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사도 바울
제24장 사도 바울
스테반
사도 바울(Paul 5-67)은 소아시아 길리기아(Cilicia)의 타르수스(Tarsus) 출신의 디아스포라(diaspora 본국을 떠나 외국에 사는 사람들) 유대인으로서,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정통 바리새인이며,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던 자이다.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바울이 어떻게 하여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게 되었는지, 그가 이방 땅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다 로마에서 순교에 이르게 된 이야기는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호기심을 넘어 신앙의 출발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바울의 회심(Conversion of Paul) 사건인데, 이 부분에서 바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신약성경 기록에서 바울의 편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단순히 페이지 수로만 보아도 30퍼센트가 넘는다. 여기에 바울의 동역자인 의사 누가(Luke)가 남긴 기록인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더하면 60퍼센트에 이른다. 그래서 혹자는 기독교를 예수교가 아니라 ‘바울교’라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역사적 예수를 만나본 적도 없는 바울이 어느 날 회심하여,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앞세우고 율법으로부터 믿음을 외치며 구원과 은총과 부활과 재림의 사상을 정립한 스토리는 종교의 유무를 막론하고, 한 번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신약성경 한역판 및 영역판과 함께 존 폴락(John Pollock)의 「사도바울(Paul : The Apostle)」과 F. F. 브루스(Frederick Fyvie Bruce)의 「바울(Paul : Apostle of The Free Spirit)」을 참조하였다.
먼저 회심 사건 이전의 바울을 살펴보기로 한다. 바리새인으로서 비중 있는 위치에 오른 바울은 초대교회의 봉사자인 스테반(Saint Stephen, 5-34)의 순교 현장에서 ‘청년’으로 등장한다. 성난 군중은 스테반을 끌고 예루살렘 거리로 나선다. 북문을 지나 사람 키 두 배 높이인 ‘처형의 바위’에 이르러 스테반을 떠밀어 떨어뜨렸다. 뒤엉킨 옷이 떨어질 때의 충격을 덜어주는 바람에 그는 의식이 있는 상태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돌팔매형을 집행할 때에는 고소한 사람들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고소인들이 주위 사람들을 밀치고 대열의 맨 앞으로 나섰고, 겉옷을 벗어들고는 맡길 사람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도행전 7:58)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때, 거리를 달려온 한 젊은 율법사가 숨을 헐떡이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사울’로 불리고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바울’로 알려져 있는, 소아시아 길리기아 출신의 젊은 바리새인이었다. 바울의 귀에 스테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에 찬,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였다. 가까이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사도행전 7:59, 60)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곧이어 무수한 돌팔매가 날라왔다. 스테반이 죽은 해, 여름부터 겨울까지 유대 당국자들은 바울을 행동대장으로 삼아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활동을 벌인다. 잡혀들어온 예수 추종자들은 법정에서 한결같이 예수가 생전에 다음과 같이 남긴 말을 인용하면서 항변하였다.
(마가복음 13:9, 11)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바리새인
바울의 출생 연도는 기원후 1년 또는 5년으로 추정된다. 빌립보서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이며 소아시아 남부 길리기아(Cilicia)의 수도인 다소(Tarsus)의 시민으로서, 이스라엘 족속 중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율법로는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유대 전쟁사」를 쓴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100)에 의하면, 마카비 왕조의 마지막 후계자, 요나단의 치세(기원전 160-143)에 유대인들 가운데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라는 세 학파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바리새파는 경건주의자 집단인 하시딤(Hasidim) 계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시딤은 유대민족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유대 사회의 종교적, 도덕적 타락을 목도하면서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하고자 모인 집단이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은 ’프리사야(구별된 자, Perushim,פרושים)를 뜻하는 아람어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珍光은 이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고레스, 기원전 550-530) 왕의 도움으로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는 에스라(Ezra 기원전 480-440)와 같은 훌륭한 제사장이면서 율법학자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구약성경의 근간인 모세오경을 완성하고 백성들이 이를 준수하도록 하는 데 힘썼다고 본다. 페르시아에서 온 일련의 경건한 사람들을 일컬어 페르시아(Persia)라는 지명 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원지인 파르스(Fars)에서 유래하여, 바리새인(Pharisee)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바리새인들은 성문 율법뿐아니라 구전으로 내려온 율법인 ‘장로들의 유전’도 중시하였다. 그들의 조상은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므로 부활, 영생, 선악, 지혜, 천사와 마귀 등에 대한 신앙을 알고 또 믿고 있었다.
