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할 건 하나도 없다. 그저 보여줄 뿐.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허영vanité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라서 병사도, 아랫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자신의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파스칼 <팡세>-
1. 도덕의 자기기만
2. 성공이라는 허상
3. 행복은 사기다
4. 기만 위의 인생
제목: 도덕의 자기기만
심리학자 알버트 반두라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상황과 대상에 따라 도덕의 끈을 붙들지 놓을지, 죄책감을 느낄지 말지를 달리한다. 즉 인간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선택적 도덕적 이탈(selective moral disengagement)을 자유자재로 이루는 동물이다. 우리는 언제든 도덕을 던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많은 장치들을 가지고 있다.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29764)
니버는 개인들이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사회가 반드시 도덕적이지는 않다고 밝혔다. 도덕적인 개인도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개인의 도덕적 행위가 집단의 도덕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나 크게 작용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집단의 구조, 제도 등이 개인 행위의 도덕성을 억압할 수 있고, 개인의 이기심은 결국 집단에서 더 강하게 표출되어 사회집단의 도덕성이 개인의 도덕성보다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http://m.reformednews.co.kr/11386)
군중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면서 각자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군중을 형성한 그들은 사람을 죽이려는 동일한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
(로저 에버트 영화 <엠(1931)> 리뷰)
그 어떤 국가도, 국가란 이름이 붙어 있는 나라는 하나같이 실은 국민의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부모의 사랑에 거짓이 없다고 믿는 것은 부모 자신뿐이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도덕적 면허 효과(moral licensing effect)란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더 부도덕해지기 쉽다’는 의미의 사회과학 용어다. 사람이 선한 행동이나 도덕적인 행동을 할 경우, 도덕성에 대한 자기 이미지 혹은 자기 우월성에 빠지기 쉽다. 이런 긍정적 자기이미지가 ‘나는 선하다’는 자기 정당화의 방편으로 사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면서 그것을 내세우며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아원, 장애인복지시설, 동물보호시설, 환경보호단체 등 각종 시설이나 사회단체에 큰돈을 기부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것봐 내가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 나는 항상 주는 것을 좋아하는 관대한 사람이야“라는 분위기를 풍기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대한다. 그런 선행을 통해 ‘나는 타인들보다 우월하다’는 확인과 증명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형이다.
(https://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88)
예를 들어, 마자와 종(Mazar & Zhong, 2010)의 연구에서 환경 제품을 소비한 사람들이 일반 제품을 소비한 사람들보다 후속적인 친사회적 행동을 더 적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환경 제품의 구매가 도덕적 가치감을 이미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의 친사회적 행동을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자존감이 아닌 타인의 불행을 들춰내거나 가십거리를 인용해 악의적 댓글로 얻는 자존감에 샤덴프로이데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남이 잘못되는 걸 보는 건 필로폰(Philopon)을 맞은 것보다 더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저질스러운 감정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게 인간들의 심리구조라 한다면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https://www.ansantimes.co.kr/news/articleViewAmp.html?idxno=22165)
동성애를 혐오하는 집단이 오히려 동성애 비디오를 볼 때 더 흥분했다.
(https://psycnet.apa.org/record/1996-00463-014)
마키아벨리즘 성향이 높은 사람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과가 효과적이라면 수단과 방법은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다는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설득을 당하기 보다는 온갖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데 능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비윤리적, 불법적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http://m.ansan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548)
다큐멘터리는 학살 가해자가 자신들의 반인륜적 행적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안와르 콩고는 영화 제작을 위해 고문실로 사용하던 건물로 향한다. 이때 안와르 콩고는 손수 만들어 사용하던 고문 기구를 자랑스레 선보인다. 안와르 콩고는 자기 옆에 있던 수행원에게 ‘빨갱이’ 역할을 시키고, 그의 목에 철사를 감고 잡아당기기까지 한다. “칼을 쓰면 피가 쏟아져 청소하기 불편했다”며 “새로 개발한 고문 기구로 천 명을 죽였다”고 웃으면서 말하는 안와르 콩고. 다큐멘터리는 학살 재연 장면을 클로즈업하거나, 무서운 배경 음악을 삽입하지도 않는다. 이는 다큐멘터리로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담하게 담아내면서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이들의 비인간성을 부각한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2012)> 리뷰 https://chunchu.yonsei.ac.kr/news/articleView.html?idxno=31087)
그녀(수전 손택)는 사실상 우리 모두를 관음증 환자라고 일컫는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잔인한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진 속에 담긴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보며 적지 않은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영국의 유명한 비평가인 윌리엄 해즐릿에 따르면, 인간이 여러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를 늘 읽는 이유는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https://www.artinsight.co.kr/m/page/view.php?no=64684)
도덕적 공황(스탠리 코헨) 상태는 사회에서 발생한 집단들의 행위 또는 사건을 너무 과도한 왜곡에 의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적 개념이다.
(도덕적 공황 상태 분석에 대한 윤리문화적 접근 방안, 송선영, 2008, pp. 121-146)
도덕적 공황은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공동체 또는 사회 전체의 가치 , 안전, 그리고 이익에 위협이 된다는 광범위한, 대부분 비이성적인 두려움입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적 공황은 정치인들에 의해 조장되고, 언론에 의해 지속되며, 종종 공황의 근원을 겨냥한 새로운 법률이나 정책의 통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남을 처벌할때 뇌의 보상 중추인 선조체가 활성화되면서 쾌락을 느낀다.
