹스를 한 건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요, 그러니까 제가 종교에 독실한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근친상간은 어쨌든 잘못이라는 생각이 그냥 드는데요. 잘은 모르겠지만.
실험자 : 근친상간이 어디가 잘못이라는 건지 말해주겠어요?
피험자 : 음, 근친상간의 개념이 전부요. 그러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그런데 이게 맞는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근친상간을 할 경우 여자가 임신하면 아이가 기형이 됩니다. 근친상간을 하는 경우엔 대부분요.
실험자 : 하지만 이들은 콘돔과 피임약을 썼는데요?
피험자 : 아, 그렇군요. 맞아요. 그랬다고 했죠.
실험자 : 따라서 이들에게 아이가 생길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피험자 : 음, 그렇다면 절제야말로 섹스의 가장 안전한 길이어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음, 어······.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하는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잘 모르겠네요. 당신이 내게 뭘 물었죠?
실험자 : 그 둘이 섹스를 한 것은 잘못일까요?
피험자 :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실험자 : 저는 당신이 그것을 왜 잘못이라고, 무엇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피험자 : 알겠습니다. 음······그러니까······가만있자, 생각을 좀 해보고요. 음······그 둘이 나이가 얼마나 되죠?
실험자 : 대학에 다니고 있으니까 스무 살 정도입니다.
피험자 : 아, 나 이거 참(낙심한 표정으로). 잘 모르겠네요. 전 그냥······그렇게 배우며 자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제 경우엔 그렇다는 뜻이에요. 물론 다들 그럴 테지만(웃음). 그냥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저도 그렇고요. 제 이유는, 음, 아마 이런 걸 겁니다. 그냥, 음······우리는 그렇게 배우며 자라지 않았다고요. 우리는 그런 일은 못 봐요. 용납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막가는 행동이잖아요.
실험자 : 하지만 자라면서 용납 안 될 일이라고 배웠다고 해서 그것을 다 잘못이라고 할 순 없을 텐데요, 안 그런가요? 예를 들어, 당신이 자라면서 여자들은 직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고 칩시다. 그때도 당신은 여자들이 직장에서 일하는 게 잘못이라고 할 건가요?
피험자 : 음······글쎄요······. 아, 아이고. 이거 어렵네요. 음, 뭐라고 얘기해도 내 맘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둘의 행동에 대한 제 느낌은, 그리고 제 생각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저 미친 짓이라고밖에는!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근거라는 것들은 사실 (해당 주장에 대한) 사후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마골리스)
이성은 정념의 노예다
(데이비드 흄)
논쟁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어느 쪽도 추론을 통해서 자신의 신조를 끌어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정(情)에 호소하지 않는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이 더 올바른 원칙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데이비드 흄)
사람들이 음식을 먹거나 성관계를 가질 때보다 타인을 도울 때 생존과 번식을 더 많이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진화는 우리 안에 특정인의 운명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불어넣고, 타인을 가엽게 여기고 배려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타적 인간이 되게 했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실제로는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이타주의자를 할퀴어 상처를 내라. 그러면 위선자의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마이클 기셀린)
독일 병사들을 살해한 그 남자들은 사디스트도 사이코패스도 아니었다. 그들은 강한 도덕 감정에 자극을 받았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여기서 명심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객관적인 의미에서 선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동기’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애덤스의 말은 악이 선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악이 저질러진다는 뜻이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세상에는 도덕이 지나치게 많다. 자력구제를 통한 정의를 추구한답시고 저지른 모든 살인과 종교 전쟁과 혁명 전쟁의 사망자, 피해자 없는 범죄와 일탈 행위 때문에 처형된 사람, 이데올로기적 집단 살해의 피해자를 다 더하면, 틀림없이 도덕과 관계없는 포식과 정복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을 것이다.
(핑커 <Better Angels>)
두 사람이 동일한 테마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과정에서 A가 B의 생각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의 본성상 A는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내기 위해 우선 자기 생각을 점검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전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항상 자신이 옳아야 한다는 생각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존재이다.
(쇼펜하우어 <토론의 법칙>)
고착ANCHORING: 폭풍우 몰아치는 혼돈의 바다에서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공인되고 믿음직하며 침대 속처럼 편안하다는 느낌에 도취되도록 만드는 ‘진리들’, 즉 신, 도덕, 자연법, 국가, 가족에 고착하기로 공모한다.
