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A-15

제25장 황금가지 참고문헌 저자후기

by 김진광

제25장 황금가지


황금가지의 비밀


마지막 장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시점에서, 珍光은 문화인류학에 관한 몇 가지 자료를 제시하고 이를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다. 기독교의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창세기가 나일강과 유프라테스 강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표절한 것이고 그들에 관한 기록들을 짜깁기한 것이라는 증거가 나왔다고 해서 결코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여호와인지 야훼인지, 엘로힘은 또 무엇인지, 예수교인지 바울교인지, 기독교에서 조로아스터를 빼고 나면 남는 게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쉽게 당황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역사적 사실이 발생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 이를 두고 야훼의 섭리라고 합리화하는 것은, 운동경기가 다 끝난 후 결과를 가지고 당위를 이야기하는 스포츠 평론가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실제로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역사적 결과가 발생하고 나서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선지자의 예언이나 계시로 포장하여 “봐라, 이것이 여호와의 뜻이다”라고 서술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구약성서 기자의 사기나 배임으로 비난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관점에서 역사는 신의 섭리의 결과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서의 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비록 자기들에게 불행했던 역사일지라도 신을 탓하지 않고, 절대정신이 무엇인지 알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원인을 자신들의 죄에서 찾고자 하는 침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와 예언자들의 기대와 노력은 소위 신구약 중간기라고 하는 시대에 와서는 에너지가 소진된 듯하다. 헬레니즘의 왕이라는 자가 나타나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상을 세우고 돼지고기의 향이 피어오르게 하는 패악을 저지름에도 여호와는 침묵하였다. 마카비 일가의 저항이 있었으나 이것도 잠시, 더 큰 세력인 로마 제국이 나타나 이번에는 아예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 폐허로 만들고 유대 민족을 2천 년 동안 유랑하도록 만들었다. 선지자가 나타나 이를 유대민족의 죄로 돌리기에도 지쳤다. 그래서 그런지, 구약성경은 말라기로 끝나고 이후 400년간의 기록이 없다. 마카비서는 단지 전쟁을 기록한 역사서일 뿐, 신의 음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여호와의 긴 침묵 후, 예수가 나타나 신약의 시대를 열었다. 이는 건축용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쿨데삭(cul-de-sac)’에서의 반전이라고 할만한 사건이었다.


신에 대한 끝도 없는 논쟁을 떠나서, 우리는 잠시나마 우리의 상상력을 아틀란티스로 떠나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공룡의 발자국은 왜 한반도 해안에 집중해서 발견되는가? 왜, 지구 전체의 40퍼센트가 넘는 고인돌 유적이 한반도 남해안에 몰려 있는가? 페르시아의 왕자들과 인도의 공주들이 한반도까지 넘어온 사연은 무엇인가? 수메르의 점토판과 길가메시의 서사시, 그리고 소철의 화석을 보면서 수소와 산소와 탄소와 질소와 판게아(Pangaea)가 지구상 생물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이들로부터 인류가 범지구적인 기후 위기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영감은 무엇인지 확인하는 한편, 시경에 나타난 3천 년 전의 남녀상열지사가 오늘을 살아가는 남녀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실증하기도 하는 것이다.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 1854-1941)의 문화인류학 저서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의 비밀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로(Vergilius)부터 시작한다. 그가 지은 민족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에서, 두 마리의 비둘기가 아이네이스를 어두운 계곡의 심연으로 인도한 다음 숲속의 참나무 한 그루에 내려앉았다. 그때, 어슴푸레 깜박이는 황금빛 광채가 보였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푸른 잎이 무성한 황금빛 식물은 싱싱한 잎새와 노란 열매로 참나무 줄기를 감싸고 있는 듯하였다.


