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즘, 단상
• 주제가 약간 민감할수도 있으니 주의바랍니다.•
*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 규율의 측면에서 사회 규율이 강하면 운명적 자살이 발생하고 사회 규율이 약하면 아노미적 자살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아노미란 규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욕망이 규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종의 무규율 상태를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아노미적 자살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운명적 자살에 더 공감이 갔다. 푸코의 말처럼 규율과 권력은 오늘날 더 정교화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규율권력은 겉으로는 옛날보다 자유로운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미시적으로 곳곳에 퍼져있다. 권력이 원하는대로, 내가 아닌 권력에게 쓸모있는 방식으로 개인의 자아가 형성되며 관찰, 시험, 평가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성과, 행동, 시간, 신체가 규범에 맞추도록 휸육된다(학교, 군대, 직장 등등). 이때 많은 사람들이 나는 더 쓸모있어야 하고 나는 더 완벽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지속적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강박은 문제해결은 커녕 만성적인 반추와 우울만 부추길 뿐이다. 고대 철학자 장자는 거목이 쓸모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들에게 잘리지 않고 거대하게 자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말했던 쓸모없음의 쓸모는 오늘날 더 이루어지기 힘들어 보인다. 오늘날 생체권력은 삶의 질이 아닌 삶의 효율로 가치판단을 밀어넣기 때문이다.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죽음충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다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려는 쾌락원칙이 있는데 그 쾌락원칙이 법이나 사회적 제도에 의해서 한계에 부딪혔을때 인간은 그 한계 너머에 있는 금지된 것을 향유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향유하는 순간 사회적,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향유하려는 자기파괴적인 충동을 죽음 충동이라고 한다. 라캉이 말한건 사회적, 상징적 맥락으로서의 죽음 충동이었지만 나는 실제 물리적 자살 역시 이 개념에 포함된다고 본다. 자살은 모든 국가,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것이지만 자살자들은 오히려 그 자살이라는 금기 속에서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으려고 한다. 자살은 구원도 해방도 아니며 그곳엔 아무것도 없을거라는걸 이성으로는 알지만 무의식은 자꾸 그 금지 속에 향유할 무언가가 있을거라는 착각을 품게 만든다.
* 안락사는 육체의 고통만 덜어줄 뿐이지 정신의 고통은 전혀 해결해주지 못한다. 육체의 고통은 먼저 죽일 수 있지만 정신의 고통은 죽을 때까지 죽은 게 아니다. 죽음이 수면이라면 삶은 난치성 불면증이다.
* 슈나이드먼 박사의 말에 따르면 자살자는 죽고 싶다는 마음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뒤섞여있다. 자살은 그 자체로 엄청난 체력과 적극적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쉽지 않을것이다.
* 태어남부터가 일종의 파멸이었다는 에밀 시오랑의 말에 동감한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더 이상 생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 태어남이 불편한 이유는 수십년 넘게 고통받는 삶의 출발점이 겨우 정자와 난자라는 단기간의 우발성(왕충)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 데이비드 베나타 교수는 그의 책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2006)>에서 아주 단순하고도 정확한 명제를 제시한다.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고 고통의 부재는 무조건 좋다는 명제다. 맞는 말이다. 쾌락이 존재하면 좋겠지만 없다고 해서 인간이 무너지지는 않는다.그러나 고통의 존재는 인간의 삶을 완전히 파괴할수도 있다. 쾌락은 순간적이지만 고통은 압도적이며 삶에 있어서 쾌락보다 고통이 더 본질적이다. 생에의 맹목적 의지로 가득찬 인간의 육체는 고통을 겪는 순간 그게 아무리 작은 수준의 통증이더라도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그 고통을 더욱 과장하고 증폭시킨다. 정신 역시 그 통증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 다른 쾌락마저 상쇄시키거나 아예 도외시해버린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 진정한 행복은 고통을 최소화한 상태다.
* 숙고가 문제해결에 도움된다는 말은 건강한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소리다. 우울할땐 숙고고 뭐고 우울만 악화시키므로 다 집어치우는 편이 낫다. <조성연, 조한익(2021)> 연구논문이 말해주듯.
*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에 따르면 성찰성이란 과거의 삶을 돌아 보고 미래의 삶을 그림으로써 남아 있는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성찰성은 자살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며 양날의 검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에 따르면 일부 자살자들은 자신의 과거의 삶과 죽음의 결과에 대한 수많은 숙고와 고민 끝에 자살을 선택한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숙고는 올바른 판단을 위한 것이 아닌 그들의 왜곡된 인지로 인한 현실에 대한 과장된 해석일 수 있다.
* 백세시대 담론은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다. 세네카가 말했듯 중요한건 삶의 길이(수명)가 아니라 삶의 질이다.
* 완벽주의자일수록 삶은 더 허무주의같다.
* 태어난것부터가 내가 원해서 태어난게 아니었으니 세상 모든 걸 내 탓이라고만 보는 자기비난도 잠시 줄이고 자기자비(크리스틴 네프)를 하는것이 좋겠다.
*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은 공허하다. 예술은 행복이지 고통이 아니다. 창작도 감상도 모두.
* 삶부터가 이미 고통인데 예술마저 고통이어야 할 이유가 뭔가? 예술은 고통을 줄이거나 잠시 잊게 할 수단일 뿐이다.
* 예술은 신성하지 않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몰락 이후로 예술은 오히려 접근성과 유희의 매체가 되었다.