반면, 사두개인(Sadducees)에게는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었다’(사도행전 23:8). 그들은 왕족의 이해를 대변하며 성문 율법만을 중시하였다. 에세네파(Essenes)는 임박한 종말과 심판을 기다리며 세속도시를 떠나 금욕생활을 하는 공동체였다. 이집트 사막지대의 쿰란(Qumran) 공동체가 대표적이다.
바리새인은 율법학자인 랍비(Rabbi)를 중심으로 율법을 연구하면서 현실에 적용시켜 나갔다. 안식일과 정결법을 세심하게 지키며 십일조 규례를 철저히 준수하였다. 같은 시기 중국의 유가 및 법가사상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하겠다.
바리새인들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 Epiphanes 기원전 215-164)는 유대교의 의례와 전통을 불법화하는 한편,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를 숭배하게 하는 파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할례를 금지하고 돼지고기를 먹도록 하는 등 급격한 헬라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제사장 마타디아스(Mattathias)와 다섯 아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면서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참여한다. 기원전 165년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가 항쟁의 지도자가 되어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기원전 164년 12월에는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하누카(Hanukkah 修展節)라는 이름으로 이를 기념하고 있다.
기원전 140년 마타디아스의 다섯째 아들 요나단에 이어서 둘째 아들인 시몬(Simon)이 집권하면서 하스모니안(Hasmonean) 왕조를 개설하였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기원전 63년, 로마제국의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 기원전 106-48)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무너지고, 제국 로마가 지명한 헤롯(Herod) 왕조로 이어진다.
다소
다소(Tarsus)는 로마의 통치하에서 여러 문명권 사람들이 뒤섞여 사는 도시였다. 토착민 길리기아인을 비롯하여 히타이트인, 그리스인, 아시리아인과 페르시아인, 마케도니아인이 그들이었다. 알렉산더 사후, 제국이 분할되면서 다소는 시리아 지방을 다스리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전 170년경,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인들을 다수 이곳으로 이주시킨 기록이 남아 있다. 바울의 조상은 그들 중 하나였으며 아마도 갈릴리의 기샬라(Gischala) 출신으로 추정된다.
다소는 아테네와 로마, 바벨론과 니느웨의 문화가 교차하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헬라 문명이 발달하였다. 스토아 철학과 학문의 중심지로서 소아시아의 아테네로 불리었다. 기원전 41년,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가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Antonius)를 드라마틱하게 만난 도시이기도 하다.
알렉산더 제국, 프518 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는 왕권을 둘러싼 쟁탈전에서, 남동생 둘을 죽이고 로마제국의 실세인 카이사르(Caesar)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앞세워 이집트를 섭정하였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안토니우스 편에 서서 둘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침공하자 안토니우스는 자살하였다. 그녀 역시 로마의 개선식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우려해 자살하였다. 막강한 로마제국과의 사이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해 팜므파탈도 불사하였던 그녀였지만, 비운의 마지막 여왕이 되고 말았다.
흔히 클레오파트에 대해서는 그녀의 미모를 중심으로 회자되고 있지만, 그녀는 그리스어는 물론 이집트어에 능통하고 라틴어, 아랍어 등 7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등 재치 있고 화려한 언변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아무튼, 다소는 이집트 여왕이 화려한 선단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와서,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온 낭만과 운명의 도시였다.
다소에서 바울의 부친은 ‘길리기움’으로 천막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길리기움은 타우루스산맥의 경사지에서 자라는 덩치 큰 흑염소의 긴 털로 짜서 만든 직물을 일컫는다. 바울 가문은 선망의 대상이었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은 로마를 위해 특별한 공헌을 하였거나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여야 얻을 수 있었다.