이것의 정체는 겨우살이(mistletoe)라는 식물이다. ‘황금가지’라는 이름은 겨우살이를 잘라서 몇 달간 보관하면 선명한 황금색을 띠는 데서 유래하였다. 진화생물학자들에게는 숙주(宿主)와 기생자(奇生子)의 관계에 관한 흥미로운 논문을 한 편 발표할 법한 소재다. 고대인들은 참나무 정령을 숲의 왕의 화신으로 보고, 인간들이 해마다 거행하는 불꽃 축제에서 정령이 땔감이 되어 화장당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숲의 왕을 온전하게 죽이기 위해서는 참나무를 베어낼 때 겨우살이까지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북유럽의 신화에서 눈먼 신, 호테르(Höðr)는 겨우살이 가지를 던져 불멸의 신 발데르(Balder)를 죽였다.


아이네이스가 숲을 빠져나와 지옥의 늪지대를 느리게 굽이쳐 흐르는 스틱스(Styx) 강 언덕에 이르렀다. 심술궂은 뱃사공 카론(Charon)은 황천으로 가는 배를 태워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네이스는 황금가지를 품에서 꺼내 치켜든다. 뱃사공은 황금가지를 보고 아이네이스에게 고분고분해진다. 고대인들은 벼락이 나무에 떨어지는 현상을 보고 태양이 불을 나무에 옮겨 붙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벼락 맞은 나무는 불을 보관하여 저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언어 중에서는 나무와 불을 가리키는 단어가 같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육제


고대인들은 해마다 파종기나 수확기의 일정 기간을 정하여 ‘자유의 기간’을 지키는 관습이 있었다. 이 기간 중에는, 기존의 관습법과 도덕의 굴레를 벗어나 환락과 욕정의 아수라장을 허용하여 1년 동안 억눌린 힘을 분출하였다. 이 중, 유명한 축제가 로마의 ‘농신제(農神祭 Saturnalia)’다. 제전은 12월 17일부터 23일까지 로마의 시가지와 광장과 주택가에서 일주일간 지속되었다. 특징적인 것은 이 기간동안은 자유민과 노예의 구별이 잠정적으로 유보된다는 점이다. 주인은 노예와 자리를 바꾸어 식사 시중을 들고, 그들이 먹고 마시기를 마칠 때까지는 식탁을 치울 수 없었다.


이런 농신제 전통은 전장에 있는 로마 병사들에게도 이어졌다. 제전이 시작되기 30일 전에, 제비를 뽑아 젊고 잘생긴 남자를 선발한 뒤 씨뿌리기와 경작의 신, 사투르누스(Saturn)의 복장을 입혀 갖은 쾌락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하였다. 그러나 30일이 지나 농신제가 닥치면 그는 신의 제단에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와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농신제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희생 제물이 인간에서 광대 인형으로 바뀐 것뿐이다. 기원후 303년, 제비뽑기로 기독교인 병사 다시우스(Dasius)가 선발되었다. 그러나 그는 강요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교도 신의 역할을 거부하고 참수형을 당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이때부터, 11월 20일 금요일은 성 다시우스의 기념일이 되었다.


농신제의 전통은 바빌론의 사카에아(Sacaea) 제전에서 나왔다고 한다. 축제기간에 주인과 하인이 자리를 바꾸어 하인이 명령을 내리고 주인은 복종하였다. 사형수 중 한 명을 택하여 조가네스(Zoganes)라는 칭호를 붙여 왕 노릇을 하게 하였다. 마지막 날에는 매를 때린 후 교수형이나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사카에아 제식에서는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Marduk)에게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 왕의 생명을 1년간 보장받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민족은 페르시아에서 자신들이 몰살당할 뻔한 사건을 기념하여 부림절(Purim)을 지내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 문서로 알려져 있는 구약성경 에스더서(Book of Esther)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에스더서는 크세르크세스(Xerxes, Ahasueros) 왕 치하의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에스더는 왕비 바슈티(Vashti)를 제치고 새로운 왕비에 오른다. 유대인 출신인 에스더는 사촌 모르드개(Mordecai)에게서 재상 하만(Haman)이 유대인들을 멸절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죽으면 죽으리라’의 마음으로 왕 앞에 나아간다. 왕은 에스더의 간청을 듣고 음모를 꾸민 하만을 교수형에 처한다.