(https://pubmed.ncbi.nlm.nih.gov/15333831/)
독일 검열관들은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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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저리들이다 – –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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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하이네<Ideen: Das Buch Le Grand>)
만약 신이 인간의 모든 기도를 들어준다면, 인류는 금방 멸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심각한 피해가 갈 수 있는 악한 것에 대해서 자주 기도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경건한 것은 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 아니면 경건하기 때문에 신이 사랑하는 것인가?”
(만약 첫번째라면 경건의 기준은 자의적이다. 두번째라면 신이 ‘이미 존재하는 경건’을 사랑한다는건데 그럼 신은 경건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에우티프론 딜레마)
도덕적인 완전성을 대표하는 신이 명령하는 것들은 이제 인간을 적극적으로 구속하는 무자비한 율법이 된다. 그러한 도덕적 완전성은 의지에 관계되는 것이며, 완전한 도덕적 존재는 인간에게 당위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율법을 가지고 불완전하고 감성적인 인간을 자신과의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양대종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읽기>)
사회심리학자 톰 길로비치(Tom Gilovich)는 기이한 믿음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인지 기제를 주로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가 세운 간단한 공식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을 때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것을 믿어도 될까(can)?”28 그렇게 물은 후에는 믿음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 나서고, 단 하나의 허위 증거라도 그와 관련된 증거가 나타나면, 이제 우리는 사고를 멈춰도 된다고 여긴다. 그것을 믿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그 누가 물어봐도 이제 우리에게는 정당화의 근거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싶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에게 “내가 이것을 믿어야만 하나(must)?”라고 물어본다. 그런 후에는 반대 증거를 찾아 나서고, 주장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우리는 그 주장을 무시해버린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결국 사람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또 발뺌의 여지만 있으면 대부분이 남을 속인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보관(내면의 변호사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은 정당화를 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명수이다. 그래서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도 대부분은 남을 속인 후 실험실을 나가면서 애초 실험실에 발을 들일 때와 똑같이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남의 잘못을 알기는 쉬우나, 나 자신의 잘못을 알기란 어렵다. 사람들은 남의 잘못은 바람에 곡식 키질하듯 드러내고, 자신의 잘못은 노련한 도박꾼이 패를 숨기듯 감춘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실험자 : 자,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줄리와 마크가 섹스를 한 건 잘못인가요?
피험자 : 네, 섹스를 한 건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요, 그러니까 제가 종교에 독실한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근친상간은 어쨌든 잘못이라는 생각이 그냥 드는데요. 잘은 모르겠지만.
실험자 : 근친상간이 어디가 잘못이라는 건지 말해주겠어요?
피험자 : 음, 근친상간의 개념이 전부요. 그러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그런데 이게 맞는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근친상간을 할 경우 여자가 임신하면 아이가 기형이 됩니다. 근친상간을 하는 경우엔 대부분요.
실험자 : 하지만 이들은 콘돔과 피임약을 썼는데요?
피험자 : 아, 그렇군요. 맞아요. 그랬다고 했죠.
실험자 : 따라서 이들에게 아이가 생길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피험자 : 음, 그렇다면 절제야말로 섹스의 가장 안전한 길이어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음, 어······.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하는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잘 모르겠네요. 당신이 내게 뭘 물었죠?
실험자 : 그 둘이 섹스를 한 것은 잘못일까요?
피험자 :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실험자 : 저는 당신이 그것을 왜 잘못이라고, 무엇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피험자 : 알겠습니다. 음······그러니까······가만있자, 생각을 좀 해보고요. 음······그 둘이 나이가 얼마나 되죠?
실험자 : 대학에 다니고 있으니까 스무 살 정도입니다.
피험자 : 아, 나 이거 참(낙심한 표정으로). 잘 모르겠네요. 전 그냥······그렇게 배우며 자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제 경우엔 그렇다는 뜻이에요. 물론 다들 그럴 테지만(웃음). 그냥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저도 그렇고요. 제 이유는, 음, 아마 이런 걸 겁니다. 그냥, 음······우리는 그렇게 배우며 자라지 않았다고요. 우리는 그런 일은 못 봐요. 용납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막가는 행동이잖아요.
실험자 : 하지만 자라면서 용납 안 될 일이라고 배웠다고 해서 그것을 다 잘못이라고 할 순 없을 텐데요, 안 그런가요? 예를 들어, 당신이 자라면서 여자들은 직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고 칩시다. 그때도 당신은 여자들이 직장에서 일하는 게 잘못이라고 할 건가요?
피험자 : 음······글쎄요······. 아, 아이고. 이거 어렵네요. 음, 뭐라고 얘기해도 내 맘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둘의 행동에 대한 제 느낌은, 그리고 제 생각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저 미친 짓이라고밖에는!
(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
근거라는 것들은 사실 (해당 주장에 대한) 사후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마골리스)
이성은 정념의 노예다
(데이비드 흄 <인성론>)
논쟁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어느 쪽도 추론을 통해서 자신의 신조를 끌어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정(情)에 호소하지 않는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이 더 올바른 원칙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데이비드 흄 <도덕 원리에 관한 탐구>)
1. 설명적 제약(EC): 주체 S가 명제 P에 대해 비추론적(non-inferential)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S가 P에 대한 믿음을 형성할 때 근거로 삼는 비사실적(non-factive) 정신 상태들과 P라는 사실 자체 사이에 직접적인 설명적 연결이 존재해야 한다.