(페테르 베셀 삽페의 방어기제, 토머스 리고티 <인간종의 음모> 중에서)
비인간 종의 멸종에 관하여 우려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멸종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그 삶이 중단되는 개별 동물들에 관하여 우려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멸종을 우려할 가장 강한 이유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한데도 말이다. 동물 멸종에 관한 대중적인 우려는 보통 인간들에 대한 우려이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학문의 규범은 학문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유혈을 부르는 성취 능력이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내가 여기에서 비합리적인(도구적 합리성) 것이라고 의도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전체 사회의 목적을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존을 영위시켜 주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것으로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갖고 있는 사회의 설치를 통해서 전체 사회의 고유한 목적에 반대되는 것인 전체 사회 자체에 고유한 존재 이유와 전체 사회에 고유한 합리성을 대립시키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대립관계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비합리적인 것을 일단 보게 되면, 이른바 비합리적인 제도들 스스로 어떤 기능을 갖게 됩니다. […]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설치가 갖고 있는 비합리성이 수많은 모멘트들에서 ―내가 여기에서 의도하는 모멘트들은 시간적인 것들이 아니고, 수많은 관점에서 보이는 모멘트들입니다― 통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왜 범죄 피해자를 괴롭히는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실험을 소개하겠습니다. 1966년 미국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Lerner, 1929~)는 72명의 여성들을 모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별 이유도 없이 잔인하게 전기 고문을 받는 한 여성을 각각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한 그룹에는 고문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줬고, 다른 그룹에는 주지 않았죠. 시간이 흐른 후 러너 박사는 두 그룹에 각각 고문받던 여성에 대한 인상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선택권이 없었던 그룹의 사람들이 고문받던 여성의 외모나 성격을 훨씬 나쁘게 기억했다고 합니다. 즉, 피해자를 비난한 겁니다.
(https://m.sedaily.com/NewsViewAmp/1Z2NOXN58Y)
유학자들은 하늘과 땅이 ‘의도를 가지고故’ 인간을 낳았다고 하지만, 이 말은 허황된 것이다. 대체로 하늘과 땅이 기를 합할 때, 인간은 ‘우발적으로偶’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왕충 <논형>)
미디어의 보도 방식은 또한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강화시켰다. 많은 뉴스가 테러리스트들의 배경, 종교, 문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청자들은 특정 집단 전체를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슬로빅이 말하는 ‘집단 휴리스틱’의 예다
(이동현 <폴 슬로빅의 심리학 위험지각이론 톺아보기>)
시스템 정당화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합의(즉, 현상 유지)를 방어하고 강화하며 정당화하려는 동기를 부여받습니다(상황적 및 성향적 요인에 따라 정도가 달라집니다). 시스템 정당화 동기는 다양한 방식(예: 고정관념, 이념, 귀속 측면)으로 나타나며, 암묵적(즉, 무의식적)으로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발생하고, 인식론적, 실존적, 관계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이론화됩니다.
(https://psycnet.apa.org/record/2011-21802-017)
교사들은 학생들을 평가하면서 뛰어난 학생/성실한 학생, 우아한 행동/거친 행동과 같은 형용사를 동원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수식어에는 이미 귀족적 가치와 소부르주아 가치관이 대립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빈민층이나 노동자들의 세계관은 배제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학습 능력을 평가하는 교사들의 기준들이 대부분 효율성이나 합리성에 근거하며, 이것이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효율성이나 합리성의 이념을 은연중에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성민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대중은 탄원자보다는 지배자를 사랑하고, 자유를 부여받기보다는 어떤 적대자도 용서하지 않는 교리 쪽에 훨씬 더 만족을 느낀다. 대중은 수시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쉽사리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대중은 잘못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에 대한 정신적 폭행의 파렴치함도, 자기들의 인간적 자유에 대한 악랄한 억압도 깨닫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성향의 사람은 관대하고 동정심이 있다. 순수함을 추구하는 성향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성 요한 클리마쿠스)
자기기만은 내가 나를 속이는 거죠. 말은 헷갈리게 들리지만, 이런 겁니다. 우리 안에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이 있다면, 의식적인 마음이 모르도록 현실을 애써 담아두려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진실된 정보는 무의식적 마음에 저장되고 거짓이 의식적인 마음에 저장되죠. 같은 사건을 접해도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보를 선택해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는 타인을 기만하는 데도 들통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하고요. 이 주제에 대해 책을 쓰기까지 저는 40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로버트 트리버스 https://www.khan.co.kr/article/201506152131255/amp)