프레이저는 유대인의 부림절이 바빌론의 사카에아 제전과 로마의 농신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에스더(Esther)는 바빌로니아의 사랑과 생식의 여신, 이슈타르(Isthar) 또는 아스타르테(Astarte). 페르시아의 여신 아나이티스(Anaitis)와 서로 이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옛 이름은 이슈타르와 마르둑이었던 것이다. 프레이저가 농신제의 기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농신제 신화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함이다.


십자가


프레이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바빌론의 사카에아 축제에서 가짜 왕이 받는 대접과 긴밀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로마제국의 철학자 디오 크리소스토무스(Dio Chrysostomus)의 자료에 의하면, “사람들은 사형수 한 명을 데려와 왕좌에 앉히고 왕의 의상을 입힌 다음, 축제 기간 동안 왕으로 군림하면서 마시고 소란을 피우고 왕의 첩들을 차지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도 그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의 옷을 벗기고 매질을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필론(Philo)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의 손자인 아그리파(Agrippa)가 로마 황제 칼리쿨라(Caligula)에게서 유대 왕의 지위를 부여받고 본국으로 부임하는 길에 알렉산드리아에 들렸다. 유대민족에 대해 혐오감을 가진 알렉산드리아의 군중들은 이 기회에 새 유대인 군주를 모욕하고 반감을 표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들은 카라바(Carabas)라 하는 순진한 미치광이를 붙잡아 벌거벗은 채 거리로 행진하게 하여 군중들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였다. 그들은 불쌍한 부랑인의 머리에 종이로 만든 왕관을 씌우고 손에는 왕홀 대신 부러진 갈대를 들게 하였다. 또한 그의 벌거벗은 몸을 거적으로 감싼 후 경배를 올리며 법률과 정치 문제에 관해 고견을 듣는 시늉을 하였다. 그들은 아그리파를 가짜 왕에 빗대어 조롱하고자 한 것이다. 프레이저는 여기서 ‘카라바’는 히브리어로 ‘아버지의 아들’을 뜻하는 ‘바라바(Barabbas)’를 상징한다고 추측한다.

축제와 종이 왕관과 갈대 지팡이와 바라바가 준비되었으니, 이제 축제의 주인공만 캐스팅하면 프레이저의 연극이 완성될 참이다.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총독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유대인들에게 내어주었다. 병사들은 예수를 총독 관저 마당으로 끌고 나가 그의 옷을 벗기고 자색 가운을 입혔다. 이어서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치며 조롱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다. 이렇게 오래된 전통의 희롱을 마친 후 예수의 옷을 다시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연극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고난의 길, Via Dolorosa(비아 돌로로사)가 시작된 것이다.


프레이저의 가설은 이렇다. 유대인들은 부림절 제전에 행하는 수난극을 재현하기 위해 죄수 중 두 명을 선발하여 각각 하만과 모르드개 역할을 맡기는 것이 관례였다. 행사가 끝나면, 하만 역을 맡은 자는 교수형이나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대중들이 바라바라고 부르는 모르드개 역할을 맡은 자는 풀려났다. 빌라도는 예수를 고발한 죄목이 처벌하기에는 하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수가 바라바 역할, 즉 모르드개 역할을 맡도록 하여 그의 목숨을 구해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의는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수는 하만의 대역으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문화인류학자 프레이저는 주장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기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페르시아에서 재상 하만이 의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모르드개가 성공한 수사(Susa) 시가지의 화려한 거리 행진을 연상시킨다. 예수가 성전 앞 행상들과 환전상들의 진열대를 뒤엎은 이야기는 축제 기간 중 가짜 왕에게 부여한 한시적이고 잠정적인 권한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발원하여 페르시아,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가짜 왕 축제에 비유하였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제자들에 의하여 인간 예수를 신화화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로마제국에 의해 그들의 나라는 훼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게 명망당했다가 천우신조로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였다. 또다시 헬레니즘 제국에 복속하면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마침내 로마 제국에게 최후의 일격을 맞아 무너졌다. 민족적 아픔을 보고 있는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실제 사실보다는 예수의 심판과 재림이라는 신화에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이 평범한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믿음은 헛되고 이 세상의 삶으로 끝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다”고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프레이저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가지 축 중 하나를 고대 신화로 희석하였다고 비난할 것이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으므로, 어쩌면 두 개의 축을 다 무너뜨리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프레이저의 신화는 바울 사상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珍光은 생각한다. 문화인류학자의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예수의 이름으로 외곬에 빠져 저지른 수많은 과오에 비하면, 프레이저 가설의 진위 여부는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만큼이나 미미하고 하찮은 것이다. 종교가 고유의 관용 정신을 버리고 이런 정도의 고고학적 해석에 발끈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