2. 비자연적 도덕 사실은 우리의 비사실적 정신 상태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3. 따라서, 비자연적 도덕 사실에 대한 비추론적 지식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Lutz, Matt (2020). The Reliability Challenge in Moral Epistemology. Oxford Studies in Metaethics 15:284-308.)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적 명제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논고》 6.42). 그러한 명제가 그림이 되는 사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윤리학은 말로 표현될 수 없다(《논고》 6.421)
(박병철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성교를 하는 진화론적 동기는 명백하다. 아이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동기는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아이에 대한 욕망이 끼어들지 않는다. 다른 종들도 마찬가지다. 교미를 할 때 쥐들에게 더 많은 쥐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친절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친절하다. 다른 이들에게 친절했던 조상들이 그렇지 않았던 조상들보다 더 오래 살고 번식도 더 많이 했기 때문이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사람들이 음식을 먹거나 성관계를 가질 때보다 타인을 도울 때 생존과 번식을 더 많이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진화는 우리 안에 특정인의 운명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불어넣고, 타인을 가엽게 여기고 배려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타적 인간이 되게 했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실제로는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이타주의자를 할퀴어 상처를 내라. 그러면 위선자의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마이클 기셀린)
프로이트(Freud)는 반동형성을 '이드' 충동의 공개적 표현과 이와 대립되는 '초자아'의 압력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정의했다. 즉, 무의식에 잠재된 이드 충동이 의식으로 표출되는 것에 불안을 느껴 초자아는 이드 충동과는 반대의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자아에게 명령한다. 예를 들어, 증오와 적의의 감정을 이드라고 하자. 이것은 무의식 속에 감춰져 있는 감정이기 때문에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 본능이다. 이 감정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보이는 것에 불안을 느낀 초자아는 도덕적 판단을 통해 증오의 반대감정인 사랑을 가지도록 자아에게 압력을 가한다. 그 결과 상대방에게 지나친 사랑의 감정을 표출하게 된다. 증오가 사랑으로 대치됐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공격적인 욕구는 사랑이라는 표면 아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동형성은 우리가 모르는 무의식 수준에서 ‘자신’이라는 유기체를 보전하기 위해 애쓰는 자기 방어 메커니즘이며, 자신의 욕구를 가려주는 가면이라 할 수 있다.
독일 병사들을 살해한 그 남자들은 사디스트도 사이코패스도 아니었다. 그들은 강한 도덕 감정에 자극을 받았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여기서 명심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객관적인 의미에서 선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동기’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애덤스의 말은 악이 선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악이 저질러진다는 뜻이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세상에는 도덕이 지나치게 많다. 자력구제를 통한 정의를 추구한답시고 저지른 모든 살인과 종교 전쟁과 혁명 전쟁의 사망자, 피해자 없는 범죄와 일탈 행위 때문에 처형된 사람, 이데올로기적 집단 살해의 피해자를 다 더하면, 틀림없이 도덕과 관계없는 포식과 정복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을 것이다.
(핑커 <Better Angels>)
두 사람이 동일한 테마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과정에서 A가 B의 생각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의 본성상 A는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내기 위해 우선 자기 생각을 점검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전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항상 자신이 옳아야 한다는 생각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존재이다.
(쇼펜하우어 <토론의 법칙>)
인간의 이기심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사람들은 예의나 겸손을 통해 자신의 이기심을 감추려고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면의 껍질을 뚫고 나와서 남들과 어울릴 때마다 작동을 시작한다.
(쇼펜하우어 <사랑은 없다>)
고착ANCHORING: 폭풍우 몰아치는 혼돈의 바다에서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공인되고 믿음직하며 침대 속처럼 편안하다는 느낌에 도취되도록 만드는 ‘진리들’, 즉 신, 도덕, 자연법, 국가, 가족에 고착하기로 공모한다.
(페테르 베셀 삽페의 방어기제, 토머스 리고티 <인간종의 음모> 중에서)
비인간 종의 멸종에 관하여 우려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멸종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그 삶이 중단되는 개별 동물들에 관하여 우려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멸종을 우려할 가장 강한 이유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한데도 말이다. 동물 멸종에 관한 대중적인 우려는 보통 인간들에 대한 우려이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삶의 부담이 더 클수록, 친구와 가족의 이익이 존재를 중지하는 자살의 이익을 복멸시키기에 충분한 도덕적 비중을 가질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가족 성원에게 극도의 고통과 수모(degradation)의 조건 하에서도 계속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 사람의 품위를 존중하지 못하는(indecent) 일일 것이다. 그러한 여건에서는, 설사 그녀가 계속 살아 있다고 해도, 그들에 대한 그녀의 의무 중 많은 것 또는 대부
분을 이행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비록 그들은 그녀가 죽으면 그녀의 존재를 그리워 할 테지만, 그녀의 삶의 조건은 그녀에게 지속된 존재를 요구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이 된다. 그러한 여건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끝내는 것이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계속 살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기적인 일이다.