(자기의) 행동을 유발하는 모듈과 (타인들에게) 도덕적인 규칙에 동의하라고 촉구하는 모듈은 서로 다르다. 비난과 양심이 제각기 다른 모듈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종종 상충된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이런 것을 모두 규합해 보면 인간 마음의 모듈 설계가 위선을 보장한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로버트 커즈번)
법적으로 관련이 없는 상황적 결정 요인(이 경우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유사한 법적 특성을 가진 사건에서 판사가 다르게 판결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법이 불확실하다는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https://www.pnas.org/doi/10.1073/pnas.1018033108)
인간의 뇌는 범법자나 배신자 등 누가 봐도 비난받아 마땅한 대상을 찾아 벌하는 데 쾌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져 있다. 타인에게 ‘정의의 철퇴’를 가하면 뇌의 쾌락중추가 자극을 받아 쾌락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 쾌락에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며, 항상 벌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타인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상태를 정의에 취해버린 중독 상태, 이른바 ‘정의 중독’이라 부른다. 인지 구조가 의존증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카노 노부코 <정의 중독>)
하지만 그러므로 충고하건데 친구들이여, 남을 벌하려는 충동이 강한 자들 모두를 경계하라
(프리드리히 니체)
제목: 성공이라는 허상
심리학자 Festinger의 사회적 비교이론 (social comparis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능력이나 의견 등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객관적인 지표가 없을 때는 비교를 통해 주관적인 평가를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즉 비교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5925)
가느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구부러져 있어서 들보나 서까래로 만들 수 없고, 그 거대한 뿌리를 내려다보니 속이 푸석푸석해서 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잎사귀들을 혀로 핥으면 입안이 헐어 상처가 생기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람들을 사흘 동안이나 미쳐 날뛰게 할 것 같았다.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재목이 아닌 나무여서 이렇게 거대한 나무로 자랐구나. 아! 신인(神人)도 그래서 재목이 아니었던 거구나!”
-장자 <인간세>-
우리는 12세가 12세에 적합한 규준으로 A를 받는다는 이유로 그 아이가 저명한 대학 물리학 교수 자리를 제의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험에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의 삶이 인간의 규준에서 잘되어 간다는 이유로 그 삶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 으로 잘되어 간다고 자주 생각한다.
자기 삶이 얼마나 잘되어 가는지에 관한 개인의 판단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삶이 그 자체로 얼마나 달되어 가는지보다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얼마나 잘되어가는지다.
적응과 비교는 낙천주의적 기준선으로부터 작용하게 되며 낙천주의 편향의 영향 하에 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보다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하고 자신을 비교하기가 더 쉽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이 방법을 따르면 최고의 대학에 갈 수 있다거나 시험에 통과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이는 확률에 관한 착각을 이용한 혹세무민이다. 자기 계발서가 정직하게 약속할 수 있는 최대한은 이것이다. ‘나에게 쓸모 있었고 근거가 있는 방법을 공유하니, 이 방법들을 활용하면 예전보다는 좀 더 효율적이고 쉽게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도하는 자기 계발서들은 ‘구성의 오류’를 모른다. 한 사람이 어떤 방법을 써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같은 방법을 써서 동일한 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보통은 그 반대이다. 목표로 삼은 성공이 본질적으로 희소한 것일 때, 사람들이 다 같이 최선의 전략을 쓰더라도 소수만이 성공의 달콤함을 맛볼 뿐이다. 예를 들어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확실한 방법을 여러 수험생들이 어김없이 따라한다면? 합격자의 수는 정해져 있다. 자기 계발 분야의 베스트셀러는 이 점을 말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착각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민열 <삶은 왜 의미 있는가>-
우선 예술작품에 대한 개인들의 취향이 구성되는 과정을 살펴보자(아래의 내용들은 「구별짓기」 1장을 참조할 것).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미술품이나 사진에 대한 독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코드와 암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한 사회의 지배문화가 피지배문화를 압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이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와 같은 미술품에 담긴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따라서 미술관에서 이러한 추상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통해서 전수되는 문화적 코드교육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학교를 통해서 일반인들에게 전달되는 미학교육 속에는 일정하게 틀 지워진 세계관이 암묵적으로 전제되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사회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계급의 취향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주말의 여가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영화를 보러가는 계층으로부터 미술관에 가는 계층 사이에는 일정한 계급적 분류효과가 작동한다고 보아야 한다.