로마 시민권은 훗날 사도 바울이 로마까지 가서 재판을 받고 순교하게 되는 증표가 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순교지를 로마로 선택함으로써 예수교를 로마로 가져갔으며 장차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도행전 9:15)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의 부모는 기원후 14년 무렵,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유학 보낸다. 그는 힐렐학파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Gamaliel) 문하에서 교육을 받는다. 5~6년 후 유학생활을 마치고 다소로 다시 돌아와 가업인 천막제조업에 종사하였다. 휴한기인 겨울이나 여름이면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며 랍비가 되기 위한 수련을 거쳤다.
(사도행전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도시에서 자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바울은 30세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의 얼굴은 타원형에 눈썹이 진하였고, 유복한 가정의 출신답게 살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전형적인 바리새인으로서 턱수염을 길렀으며 파란색 술이 달린 의복을 입고 터번처럼 생긴 머리 장식에 율법이 적힌 경문을 달고 다녔다.
그는 매일 접시와 잔과 몸을 정결히 하는 의식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금식하고 정해진 횟수만큼 기도를 올렸다. 그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은 정해져 520 있었다. 그 길을 갈 수 있는 자는 신이 선택된 백성 즉, 선민(選民)이어야 하고 율법을 빠짐없이 지키는 자이어야 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대비하여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가난한 자와 과부를 위하여 가진 것을 나누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 일에 봉사하는 대표적인 사람 중 한 사람이 스테반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 나무에 못 박힌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 그리스도(메시아,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바울 무리는 스테반을 신성모독으로 대제사장에게 고발한 것이다.
회심
성경에서 바울의 회심에 관한 기록은 세 차례 나온다. 첫 번째는 예수교도를 잡으러 체포영장을 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며, 두 번째는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된 채, 백성들 앞에서 자초지종을 변명하는 자리에서의 진술이다. 세 번째는 가이샤라에서 구류되어 있던 중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스테반의 죽임을 당하고 이듬해 봄이 되자, 바울은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할 계획을 세운다. 대제사장에게 이 건을 보고하여 승낙을 받는다. 계획에 의하면 먼저 다마스쿠스, 이어서 페니키아, 다음으로는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까지 가서 예수교도들을 체포하여 압송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준비가 끝나자, 바울과 그의 일행은 다마스쿠스를 향하여 출발한다. 존 폴락은 바울의 흔적에 따라 현장을 답사하고 바울의 여정을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바울 일행은 첫째 날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돌이 많은 언덕을 지나갔다. 둘째 날은 멀리 눈 덮인 헤르몬산을 바라보며 진행하였다. 넷째 혹은 다섯째 날쯤 갈릴리 호수에 도착하였다. 요단강 상류를 건너자 해발 600미터의 다마스쿠스 평야가 나타났다. 다마스쿠스의 하늘은 푸르렀으며 아바나(Abanah) 강물은 맑았다. 여기저기에 있는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신선해 보였다.
(사도행전 9:3-9)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더라”
(사도행전 22:6-11)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정오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사도행전 26:12-18)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goad)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여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일에 너로 종(servant)과 증인(witness)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다시 존 폴락의 묘사로 들어가 보자. 바울이 일어섰을 때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더듬어 내밀었다. 일행의 도움으로 그는 다마스쿠스 시내 직가(直街 Straight Street)라는 거리의 숙소에 도착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칩거하였다. 그다음 주 안식일, 바울은 다마스쿠스의 유대인 회당에 나타났다. 연단에 선 바울은 선포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하여 다마스쿠스는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임명받은 바울의 복음 전파의 출발지가 되었다.
1600년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빛의 화가’라 불리는 카라바조(Caravaggio)는 「바울의 회심(Conversion of Saint Paul)」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그림에서 일행 중 한 명과 말은 홀연한 빛에 눈이 멀어 말에서 떨어진 채 양팔을 벌리고 있는 바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때, 바울은 그가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에게서 이방 선교의 사명을 받고 순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바울 회심의 역설은 카라바조의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정의와 공의
기독교에서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기계적 구원론에 빠져 있는 것은 상당 부분 교회 목회자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은 어차피 자기구원이며 만인 제사장이다.