(데이비드 베나타 <인간의 곤경>)
학문의 규범은 학문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유혈을 부르는 성취 능력이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내가 여기에서 비합리적인(도구적 합리성) 것이라고 의도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전체 사회의 목적을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존을 영위시켜 주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것으로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갖고 있는 사회의 설치를 통해서 전체 사회의 고유한 목적에 반대되는 것인 전체 사회 자체에 고유한 존재 이유와 전체 사회에 고유한 합리성을 대립시키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대립관계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비합리적인 것을 일단 보게 되면, 이른바 비합리적인 제도들 스스로 어떤 기능을 갖게 됩니다. […]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설치가 갖고 있는 비합리성이 수많은 모멘트들에서 ―내가 여기에서 의도하는 모멘트들은 시간적인 것들이 아니고, 수많은 관점에서 보이는 모멘트들입니다― 통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근대 사회는 인민(people)을 ‘두 개의 신체’로 구분한다. 즉 정치적 역량을 보장받는 주권적 인민과 이를 박탈당한 헐벗은 삶으로서의 인민. 그리고 전자의 후자에 대한 수직적 위계 설정과 지배를 확립함으로써 정치적 지배를 실행한다. 헐벗은 삶을 정치적 삶 바깥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동일한 정치
적 대상 안으로 포섭하면서 여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근대 국가의 인민은 특권적인 정치적 주체의 신체(통치하는 인민)와 헐벗은 삶의 신체(통치받는 인민)로 분리되며, 이 두 신체 사이의 갈등과 내전을 해결하는 것이 근대 정치의 목표가 된다. 근대 사회의 경우에도 주권의 기초는 본질적으로 계약이 아니라 추방령과 예외 상태의 산출에 있는 것이다.(조르주 아감벤)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유한 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줌으로써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사유재산과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묘한 약탈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온 인류를 영원한 노동과 예속 그리고 빈곤에 복종시켰던 것이다.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왜 범죄 피해자를 괴롭히는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실험을 소개하겠습니다. 1966년 미국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Lerner, 1929~)는 72명의 여성들을 모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별 이유도 없이 잔인하게 전기 고문을 받는 한 여성을 각각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한 그룹에는 고문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줬고, 다른 그룹에는 주지 않았죠. 시간이 흐른 후 러너 박사는 두 그룹에 각각 고문받던 여성에 대한 인상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선택권이 없었던 그룹의 사람들이 고문받던 여성의 외모나 성격을 훨씬 나쁘게 기억했다고 합니다. 즉, 피해자를 비난한 겁니다.
(https://m.sedaily.com/NewsViewAmp/1Z2NOXN58Y)
유학자들은 하늘과 땅이 ‘의도를 가지고故’ 인간을 낳았다고 하지만, 이 말은 허황된 것이다. 대체로 하늘과 땅이 기를 합할 때, 인간은 ‘우발적으로偶’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왕충 <논형>)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앎을 추구하려는 자는 더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장자 <양생주>)
미디어의 보도 방식은 또한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강화시켰다. 많은 뉴스가 테러리스트들의 배경, 종교, 문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청자들은 특정 집단 전체를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슬로빅이 말하는 ‘집단 휴리스틱’의 예다
(이동현 <폴 슬로빅의 심리학 위험지각이론 톺아보기>)
심리학에 “외집단 동질성 편향”[2] 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바로 자신이 속한 집단은 보다 복잡하고 이질적으로 생각하는 한편, 자신과 다른 집단은 동질적인 사람들일거라 가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가 “여자들은 다 똑같다”라고 가정을 해버린다거나 진보성향의 사람이 자신과 다른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은 모두 극단적 보수일거라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Allen과 Wilder의 1979년 연구[3]에 따르면 이러한 편향은 실험상황에서 집단이 분명한 기준 없이 무작위로 형성될 때도 발생한다. Brauer와 Er-rafiy의 2011년 연구[4]에 따르면 외집단 동질성 편향이 심한 사람일수록 고정관념이나 차별적 태도를 가질 성향이 커진다고 한다.
릴리아나 메이슨 존스홉킨스 대학 정치학 교수는 워싱턴포스트(WP)에 “정치 성향이 정책에 대한 선호도 차이를 넘어 정체성과 가치관을 규정하는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가족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가 개인의 정체성과 결합해, 가족 모임과 같은 사적 공간에서도 긴장의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https://m.news.nate.com/view/20251009n01661)
시스템 정당화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합의(즉, 현상 유지)를 방어하고 강화하며 정당화하려는 동기를 부여받습니다(상황적 및 성향적 요인에 따라 정도가 달라집니다). 시스템 정당화 동기는 다양한 방식(예: 고정관념, 이념, 귀속 측면)으로 나타나며, 암묵적(즉, 무의식적)으로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발생하고, 인식론적, 실존적, 관계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이론화됩니다.