-홍성민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 사회>-
여러분은 최고의 권력을 얻고 높은 명성을 얻은 사람들도 자신이 가진 부보다 여유로운 삶을 갈망하고 꿈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그들은 별다른 위험만 없다면 아찔한 정상에서 내려오고 싶어한다. 행운이란 외부의 공격을 받거나 충격으로 흔들리지 않더라도 그 자체의 무게만으로 스스로 무너져 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네카 <세네카의 인생론>-
쾌락은 따라서 도덕적 선(善)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라캉은 의도적으로 도덕적 선을 영어 'the good'으로 제시한다. 영어에서 '굿'은 도덕적인 '착함'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맥락에서의 '상품'을 의미한다. 쾌락은 도덕적인 선에서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으로 그 뜻이 확장된다.(72)쾌락원칙은 희열을 회피함으로써 도덕공동체의 법을 준수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물질적인 쾌적함에 안주하는 성향을 띤다. 자본주의 너머는 쾌락 너머의 희열처럼 현실의 편안함을 파괴하는 위험한 대상일 뿐이다. 반면 자본주의 내부의 물질적 쾌락은 그 편리한 풍요로움으로 편안과 안락을 약속한다. 쾌락원칙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지배질서의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보수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쾌락원칙을 넘어서려는 충동이 주체 속에 지울 수 없는 욕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희열의 금지는 금지를 위반하려는 욕망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쾌락에 안주하지 않고 희열을 만끽하려는 충동이 만족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지속된다. 만족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해로운 결과가 나타나고 심각한 장애가 발생'할 정도로 이 욕망은 집요하고 절실하다.
-김용수 <자크 라캉>-
우리는 우리의 가치와 의미를 ‘객관적 진리’라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에서 찾는 나타남의 형태를 수용해야 합니다. 이 진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한 맹세이자 충실성으로서의 진리를 말합니다.
-마이클 마더 <식물의 사유>-
제목: 행복은 사기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다.
-쇼펜하우어-
우리는 몸 전체가 건강한 건 느끼지 못하지만, 구두가 발을 꽉 조이는 그 작은 고통 하나는 즉각적으로 느낀다.
-쇼펜하우어-
(https://www.goodreads.com/quotes/7235753-just-as-a-brook-forms-no-eddy-so-long-as)
나쁜 사건이 좋은 사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상적인 사건, 주요 생활 사건(예: 트라우마), 친밀한 관계 결과, 소셜 네트워크 패턴, 대인 관계, 학습 과정에서 발견됩니다. 나쁜 감정, 나쁜 부모, 나쁜 피드백은 좋은 정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며, 나쁜 정보는 좋은 정보보다 더 철저하게 처리됩니다. 자아는 좋은 자아를 추구하기보다는 나쁜 자아 정의를 피하려는 동기가 더 큽니다.
(https://psycnet.apa.org/record/2018-70020-001)
일단 삶이(나쁨의 양과 분포를 모두 고려했을 때) 나쁨의 일정한 한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좋음의 양이 얼마나 되건 그것을 능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양의 좋음도 한계점을 넘어선 나쁨을 치를 만큼 가치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부정적인 경험보다는 긍정적인 경험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삶 전반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해 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여러 연구에서 피실험자들은 부정적인 경험보다 훨씬 많은 수의 긍정적인 경험을 열거하였다. 이 선택적인 기억은 우리의 삶이 이때까지 얼마나 잘되어 왔는지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왜곡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한 평가만이 편향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상이나 기대도 편향되어 있다. 우리는 사태가 얼마나 좋을 것인가에 관하여 과장된 견해를 갖는 경향이 있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주체의 삶이 얼마나 좋게 또는 나쁘게 느껴지는지가 명백히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 실제 질에 관계없이 말이다. 만일 그것이 지속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명백히도 죽음을 선호할 만큼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설사 객관적으로는 죽는 게 더 낫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특정한 자살들을 존중하기 꺼리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의 삶의 질을 과
소평가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위 경우와 비슷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지각은 그러지 않았을 경우보다 그들의 삶을 더 못하게 만든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삶이 지속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들의 삶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 죽음을 선호할 정도가 된 것이다. 비록 그들의 지각이 오류일지라도 그래서 이런 면에서는 비합리적일지라도, 죽음에 대한 그들의 선호는 다른 면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다-그들의 삶이 얼마나 부담스럽게 느껴지는지를 감안할 때, 죽음은 그들에게 최선일 수도 있다.
-데이비드 베나타 <인간의 곤경> 중-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1934~2024)은 수면을 하지 않고 대장 내시경을 받을 때 환자가 60초마다 고통의 정도를 말하게 했다. 환자 A는 8분 동안 내시경이 진행되었고 환자 B는 24분 동안 진행됐다. 환자 A는 8분만에 끝났지만 끝나기 직전 고통의 정도가 8에 있었다(0은 ‘고통이 전혀 없음’, 10은 ‘고통스러워 참을 수 없음’이다). 반면에 환자 B는 10분 쯤에 8의 고통을 느끼기도 했으나 끝나는 24분에는 1 정도의 고통을 느꼈다. B의 대장 내시경 시간이 A의 3배 수준이다 보니 B의 고통 총량은 A보다 훨씬 많았다. A와 B 중 누가 더 고통스러웠다고 기억할까?