1) 택하심(election)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에베소서 1:4)
2) 부르심(Calling) :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5)
3) 거듭남(Regeneration)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4) 회심(Conversion) : ‘때가 차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5)
5) 칭의(Justification)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6) 양자됨(Adoption) : ‘너희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로마서 8:15)
7) 성화(Sanctification)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3)
8) 견인(Perseverance) :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요한복음 10:28)
9) 영화(Glorification) :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린도전서 15:42)
예수가 태어나기 1,000년 전에 조로아스터는 선과 악의 갈등에 고뇌하면서 지혜의 신(Ahura Mazda)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조로아스터는 아베스타(Avesta)에서, ‘어떻게 아샤(Asha, 우주의 질서)를 따르면서 올곧은 목자가 암소를 얻느냐?’고 화두를 던진다. 어떻게 하면, 선한 목자가 우주의 질서를 지켜나가면서 악한 자로부터 자신의 재산(가축)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조로아스터가 선악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지혜’의 신으로 해결하려 한 시도는 500년 후 싯다르타에게 와서 ‘깨달음의 완성’으로 심화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500년이 지난 시대, 알렉산더가 동양과 서양을 뒤섞어놓은 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가 바울에게 홀연히 나타났다.
회심한 바울은 이 모든 문제를 절체절명의 숙제처럼 들고서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사막 도시 페트라(Petra)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그곳에서 지난 1천 년 동안의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와 플라톤과 불교를 통합하여 향후 인류 2천 년의 정신적 먹거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11절은 말한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law)으로 말미암아 의롭게(justified)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the righteous)은 믿음(faith)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바울은 선악의 문제를 지혜로 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선악은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판단의 기준이 없고 결국 강자의 도덕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선악을 판단하는 개념으로 의(義)를 찾아내었다. 의(righteousness)는 세상사를 선과 악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자는 것이다. 옳다고 판단이 되면 의로워지고(justified), 의로움(justification)을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정의(justice)를 통하여 신의 공의(righteousness)에 나아갈 수 있다.
의로움을 판단하는 주체는 역사도 아니고 율법도 아닌 하나님이며, 인간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Holy Spirit)을 통하여 신과 교통할 수 있다. 이로써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신 그 자체이며, 페르소나(Persona)는 셋이지만 실체(Substance)는 하나인 존재, 즉 삼위일체가 완성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
아마도 신약성경에서 바울의 사상은 다음의 구절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에베소서 2:8, 9) “너희는 그 은혜에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 and this is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 not by works, so that no one can boast)”
사도 바울에게 인간의 구원은 행위나 율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의(righteousness)에 이르는 길이며,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이다. 결국 의인(義人)만이 믿음으로 의에 이르며(以信稱義), 의인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바울은 의로움(正義 justification)의 의미를 위해 비록 세상 법정에서 쓰는 용어인 justice를 사용하였지만, 공의(公義 righteousness)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법정의 판사가 결정할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다.
바울이 의(義)의 문제에 천착함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정의와 공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이를 구분하고 있다. 이사야 28장 17절에서 ‘나는 정의(justice)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righteousness)를 저울추로 삼으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珍光은 생각한다 정의는 인간의 심판이며 공의는 신의 심판이라 해서 이 둘은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이 정의를 심판함에 신의 공의를 기준으로 하여 심판해야 한다. 물론, 인간이 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을 재단함에는 신의 의(義)를 가늠하면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호모사피엔스는 법을 만들고 왕과 제사장과 판관이라는 제도를 내세워서, 신의 공의에 어긋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그럼에도 인간의 정의가 신의 공의에 부합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공의는 신의 저울추(plumb line)로만 판단이 가능한 것이며, 인간은 신의 공의를 정의의 이름으로 측정(measur ing line)할 수 있을 뿐이다. 공의는 king’s justice나 public justice가 아니다.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앞세워 지난 2천 년을 아우르고 새로운 2천 년을 예비하는 종교적 사유체계를 만들어냈다. 신이 된 인간 예수와 선악을 넘어 의와 믿음, 그리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아가페(agapē)의 통로로서의 성령만 있으며 충분하였다. 나머지 부활, 심판, 재림, 영생은 어렵지 않았다. 차라투스트라가 1천 년 전에 대부분 해결해 놓았기 때문이다.