(https://psycnet.apa.org/record/2011-21802-017)
따라서 광인이 광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광인이 질병으로 인해 정상상태의 가장자리 쪽으로 옮겨 졌기 때문이 아니라― 광인이 우리(유럽)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교사들은 학생들을 평가하면서 뛰어난 학생/성실한 학생, 우아한 행동/거친 행동과 같은 형용사를 동원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수식어에는 이미 귀족적 가치와 소부르주아 가치관이 대립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빈민층이나 노동자들의 세계관은 배제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학습 능력을 평가하는 교사들의 기준들이 대부분 효율성이나 합리성에 근거하며, 이것이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효율성이나 합리성의 이념을 은연중에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성민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취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혐오감,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한 공포감 또는 본능적인 짜증에 의해 촉발되는 불쾌감이다. ”취미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마라“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모든 취향이 자연(본성)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각 취향이 스스로를 자연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말 거의 그렇기 때문에 취향은 아비투스가 된다. 그리하여 다른 취향을 비자연적이며 따라서 타락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거부하게 된다. 미적 불관용은 가공할 만한 폭력성을 갖고 있다. 다른 생활양식에 대한 혐오감은 각 계급을 갈라놓고 있는 가장 강력한 장벽이라고 할 수 있다. 계급내의 동족결혼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대중은 탄원자보다는 지배자를 사랑하고, 자유를 부여받기보다는 어떤 적대자도 용서하지 않는 교리 쪽에 훨씬 더 만족을 느낀다. 대중은 수시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쉽사리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대중은 잘못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에 대한 정신적 폭행의 파렴치함도, 자기들의 인간적 자유에 대한 악랄한 억압도 깨닫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성향의 사람은 관대하고 동정심이 있다. 순수함을 추구하는 성향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성 요한 클리마쿠스)
자기기만은 내가 나를 속이는 거죠. 말은 헷갈리게 들리지만, 이런 겁니다. 우리 안에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이 있다면, 의식적인 마음이 모르도록 현실을 애써 담아두려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진실된 정보는 무의식적 마음에 저장되고 거짓이 의식적인 마음에 저장되죠. 같은 사건을 접해도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보를 선택해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는 타인을 기만하는 데도 들통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하고요. 이 주제에 대해 책을 쓰기까지 저는 40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로버트 트리버스 https://www.khan.co.kr/article/201506152131255/amp)
(자기의) 행동을 유발하는 모듈과 (타인들에게) 도덕적인 규칙에 동의하라고 촉구하는 모듈은 서로 다르다. 비난과 양심이 제각기 다른 모듈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종종 상충된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이런 것을 모두 규합해 보면 인간 마음의 모듈 설계가 위선을 보장한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로버트 커즈번)
법적으로 관련이 없는 상황적 결정 요인(이 경우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유사한 법적 특성을 가진 사건에서 판사가 다르게 판결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법이 불확실하다는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https://www.pnas.org/doi/10.1073/pnas.1018033108)
인간의 뇌는 범법자나 배신자 등 누가 봐도 비난받아 마땅한 대상을 찾아 벌하는 데 쾌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져 있다. 타인에게 ‘정의의 철퇴’를 가하면 뇌의 쾌락중추가 자극을 받아 쾌락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 쾌락에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며, 항상 벌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타인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상태를 정의에 취해버린 중독 상태, 이른바 ‘정의 중독’이라 부른다. 인지 구조가 의존증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카노 노부코 <정의 중독>)
종교적 계시 외에는 아무것도 기댈 곳이 없는 연약한 인간은 자연스럽게 신의 계시적 진리에만 의지하면서 터무니없게도 아무 상관도 없는 곳에까지 그 진리를 적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러나 오명은 법이나 이성으로 규제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들의 평판에 좌우되는 감정이다. 따라서 고문은 희생자에게 오명만 더할 뿐 그의 오명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베카리아 <범죄와 혐벌>)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고 당위를 주장하는 사람의 삶이 도덕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은, 개인적인 불완전함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오류는 관심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공공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즐기고 그들을 낙인찍고 배제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낀다.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도덕성이란 우리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고자告子는 ‘성무선무불선론性無善無不善論’을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本性이란 선善도 아니고 불선不善도 아니라는 얘기다. 즉,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모두 정신적 판단에서 나오는 상대적인 가치이므로,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하고 논쟁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견해이다. 그는 ‘식색성야食色性也’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오직 식욕과 성욕이라는 것이다. 정신적 윤리나 도덕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마광수 <마광수의 뇌구조>)
텔레비전으로 <수능 국어> 방송 강의를 보니까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의 주제가
‘조국 광복에의 염원’이라고 가르치더군
나는 참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했지
나의 침실로」나
내가 쓴 시 「가자, 장미여관으로」나
주제는 둘 다 똑같아
호텔 방 예약해 뒀으니
그리로 가서 신나게 섹스하자는 얘기야
다시 「나의 침실로」를 꼼꼼하게 읽어봐
내 말이 틀리다고는 못할 걸
(마광수 <우리나라 국어 교육은 엉터리>)
사드는 극단적인 형태로 욕망이 윤리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칸트 윤리학의 숨은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덕의 위기에 대응하려는 칸트의 시도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는 것이다. 라캉의 말대로 사드는 칸트 윤리의 '장애물' 또는 '실패'로 나타난다.(79)정신분석은 욕망의 윤리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면서도 사드라는 도착(perversion)의 함정을 피하는 길을 모색한다.
(김용수 <자크 라캉>)
어떤 대상이 두려운 이유, 누군가가 좋거나 혹은 싫은 이유, 뭔가를 하고 싶거나 혹은 하기 싫은 이유, 우리가 각자 의식적으로 열심히 생각하는 그 이유의 이면에는 과거 경험에 의해 구축된 단순한 뇌의 작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유 아닌 이유로 작화를 계속하게 되면 거짓된 믿음이 공고화돼 스스로를 기만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https://www.munhwa.com/article/11207794)
약자의 화폐위조, 자기기만의 목적은 약자인 자신이 선하다고 말함으로써 강자인 타자를 악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하지만 그러므로 충고하건데 친구들이여, 남을 벌하려는 충동이 강한 자들 모두를 경계하라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제목: 성공이라는 허상
햇빛을 가리니 좀 비켜주시오.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심리학자 Festinger의 사회적 비교이론 (social comparis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능력이나 의견 등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객관적인 지표가 없을 때는 비교를 통해 주관적인 평가를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즉 비교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5925)
사람들은 보통 실패나 잘못을 했을 경우 그 탓을 외부로 돌리고, 칭찬받을 일을 했을 경우에는 자신이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실패하면 운이 없었던 것(외적귀인) 이고, 타인이 실패하면 실력이 없기 때문(내적 귀인) 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성공하면 내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고(내적귀인), 타인이 성공하면 운이 좋아서(외적 귀인) 라고 외부에 원인을 돌린다.
가느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구부러져 있어서 들보나 서까래로 만들 수 없고, 그 거대한 뿌리를 내려다보니 속이 푸석푸석해서 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잎사귀들을 혀로 핥으면 입안이 헐어 상처가 생기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람들을 사흘 동안이나 미쳐 날뛰게 할 것 같았다.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재목이 아닌 나무여서 이렇게 거대한 나무로 자랐구나. 아! 신인(神人)도 그래서 재목이 아니었던 거구나!”