* 예술을 신성하다고 보는 관점이 아직도 남아있는 이유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취향의 위계화 때문이다.
* 영화는 어떠한 사유를 제시하기 이전에 인간의 행위와 행동을 포착하는 현상학적 매체(메를로 퐁티)다.
*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는 분명 인간을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살게 만든다. 그 의미가 희망일지 집착일지는 모르겠으나.
* 스토아 학파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고 했다. 자극적인 뉴스, 과도한 SNS 사용은 내 우울만 더 악화시킬 뿐이다. 우울할땐 다 내려놓고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했던 내면의 평온(아타락시아)에 집중하는게 좋을 것 같다.
*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진심으로 관심 가져본 철학자는 고자 밖에 없다. 맹자도 순자도 홉스도 정치에만 관심 있었을 뿐이다.
* 불교의 해탈,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장자의 무위자연 이 셋이 100퍼센트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는 상태는 태어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미 태어난 이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흔치 않은 해방감을 준다는 점에서 이 철학들은 유효하다.
* 이성을 인간적이라고 신봉하던 권력이 원시적인 동물성에 기인하는 출산은 오히려 찬양하고 심지어는 독려까지 해주는 이중성을 보인다. 짐승도 곤충도 할 줄 아는 출산을.
* 배고프니까 돼지인거고 배부르니까 소크라테스인거다.
* 페테르 베셀 삽페는 인간의 의식이 과잉진화 했다고 말한다.인간은 신경 하나하나 세포 하나하나가 생존을 위해 짜여져있으며 육체 전체가 생에의 맹목적 의지(쇼펜하우어)로 가득차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이보다 더 지나치게 진화해 끝내 육체를 뚫고 왜 생존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생존을 위해 진화된 의식은 곧 생존을 의심할수도 있게 진화했다.
* 인간은 인간이 아니길 바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 된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별 생각없이 사는 짐승들하고는 다르게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 아닐수도 있었다는 가능성까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이 의식은 특권이자 감옥이다.
* 의식은 우주보다 넓은데 육체는 감옥보다 좁다.
* 의식은 자신의 한계를 더욱 선명하게 보도록 만들고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끊임없이 낳는다.
*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식물로 사는 게 낫다.
* 공부는 노력이 아니라 재능이다. 사람마다 신경 시스템이 다른데 재능인게 당연한거다.
* 학교 성적표는 인간이 유동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기 위한 발악일 뿐이다. 성인이 되기도 전의 기록을 박제시키고 죽을때까지 우려먹는다.
* 생활기록부는 현대판 판옵티콘이다.
* 인간은 본래 유동적인 존재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으며 담글 수 있는게 이상한거다. 불교의 무아 역시 고정불변하는 실체를 부인한다.
* 개체들을 자본가/노동자로만 환원하는 전체주의적 논리 속에서 제도적 틀에 따르지 않는 타자(가라타니 고진)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지주의적 언어는 “나는 우선 느낀다, 그리고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본다.
* 감각이 사유보다 앞서며 더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존재의 조건이다.
* 묵자는 모두를 차별없이 평등하게 사랑하자는 겸애를 주장했으나 사회는 그 사랑이라는 감정마저 이성애와 동성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나눈다.
* 푸코가 말했듯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누가 더 다수냐 누가 더 권력이 있느냐 시대적 조건이 어떠냐에 따라서 정상이 비정상이 될 수도 있고 비정상이 정상이 될 수도 있다.
* 장자가 말했듯 시비를 따지려는 마음은 불행하다. 사람을 정상/비정상으로 나누려는 것은 마음이 빈곤하다는 증거이다.
* 난해한 글은 심오한 글이 아니라 못 쓴 글이다. 독자의 신경적 다양성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 공허한 배제의 글일 뿐이다.
* 이데아라는 단어만큼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단어가 없다.
* 내가 언젠가 죽을 거라는걸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견딜 수 있다.
* 넓고 얕게 사귀는것보다 좁고 깊게 사귀는 편이 낫다.
* 타인을 소유하지도 타인에게 소유 당하지도 않을 때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 사색도 숙고도 걱정도 굳이 해야한다면 쨍쨍한 아침에 일어나 개운할때 하는 게 제일 좋다. 야심한 새벽에 불면증을 겪으며 떠올리는 생각들은 사실을 더 부정적으로 왜곡하고 혼란스럽게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군주에게 모든 걸 맡기는 사회는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 장년 신채호가 말했듯 개인들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게 중요하다.
* 나를 비웃는 사람들은 나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비웃기만 할 뿐 나에게 어떠한 금전적, 물질적, 정서적 지원도 해주지 않는다. 즉, 내 인생의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그냥 구경꾼에 불과하다.
* 염세주의 철학을 찾는 이유는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조금이라도 덜 외로움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 도덕이 보편적 법칙(칸트)인 것이던 역사적 산물(니체)인 것이던 결국 중요한건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 이다.
* 자기배려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자신을 더 잘 돌보기 위해선 타자와의 관계 또한 당연히 중요하다.
* 진정한 윤리는 욕망을 부정하는것이 아니라 욕망을 적절히 관리하는것으로부터 나온다.
*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했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인간에게 자유라는게 정말로 존재할까? 내가 태어난것부터가 내 선택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푸코가 말했던거처럼 그 자유마저 권력과 담론의 산물은 아닐까?
참고문헌
조성연, & 조한익, (2021), 대학생의 반추 하위유형인 자책 및 숙고, 긍정․부정 과거지향 사고 그리고 우울의 관계, 449-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