죽음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도움으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대민족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성전을 다시 짓고 조상들의 전승을 정리하여 모세오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평화는 길게 가지 않았다. 200년이 지난 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이 동방을 공략하여, 페르시아, 이집트, 시리아, 박트리아와 인도 북부를 아우르는 헬레니즘 제국을 형성하였다. 헬라 왕조 하에서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관습과 우상숭배를 강요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에 제사장 마카비 가문과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저항하여 독립국가인 하스모니안(Hasmonean) 왕조를 수립하였으나, 이것도 200년을 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유대민족은 또다시 로마와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기원후 67년, 네로 황제는, 숙청당해 시골에서 양봉 일을 하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9-79) 장군에게 명하여 유대 지방의 반란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그는 아들 티투스(Titus 39-81)와 함께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탄다. 73년, 마사다(Masada) 요새의 전투에서 마지막 남은 열심당원 960명이 전원 옥쇄함으로써 유대인들은 노예나 검투사로 팔려 나가거나,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어 제국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전후 배경을 가지고, 예수가 33년경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바울은 37년에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고, 67년에 로마에서 처형당하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使徒 Apostle)임을 자처하였다. ‘사도’는 예수의 열두 제자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바울은 여기에 과감하게 사도의 이름을 들이밀었다. 열두 제자는 역사적 예수의 사도들이었지만, 바울 자신은 부활한 예수, 신의 아들인 예수의 진짜 사도인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예수에게 연고권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등에서 논리적이고 현란한 필치로 예수를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 이전까지 전하여진 동서의 종교에 대한 수많은 증거와 아라비아 사막의 명상에 더하여, 회심 사건에서 비롯한 확신과 열심이 더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인문학이 발달한 지금까지도 사도 바울의 편지의 설득력을 능가하는 문서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설득력은 바울 사상이 차원 높은 변증법으로 씌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논리라는 형식에 열심과 확신이 더하여졌을 때 나타나는 폭발적 감동이 더 중요하였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동양에서는,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이라는 수모를 당하고 「사기(史記)」를 지어, 지구의 동쪽과 서쪽의 엔트로피 균형을 맞추었다.
바울에게 로마 법정은 단순히 생명유지장치가 아니었다. 순교하기 좋은 장소였다. 제국의 수도 로마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의(義)의 면류관을 받기 좋은 곳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기원후 65년, 로마 시내 오스티아 가도(the Ostian Way)에 있는 죄수들의 처형 장소인 ‘트레 폰타네(Tre Fontane 세 분수)’의 소나무 아래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5세기에 그곳에 ‘성문밖 성바울 성당(Basilica of St. Paul Outside the Walls)’이 세워졌다.
2025년 현재,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종교와 과학’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기독교도를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첫째,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이고 부활하였음을 믿는가? 둘째,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가?
셋째, 신과 인간의 교통으로서 성령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는가?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대부분의 과학하는 사람들은 불가지론(不可知論) 또는 이신론(理神論)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세 가지 질문에 용감하게 “예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인간의 조건과 한계를 넘어서야 할지도 모른다. 섣부른 긍정은 위선이며, 섣부른 부정은 교만이다.