-장자 <인간세>-
우리는 12세가 12세에 적합한 규준으로 A를 받는다는 이유로 그 아이가 저명한 대학 물리학 교수 자리를 제의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험에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의 삶이 인간의 규준에서 잘되어 간다는 이유로 그 삶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 으로 잘되어 간다고 자주 생각한다.
자기 삶이 얼마나 잘되어 가는지에 관한 개인의 판단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삶이 그 자체로 얼마나 달되어 가는지보다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얼마나 잘되어가는지다.
적응과 비교는 낙천주의적 기준선으로부터 작용하게 되며 낙천주의 편향의 영향 하에 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보다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하고 자신을 비교하기가 더 쉽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이 방법을 따르면 최고의 대학에 갈 수 있다거나 시험에 통과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이는 확률에 관한 착각을 이용한 혹세무민이다. 자기 계발서가 정직하게 약속할 수 있는 최대한은 이것이다. ‘나에게 쓸모 있었고 근거가 있는 방법을 공유하니, 이 방법들을 활용하면 예전보다는 좀 더 효율적이고 쉽게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도하는 자기 계발서들은 ‘구성의 오류’를 모른다. 한 사람이 어떤 방법을 써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같은 방법을 써서 동일한 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보통은 그 반대이다. 목표로 삼은 성공이 본질적으로 희소한 것일 때, 사람들이 다 같이 최선의 전략을 쓰더라도 소수만이 성공의 달콤함을 맛볼 뿐이다. 예를 들어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확실한 방법을 여러 수험생들이 어김없이 따라한다면? 합격자의 수는 정해져 있다. 자기 계발 분야의 베스트셀러는 이 점을 말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착각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민열 <삶은 왜 의미 있는가>-
우선 예술작품에 대한 개인들의 취향이 구성되는 과정을 살펴보자(아래의 내용들은 「구별짓기」 1장을 참조할 것).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미술품이나 사진에 대한 독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코드와 암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한 사회의 지배문화가 피지배문화를 압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이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와 같은 미술품에 담긴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따라서 미술관에서 이러한 추상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통해서 전수되는 문화적 코드교육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학교를 통해서 일반인들에게 전달되는 미학교육 속에는 일정하게 틀 지워진 세계관이 암묵적으로 전제되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사회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계급의 취향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주말의 여가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영화를 보러가는 계층으로부터 미술관에 가는 계층 사이에는 일정한 계급적 분류효과가 작동한다고 보아야 한다.
-홍성민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 사회>-
여러분은 최고의 권력을 얻고 높은 명성을 얻은 사람들도 자신이 가진 부보다 여유로운 삶을 갈망하고 꿈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그들은 별다른 위험만 없다면 아찔한 정상에서 내려오고 싶어한다. 행운이란 외부의 공격을 받거나 충격으로 흔들리지 않더라도 그 자체의 무게만으로 스스로 무너져 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네카 <세네카의 인생론>-
우리는 내면 탐색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모든 성공보다 실패를 우위에 둔다. 실패를 추구하기까지 하고, 그 실패 때문에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실패는 언제나 본질적인 것이므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드러내 보여주며, 신이 우리를 보듯이 자신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공은 우리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있는 보다 내밀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에밀 시오랑 <태어났음의 불편함>-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지 <동심설>)
쾌락은 따라서 도덕적 선(善)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라캉은 의도적으로 도덕적 선을 영어 'the good'으로 제시한다. 영어에서 '굿'은 도덕적인 '착함'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맥락에서의 '상품'을 의미한다. 쾌락은 도덕적인 선에서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으로 그 뜻이 확장된다.(72)쾌락원칙은 희열을 회피함으로써 도덕공동체의 법을 준수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물질적인 쾌적함에 안주하는 성향을 띤다. 자본주의 너머는 쾌락 너머의 희열처럼 현실의 편안함을 파괴하는 위험한 대상일 뿐이다. 반면 자본주의 내부의 물질적 쾌락은 그 편리한 풍요로움으로 편안과 안락을 약속한다. 쾌락원칙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지배질서의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보수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쾌락원칙을 넘어서려는 충동이 주체 속에 지울 수 없는 욕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희열의 금지는 금지를 위반하려는 욕망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쾌락에 안주하지 않고 희열을 만끽하려는 충동이 만족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지속된다. 만족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해로운 결과가 나타나고 심각한 장애가 발생'할 정도로 이 욕망은 집요하고 절실하다.
-김용수 <자크 라캉>-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이나 여희는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버린다네. 이 넷 중 어느 쪽이 ‘올바른 아름다움’을 안다고 하겠는가?
-장자 <제물론>-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미국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의 이 사고실험은 의식을 다루는 연구에서 두루 인용됩니다. 의식이 주관적인 경험이라면, 박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박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28580.html#ace04ou)
우리는 우리의 가치와 의미를 ‘객관적 진리’라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에서 찾는 나타남의 형태를 수용해야 합니다. 이 진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한 맹세이자 충실성으로서의 진리를 말합니다.
-마이클 마더 <식물의 사유>-
제목: 행복은 사기다
스테디셀러 '도덕적 동물'로 유명한 라이트는 자연선택은 인간의 뇌를 노예상태에 빠지게 했다고 주장한다. 즉,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자연선택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의 뇌를 맹목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
자연선택은 먹고 마시고 생식을 하는 모든 과정에 '쾌락'이라는 감정을 집어 넣었다. 하지만 이 쾌락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한 번 느낀 쾌락이 지속된다면 누가 다시 종족번식에 나서겠는가. 영원한 만족이 없으므로 인간은 늘 번민하고 방황하고 욕망에 시달린다.
