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고통과 그것을 유발하는 과잉규율

by 김명준


반추에 대해서


“때로 우리의 정신을 다른 취향, 다른 걱정, 다른 일로 돌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하듯 주변 환경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반추란 어떤 일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하거나 음미하는걸 의미한다.


<Watkins와 Teasdale(2001)>에 따르면 반추는 자기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긍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어떠한 문제에 대해 사고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왜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더 나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반추는 반추방식에 따라 양날의 검과 같은 속성을 지닐 수 있는데


많은 연구에서 과도한 반추가 우울의 발현과 지속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인것으로 확인됐다.


반추가 장기화되고 만성적이게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문제해결이 아닌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우울감만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martin와 tesser(1989)>


에픽테토스가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라고 말했던 것 처럼


고통을 느끼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고통을 끊임없이 해부하는 과정은 더 큰 공허로만 이어질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근대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색도 걱정도 반추도 모두 아침에 할 것을 제안한다.


반추를 아예 하지 말자는 의미가 아니라 그 반추도 ‘언제 할 것’ 인지 우리가 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쇼펜하우어는 아침에 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말한다.


야심한 새벽에 불면증을 겪으며 떠올리는 생각들은 사실을 더 부정적으로 왜곡하고 혼란스럽게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이 내게 굉장한 공감이 되었는데 나 역시 밤이 되면 생각의 감옥 속으로 갇혀버릴때가 많았었다.


반면 잠에서 깨어나 개운함을 느끼며 쨍쨍한 아침햇살을 맞을때는 나쁜것도 덜 나쁘게 느껴지고 삶이 좀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철학적 사고에 대해서


<조성연, 조한익(2021)> 논문에 따르면 반추는 두 가지 하위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수동적이고 해로운 자책(brooding)이고 또다른 하나는 적극적이고 분석적인 숙고(reflection)다.


자책과 숙고가 둘 다 높을때 우울수준은 제일 높아진다.


자책은 낮고 숙고만 높을땐 우울수준이 낮으나 자책이 높은데 숙고까지 같이 높아버리면 우울수준도 제일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 논문도 나에게 상당한 공감을 주었는데 나 역시 우울할때 에밀 시오랑 같은 염세주의 철학자들의 글을 읽는 것이 오히려 우울을 더 악화시키는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했다가 결국 죽는게 더 낫다는 결론에 도달해버린 필립 마인랜더의 사례처럼


철학적인 숙고도 현재 마음상태에 따라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기 때문에 약간의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과거에 대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반추, 후회, 자책을 한다.


나는 가끔씩 인생 자체가 흑역사의 연속인거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과거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들이다.


스토아학파는 불필요한 감정의 부재를 뜻하는 아파테이아를 강조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사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의 실수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이러한 어찌저찌 할 수 없는 상황을 한계상황이라 불렀는데


그는 이 한계상황이 오히려 자기자신과 대면하고 진정한 도덕적 자아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라고 봤다.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순 없지만 지금 내 내면은 바꿀 수 있다.


자기비난보다는 자기자비(크리스틴 네프)를 통해 이해하고


지금부터라도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와 보이지 않는 과잉규율에 대해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 규율의 측면에서 사회 규율이 강하면 운명적 자살이 발생하고 사회 규율이 약하면 아노미적 자살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아노미란 규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욕망이 규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종의 무규율 상태를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아노미적 자살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운명적 자살에 더 공감이 갔다.

푸코의 말처럼 규율과 권력은 오늘날 더 정교화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규율권력은 겉으로는 옛날보다 자유로운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미시적으로 곳곳에 퍼져있다.


권력이 원하는대로, 내가 아닌 권력에게 쓸모있는 방식으로 개인의 자아가 형성되며 관찰, 시험, 평가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성과, 행동, 시간, 신체가 규범에 맞추도록 휸육된다(학교, 군대, 직장 등등).


이때 많은 사람들이 나는 더 쓸모있어야 하고 나는 더 완벽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지속적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강박은 문제해결은 커녕 만성적인 반추와 우울만 부추길 뿐이다.


고대 철학자 장자는 거목이 쓸모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들에게 잘리지 않고 거대하게 자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말했던 쓸모없음의 쓸모는 오늘날 더 이루어지기 힘들어 보인다.


오늘날 생체권력은 삶의 질이 아닌 삶의 효율로 가치판단을 밀어넣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Watkins, E., & Teasdale, J. D. (2001). Rumination and overgeneral memory in depression: Effects of self-focus and analytic thinking.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110, 353-357.


Martin, L. L., & Tesser, A. (1989). Toward a motivational and structural theory of ruminative thought. In J. S. Uleman & J. A. Bargh (Eds.), Unintended thought (pp. 306–326).


조성연, & 조한익, (2021), 대학생의 반추 하위유형인 자책 및 숙고, 긍정․부정 과거지향 사고 그리고 우울의 관계, 44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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