인류는 우주와 생명, 무생물과 생물 어디를 보아도, 아직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의 대단한 지식을 만나지 못하였다. 예수 사후 2천 년이 경과한 지금은 종교의 통합이 신의 예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 너무 앞서가면 위험하다. 카이로스(Kairos)는 오고야 말 필연이기에,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혜와 신의 은총으로서 믿음을 다듬어가면서 시대를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확실한 것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노상(路上)에서(on the road)’ 신이 된 인간의 환상을 본다면 우리 중 누구도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신이 택정한 그릇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사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의와 연대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명상하면서 조로아스터 이래 선각자들이 고민해 온 선과 악의 문제를 넘어서려 하였다. 선과 악은 극히 주관적이어서 신의 섭리에 맡기기에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았다. 지배자의 판단과 강자의 도덕은 무비판적으로 선(善)으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주관적이고 결과론적인 한계를 가진 선악의 문제를 객관화하여, 의 (Righteusness)의 문제로 지양(止揚 Aufheben)하였다. 그에 의하면, 선악의 문제에 직면하여 신의 뜻인 공의(righteousness)가 인간에게 의롭게 나타난 것이 정의(justice)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바울에게 세상의 정의(正義)와 신의 공의(公義)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공의가 예언과 계시를 통하여 인간에게 드러나면 정의이기 때문이다. 둘 다 의(義)의 영역이었다.
1,800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인류는 다시 정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신을 부정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신을 알고자 하는 지식의 일환이었다.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져 어느 한 면이 나올 확률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파스칼이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신을 아는 지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거나 계획이기도 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무엇이 정의인지 판단하기 위하여 정교한 법이 만들어지고 세련된 사법제도가 발달하였다. 그럼에도 인간이 만든 법으로 인간 재판관이 인간을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정의에 대한 관심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시간이 흐른 즈음, ‘정의란 무엇인가’의 명제가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정의에 대한 인본주의적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와 칸트를 거쳐,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과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1929-2024)의 ‘공동체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정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전문가의 깊은 통찰과 사색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므로, 여기서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1953-)이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에서 제시한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1884년 여름, 육지에서 1,600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 어느 지점에서 미뇨넷(Mignonette)호가 태풍으로 조난하였다. 살아남은 선원 네 명이 탄 구명보트에는 통조림 두 개뿐이었고 먹을 물도 없었다. 승무원은 선장 토마스 더들리, 일등항해사 에드윈 스티븐스, 일반 선원 에드윈 브룩스, 그리고 잡무를 보던 17살의 리처드 파커였다.
먹을 것이 떨어지고 나서 그들은 팔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파커는 목마름을 참지 못해 바닷물을 마시고 병이 난 채로 보트 한구석에 누워 있었다. 19일째 되던 날, 선장은 제비뽑기를 하여 남은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정하자고 하였으나, 브룩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다음 날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선장은 기도를 올리고 주머니칼로 파커의 경정맥을 찔렀다. 이후, 나흘 동안 세 남자는 죽은 남자의 살과 피로 연명하였다.
24일째 되던 날, 배가 나타났고 세 명은 구조되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법정에 섰다. 브룩스는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하였으며, 선장 더들리와 항해사 스티븐스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파커를 죽여 살점을 먹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하였으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앞에 두고 벤담의 입장을 묻는다면, 그는 세 사람의 행동이 정당하며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의 공리주의는 희생으로 인한 비용과 희생으로 얻은 편익을 저울질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기준에 부합하다면, 인간의 도덕은 행동의 결과에 의하여 정당화되며 그 행위는 ‘옳은’ 행동이 된다.
그러나 벤담의 주장을 막연히 받아들이기엔 무리인 사례도 있다. 체코 정부는 흡연으로 인한 의료비용 증가를 우려하여, 세계 최대 담배회사인 필립 모리스가 생산하는 담배에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2001년, 필립 모리스는 흡연이 국가 예산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의 비용편익분석 결과에 따르면, 흡연자들이 생존 중에는 정부가 부담하는 의료지출이 늘지만,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흡연자가 일찍 사망하기 때문에 노년층을 중심으로 의료, 연금, 주거 비용은 감소하고 상당한 수준의 예산 절감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연간 1억 4700만 달러의 순수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황당하고 위험한 보고서에 대하여, 체코를 비롯한 전 세계 국민으로부터 분노와 야유가 거세어지자, 필립 모리스 최고경영자는 동 보고서가 인간의 기본 가치를 철저히 무시하였다고 자인하며 사과하였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는 쾌락과 고통을 계량하는 자들의 농간이 불을 보듯 뻔하다. 사전에 정해진 목표를 설정하고, 여기에 맞춰 역산하여 ‘그럴듯하게 계량화’한 비용편익분석 보고서를 내놓은 예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너무 많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 정도의 조작을 감행할 만큼 충분히 이기적인 동물이다.