(https://m.mk.co.kr/amp/8666559)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건 불행한 일이야. 살아있는 동안 불행은 지속되고 죽음만이 그걸 그치게 할 수 있어, 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다.
-쇼펜하우어-
우리는 몸 전체가 건강한 건 느끼지 못하지만, 구두가 발을 꽉 조이는 그 작은 고통 하나는 즉각적으로 느낀다.
-쇼펜하우어-
(https://www.goodreads.com/quotes/7235753-just-as-a-brook-forms-no-eddy-so-long-as)
나쁜 사건이 좋은 사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상적인 사건, 주요 생활 사건(예: 트라우마), 친밀한 관계 결과, 소셜 네트워크 패턴, 대인 관계, 학습 과정에서 발견됩니다. 나쁜 감정, 나쁜 부모, 나쁜 피드백은 좋은 정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며, 나쁜 정보는 좋은 정보보다 더 철저하게 처리됩니다. 자아는 좋은 자아를 추구하기보다는 나쁜 자아 정의를 피하려는 동기가 더 큽니다.
(https://psycnet.apa.org/record/2018-70020-001)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확신하는 것이며 고통에 관해 듣는 것은 의심하는 것이다.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신경과학자 켄트 베리지가 횐 쥐 30마리를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이 모두의 예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베리지 연구팀은 쥐의 도파민 신경세포를 손상시킨 뒤 그들이 생활하는 상자 안에 산더미 같은 음식과 넉넉한 물을 넣어줬습니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에 그들은 먹거나 마시지 않았죠. 결국 쥐들은 굶어 죽기 시작했고, 그는 쥐를 살리기 위해 목구멍으로 연유를 넣어줍니다. 그때 베리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데요. 그가 연유를 먹이는 동안 쥐들이 자기 입을 핥기 시작한 것입니다. 분명하게 음식을 즐기고 있었죠. 그럼에도 더 먹기 위해 음식으로 다가가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원함과 좋아함은 다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만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좇는 것이 행복과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https://www.newspenguin.com/news/articleViewAmp.html?idxno=14789)
일단 삶이(나쁨의 양과 분포를 모두 고려했을 때) 나쁨의 일정한 한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좋음의 양이 얼마나 되건 그것을 능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양의 좋음도 한계점을 넘어선 나쁨을 치를 만큼 가치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사건의 경우 자신의 확률이 평균보다 훨씬 높고 부정적인 사건의 경우 평균보다 낮다고 평가했습니다.
(https://psycnet.apa.org/record/1981-28087-001)
부정적인 경험보다는 긍정적인 경험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폴리아나 원칙) 예를 들어 그들의 삶 전반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해 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여러 연구에서 피실험자들은 부정적인 경험보다 훨씬 많은 수의 긍정적인 경험을 열거하였다. 이 선택적인 기억은 우리의 삶이 이때까지 얼마나 잘되어 왔는지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왜곡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한 평가만이 편향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상이나 기대도 편향되어 있다. 우리는 사태가 얼마나 좋을 것인가에 관하여 과장된 견해를 갖는 경향이 있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주체의 삶이 얼마나 좋게 또는 나쁘게 느껴지는지가 명백히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 실제 질에 관계없이 말이다. 만일 그것이 지속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명백히도 죽음을 선호할 만큼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설사 객관적으로는 죽는 게 더 낫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특정한 자살들을 존중하기 꺼리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의 삶의 질을 과
소평가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위 경우와 비슷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지각은 그러지 않았을 경우보다 그들의 삶을 더 못하게 만든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삶이 지속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들의 삶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 죽음을 선호할 정도가 된 것이다. 비록 그들의 지각이 오류일지라도 그래서 이런 면에서는 비합리적일지라도, 죽음에 대한 그들의 선호는 다른 면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다-그들의 삶이 얼마나 부담스럽게 느껴지는지를 감안할 때, 죽음은 그들에게 최선일 수도 있다.
-데이비드 베나타 <인간의 곤경> 중-
우울한 현실주의(depressive realism)를 처음으로 개념화한 사람은 알로이(L. B. Alloy)와 아브람슨(L. J. Abramson)이 1979년 논문을 통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결과 우울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통제력을 현실적으로 평가한 반면,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통제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
(단, 우울증의 정도에 따라 다를 수 있음 주의. https://pubmed.ncbi.nlm.nih.gov/21390922/ 에 따르면 경미한 정도를 넘어선 우울증은 오히려 인지 왜곡(aaron beck)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1934~2024)은 수면을 하지 않고 대장 내시경을 받을 때 환자가 60초마다 고통의 정도를 말하게 했다. 환자 A는 8분 동안 내시경이 진행되었고 환자 B는 24분 동안 진행됐다. 환자 A는 8분만에 끝났지만 끝나기 직전 고통의 정도가 8에 있었다(0은 ‘고통이 전혀 없음’, 10은 ‘고통스러워 참을 수 없음’이다). 반면에 환자 B는 10분 쯤에 8의 고통을 느끼기도 했으나 끝나는 24분에는 1 정도의 고통을 느꼈다. B의 대장 내시경 시간이 A의 3배 수준이다 보니 B의 고통 총량은 A보다 훨씬 많았다. A와 B 중 누가 더 고통스러웠다고 기억할까?