예상과 달리 답은 A이다. 실험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고통에 대한 기억은 대장 내시경 중 최악으로 고통스러웠던 순간과 마지막 고통 수준을 합한 평균으로 결정된다. 최악의 고통은 A, B 모두 8이고 마지막 순간의 고통은 각각 7과 1이니 평균을 내면 A와 B는 각각 7.5와 4.5가 되어 A가 B에 비해 대장 내시경에 대해 나쁜 기억을 품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고통의 기억에 지속 시간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장 내시경이 고통스러운 순간에 끝나게 된 게 A에게는 불운이었던 셈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21/0008261065?sid=110)
쾌락적 러닝머신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행복 수준이 크게 변동하지 않는 비교적 안정적인 생명체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나쁜 일이 발생한 후에도 상당히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어떤 사건이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줄 때 그 행복의 급증은 잠시 동안만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https://thedecisionlab.com/reference-guide/psychology/hedonic-treadmill)
노르웨이 오슬로대 심리학과의 시리 레크네스 박사는 예상한 것보다 고통의 강도가 덜할 때는 뇌가 고통을 실제보다 덜 느끼며, 심지어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3/04/2013030402857.html)
개인의 객관적인 복지가 더 못하게 변하면, 처음에는 상당한 주관적인 불만족이 생긴다. 그러나 이후에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자신의 기대를 그에 따라 조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도서관의 책들을 뒤져보자. 신학책이나 강단 형이상학책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고 치자. 묻겠다. 이 책에 양이나 수에 관한 추론(수학/논리)이 담겨 있는가? 아니오. 그럼 사실과 존재에 관한 경험적인 추론(과학/데이터)이 담겨 있는가? 아니오. 그렇다면 불에 던져버려라. 그것은 궤변과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흄 <인간 지성 탐구>-
이런 배경 속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비합리적이며 무의미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논리실증주의자 카르납(Rudolf Carnap)은 1931년에 발표한 자신의 「Überwindung der Metaphysik durch logische Analyse der Sprache」(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의 극복)에서 하이데거의 무에 대한 사유를 “무의미한 담론의 극단적 경우”라고 ‘극단적으로’ 폄하한 바 있다.
(https://m.jsd.or.kr/?c=culture/culture1&uid=23122)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명제—그러므로 철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도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이상현상災과 사변異을 논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이상현상과 사변이 닥친 것은 군주가 정치로 하늘을 움직이고, 하늘은 기氣를 움직여 이에 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물건으로 북을 두드리고, 몽동이로 징을 치는 것과 같다. 북은 하늘과 같고, 몽둥이는 정치와 같다. 종소리와 북소리는 하늘이 응답하는 것과 같다. 군주가 아래에서 정치를 하면 하늘의 기는 사람에 따라서 이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의심스러운 것이다. 대체로 하늘이 개별자를 움직일 수는 있으나, 개별자가 하늘을 움직일 수도 있을까?(…)인간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은 마치 벼룩이 옷 속에 있는 것과 같고, 개미가 굴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벼룩과 개미가 이리 뛰고 저리 날뛰지만 옷 안과 굴 속의 기를 움직일 수가 있겠는가? 벼룩과 개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개별자와 기의 이치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왕충 <논형>-
가장 깊은 침체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갑작스레 죽음의 실체를 포착한다. 표현 불가능한 의식의 한계, 언어화가 불가능한 형이상학의 실패, 그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무식한 노파의 한숨이 철학자의 현학적 말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
요즘 상을 받았다는 시를 보면, 무슨 놈의 시가 그렇게 어려운지. 소설도 그렇고. 어려운 글은 심오한 글이 아니라 못쓴 글이야. 근데 사람들은 어렵게 쓰는 걸 좋아해. 난해하게 써야 존경을 하지. 내 글은 쉽고 술술 넘어가는데, 그걸 가볍다고 해. 사실 돌아온 사라도 최대한 쉽게 가려고 몇 번을 고치고 고친 거야. 우리나라는 작가들이 문장으로 독자를 고문하고 있는데도, 그걸 존경해. 쉽게 말해서 한국 독자나 비평가들은 마조히스트야.
-마광수(대학내일 2011년 5월 둘째 주판(5.9~5.15)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