오늘도 수많은 관변 연구소와 감리 현장에서 ‘그럴듯하게 계량화한’ 비용편익분석 보고서가 양산되고 있다. 따라서 비용편익분석에는 비용항목에 ‘일정 수준 이상의 조작위험’을 포함시켜야 한다. 조작으로 인한 배상책임과 부끄러움은 그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
벤담의 제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의 이론을 좀 더 심화 발전시켰다. 그는 공리에 질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행복이란 고통의 부재와 쾌락을 의미하며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할수록 옳은 행동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벤담과 차이가 없었다.
밀의 성과는 오히려 자유에 대한 그의 탁월한 해석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의 통찰의 결과로, 자유라는 개념은 더욱 풍부해졌으며, 헌법상 자유권의 한계를 판단해야 하는 법원의 판사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1919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홈스(Oliver Wendell Holmes 1841-1935) 판사는 역사적인 판결에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기준으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rule of clear and present danger)’을 제시하였다. 이 역시 밀의 밀도 높은 자유론으로부터 암시를 얻은 것이다.
밀의 자유사상은 아담 스미스의 시장주의와 결합하여, 자본주의의 근간인 시장자유주의로 발전하였다. 산업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밀의 천재성에 힘입어 치밀하게 설계된 자유주의는 얼마 가지 못하였다.
불과 50여 년 후, 세계 경제는 대공황 상태에 들어가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자유시장주의가 위기에 봉착하였음에도, 밀의 ‘위험의 원칙’과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정부가 그 역할을 담당하여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혹자는 정부가 시장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조한다는 시장주의자들의 금과옥조는 수요공급곡선의 균형점으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시장과 명령(정부)의 펜듈럼을 확인하는 대가는 너무 컸다.
자유시장주의가 만능이 아님을 뼈저리게 경험한 후에, 존 롤스는 바울에게로 돌아가서 정의를 다시 고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무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을 준수하더라도 ‘옳음이 선에 앞선다’고 하면서, 평등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분배적 정의의 얼굴을 가진 자유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롤스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독립된 자아’만으로 정의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인간의 정의는 이성적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가 구원투수로 나타났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 ‘자발적’ 자아라는 개념은 유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narrative being)’이다. 인간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에는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특정한 형식이 있다.
인간은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사적(敍事 narrative) 탐색을 하는 가운데, 마주하는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게 되며, 이 선택은 그만의 의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에 의하면,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의 일부에 속한다.
젊은 독일인이 자신은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나치가 유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현재의 자신과는 도덕적으로 연관성이 없다고 믿는다고 할 때, 매킨타이어는 이를 도덕적으로 천박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설명한다. 젊은이는 공동체 내에서 과거를 안고 태어났는데, 자신을 과거와 분리시키는 행동은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국 사우스 보스턴의 주택단지에 일곱 형제가 있었다. 그 중, 빌은 성실한 학생으로 성장하여, 법학을 전공하고 정치에 입문하여 주 상원의장을 거쳐 메사츄세츠 대학 총장이 되었다. 한편, 형 화이티는 은행 절도죄로 복역한 뒤 보스턴 조직범죄집단의 보스가 되었다.
열아홉 건의 살인 혐의를 받고 있던 화이티는 체포를 피해 1995년, 해외로 도주하여 연방수사국의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연방검사가 빌 총장을 압박하여 형에 관한 정보를 캐려 하였다. 빌은 대배심원 앞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저는 형을 걱정합니다. 형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협조할 생각이 없는 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에게는 형을 체포할 수 있도록 협조할 의무가 없습니다.” 신문은 그가 올바른 규범을 선택하지 않고, 거리의 규범을 선택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논란 끝에, 빌은 대학 총장직을 사퇴하였다.