예상과 달리 답은 A이다. 실험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고통에 대한 기억은 대장 내시경 중 최악으로 고통스러웠던 순간과 마지막 고통 수준을 합한 평균으로 결정된다. 최악의 고통은 A, B 모두 8이고 마지막 순간의 고통은 각각 7과 1이니 평균을 내면 A와 B는 각각 7.5와 4.5가 되어 A가 B에 비해 대장 내시경에 대해 나쁜 기억을 품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고통의 기억에 지속 시간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장 내시경이 고통스러운 순간에 끝나게 된 게 A에게는 불운이었던 셈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21/0008261065?sid=110)
쾌락적 러닝머신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행복 수준이 크게 변동하지 않는 비교적 안정적인 생명체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나쁜 일이 발생한 후에도 상당히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어떤 사건이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줄 때 그 행복의 급증은 잠시 동안만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https://thedecisionlab.com/reference-guide/psychology/hedonic-treadmill)
노르웨이 오슬로대 심리학과의 시리 레크네스 박사는 예상한 것보다 고통의 강도가 덜할 때는 뇌가 고통을 실제보다 덜 느끼며, 심지어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3/04/2013030402857.html)
도파민은 보상(reward)을 받는 것보다 보상을 기대하는(predict) 정도에 따라 더 반응한다고 알려져 있다(보상예측오류, reward prediction error). 예상하지 않았던 보상 혹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보상을 받았을 경우 도파민은 활발하게 생성(activation)되지만 기대했던 보상이 없거나 또는 예상보다 더 적은 보상에는 도파민 생성이 평소보다 낮아지는 억제(inhibiting) 현상을 보인다.
나는 열 살 미만 어린이 중에서 집에서 고문을 당하고도(뼈가 부러지고 피부에 화상을 입은 흔적으로 학대 사실을 보여 준 아이들), 가족들과 함께 사는 쪽과 보육 시설에서 사는 쪽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할 때 후자를 택한 아이를 단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 물론 가해자에게 더 들러붙는 경향이 아동기에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인질로 잡혔던 사람들 중에는 가해자가 풀려날 수 있도록 보석 보증인을 자처하거나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 가해자와 성관계를 맺기도 한다. 가정 폭력 희생자들도 학대를 가한 사람을 감싸는 경우가 많다. 판사들은 가정 폭력을 당한 피해자를 보호하려고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더니 나중에 그 피해자가 몰래 가해자인 파트너를 다시 집에 들인 걸 알고 민망했던 적이 얼마나 많은지 내게 종종 이야기한다.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개인의 객관적인 복지가 더 못하게 변하면, 처음에는 상당한 주관적인 불만족이 생긴다. 그러나 이후에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자신의 기대를 그에 따라 조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데이비드 베나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우리의 기억은 처음의 모습 그대로 뇌에 저장되지 않으며, 완벽하게 보존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건의 핵심적인 것만 선택적으로 기억하며, 그것 마저도 자신의 태도와 기대에 맞추어 변형한다. 따라서 우리가 “철석같이” 사실이라고 믿는 기억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과거 어린 시절의 기억일수록 더욱 그렇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https://intro.assist.ac.kr/news/articleView.html?idxno=1004)
죽음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삶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는 주제에.
-조지 고든 바이런-
제목: 기만 위의 인생
사람을 찾고 있소
-디오게네스(대낮에 횃불 들고)-
인생이 진지하다는 증거는 털끝만큼도 없다
-브렌단 길-
우리는 진보라는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을 만한 가치는 없다. 인생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인생에는 하나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우스꽝스럽지 않은 인생의 의미라는 게 하나라도 있던가?
-에밀 시오랑 <태어났음의 불편함>-
학생 신분이 끝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더라도 부모에 의존하는 생활을 과감하게 떨치고 미련없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가족회의도 필요 없다.
어디까지나 스스로 결심하고, 스스로 길을 결정하고, 자신의 의지로 집을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식의 의무이며,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모든 가치에 대한 믿음을 버려야 평화롭다.
-피론-
자신을 꾸짖기보단 자기연민을 실천해야 한다. 자기연민은 자신의 실수를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이고 실망하고 당황한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돌보는 신중한 노력이다. 관련 연구를 처음 시작한 크리스틴 네프 텍사스대 교육심리학 부교수는 "우리 대부분은 인생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좋은 친구를 갖고 있다"며 "자기연민이란, 스스로에게 따뜻하고 힘이 되는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https://www.bbc.com/korean/features-60255122.amp)
푸코는 자기 배려의 기술로서 자기에 대한 몰입, 자기 통제, 의식 점검, 경청, 독서, 글쓰기, 명상과 같은 삶의 테크놀로지를 강조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자기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으로, 자기 혁신이다. 그래서 자기 배려는 삶을 예술적으로 만들어가는 기술로써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파농은 서구의 모조품으로서 민족주의, 타자를 배제하는 민족주의가 아닌 윤리적 상호 인정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전망을 가진 민족주의를 옹호한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인종, 민족, 문화의 경계들을 초월하여 타자의 구체적 삶과 고통에 공감하는 관점을 포함한다. 파농이 제시하는 민족주의와 민족의식은 보다 ‘보편적인’ 방향을 지향한다.
80)보편적인 것에 대한 파농의 관점은 앞서 식민 상황에서 흑인과 백인이 상호적 인정을 통해 양자의 진정한 인간으로의 변형을 촉구하는 주장에서부터 이미 내포되어 있다. 파농은 모든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 해방을 모색하는 관점,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인간을 강조한다. 물론 추상적인 정체성의 관점보다 실천하고, 성찰하는 관점에서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