연방 수사당국은 수차례의 우편물 폭탄테러로 세 명을 숨지게한 테러범을 17년째 추적하고 있었다. 테러범이 주로 과학자를 표적으로 삼았기에 그에게는 ‘유나바머(Unabomber)’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유나바머는 신문사들에게 3만 5천 단어의 과학기술 반대 선언문을 보내어, 그 글을 실어주면 폭탄테러를 멈추겠다고 약속하였다. 신문사들은 그의 요구에 응하였다.
한편,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데이비드 카진스키는 그 선언문을 읽는 순간,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몬타나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형 테드가 생각났다. 데이비드는 고심 끝에, 연방수사국에 유나바머가 자신의 형일지도 모른다고 제보하였다.
수사요원들이 은닉수사 끝에 그를 체포하였다. 검찰은 테드 카진스키에게 유죄를 인정하는 대가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구형하였다. 법정에서 형은 동생에게 ‘가롯 유다’라고 외쳤다. 데이비드 카진스키는 형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지 않도록 힘썼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단체의 대변인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심정의 일단을 내비쳤다.
“형제는 서로를 지켜줘야 합니다. 저는 형을 죽음으로 내몰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포상금으로 1백만 달러를 받았지만, 이를 형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가족에게 전달하고 형의 범죄를 사죄하였다. 마이클 샌델은 그의 관심사인 정의(justice)라는 주제를 결론처럼 이야기한다. 한 사람에게는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는 의무감보다 형제에 대한 충성심이 중요하였고, 다른 사람에게는 정반대였다. 두 사람의 선택을 어떻게 판단하든 간에, 어떤 도덕적 의무보다 충직과 연대가 더 무거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이들의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 에티오피아에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40만 명이 이웃나라 수단으로 대피하여 난민수용소에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1984년, 이스라엘 정부는 비밀리에 항공수송작전(일명 ‘모세 작전’)을 감행하여, 내전과 기근에 시달리던 에티오피아 유대인(팔라샤 Falasha)들을 구출하여 본국으로 데려왔다. 중간에 작전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991년까지 팔라샤 1만 4천 명을 이스라엘로 수송하였다.
이스라엘이 난민 중 오직 유대인만을 수송하는 행위는 불공평하고 차별적이라고 비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대와 소속의 의무를 인정한다면 답은 분명하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총리는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에게 ‘우리 형제, 자매’라는 서사를 동원하여 강한 연대감을 표시하였다.
남정욱의 「사막의 역사」에 따르면 현재, 약 1,8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유대인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아슈케나짐, 세파르딤, 팔라샤가 그것이다. 인구의 70퍼센트인 약 1,200만 명을 차지하는 아슈케나짐(Ashke nazim)은 8세기 후반 남러시아 지방에 세워진 카자르(Khazar) 왕국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10세기 말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아 동유럽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난 후에 나치 치하에서 가스실로 끌려간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세파르딤(Sephardim)은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으로 약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바빌로니아 포로기를 거쳐 귀환한 자들이다. 이들은 로마제국과 옥쇄전투를 불사하였으며, 예루살렘이 무너지자 디아스포라 신세가 된 자들이다. 팔라샤(Falasha)는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 사이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세의 십계명 돌판을 지키며 오래전부터 에티오피아에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 에티오피아의 검은 유대인들에게 연대를 보이는 서사 경이롭다. 과연, 우리가 스탈린 시절, 사할린에서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우리 민족의 후손들에게 이렇게 강한 연대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발해의 유민이 현재 불가리아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다면, 우리가 과연 그들에게 끈끈한 연대와 소속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珍光은 생각한다. 인류는 공동체의 소속감과 연대감으로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한계를 인정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그럴듯한 명분도 인간의 조건과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민족주의와 분리주의의 커다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인류는 민족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에서 또 하나의 진자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AI 시대에서는, 민족과 국가의 경계는 희미하여지고, 서로의 공통 관심사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네트워크 시대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네트워크 시대에서 정의의 기준은 무엇이 될 것인가? 이것을 재판관의 판단에 의하여 결정하기에는 지구가 너무 빨리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