「어린 왕자」를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珍光은 깊은 회한에 빠졌다. 이쯤 끝내려는 이 조그만 책자에 대하여, 백과사전을 짜깁기해 놓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 강한 의구심이 드는 가운데, 방물장수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 있을지언정 작품성을 운운하기는 어려운, 그리고 인공지능이 공장의 경계를 넘어와 리포트와 소설과 음악, 미술 분야를 막론하고, 의사와 판사와 목회자 노릇까지 행세할 것 같은 형편에서, 모바일을 전화기 용도로만 쓰고 컴퓨터 자판을 독수리 타법으로 더듬더듬 두드리는 자가 만든 종이책의 의미에 대하여, 연령으로 보아 비록 건강과 의욕이 허락한다 하더라도 종이로 만든 무언가를 남기는 시대도 머지않았다는 압박감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한편에서는, 밀린 숙제를 빨리 제출해 버리고 싶은 욕구도 만만치 않았다. 오래된 생각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욕심이었다. 오래전부터 월급쟁이를 하면서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직장 일로 피곤해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막연하게 무엇인가를 써야 한다는 강한 부채감이 있었다. 틈나는 대로 바라보아 왔던 단풍나무 한 그루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인간의 뇌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10퍼센트 내외만 사용하고 말 정도로 어울리지 않게 용량이 충분하다고 한다. 문제의식이 있는 인류라면 남아 있는 용량을 쓸 만큼 쓰고 떠나는 것이 창조주 또는 생명의 조상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지금은 AI가 뇌를 대신한다고 주장하면서 주인인 인간더러 지는 해와 저녁 놀이나 열심히 바라보라고 하지 않는가? 이 정도로 한편의 글쓰기를 마감하면서, 어린 왕자에 나오는 글귀를 묵상하면서 졸저를 대신하기로 하겠다. 해골물을 마신 원효대사의 661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생텍쥐페리의 1942년 어린 왕자와 만나는 사유(思惟)의 서사(敍事)는 또 다른 기회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린 왕자가 떠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가 말했다 안녕 잘 가 참 내 비밀을 말해줄게 아주 간단한 건데 그건 마음으로 봐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버렸어 너는 그것을 잊으면 안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는거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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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후기


소정의 값을 치르고 본서를 사신 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본서는 지극히 저자 본인의 만족감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머리가 더 이상 흐리멍덩해지기 전에,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주제를 망라해서 할 수 있는 한 정리해 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차례도 특별한 일관성이 없이 의식의 흐름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나열되었다. 그럼에도 본서에서 굳이 독창성을 찾아보자면 차례에 열거된 제목들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느 정도의 두께를 확보하고 글쓰기를 끝낼 즈음에 교정을 위하여 원고를 살펴보니 필자는 어느 한 분야도 전문적으로 깊이 아는 분야가 없음을 새삼스럽게 확인하였다. 이것은 예상된 자괴감이었으나 필자의 처지는 그런 사치스러움에 빠져들 여유가 없는 형편인지라 지는 해를 앞에 두고 그동안 미처 망설여왔던 하나의 리포트를 완성하였다는 점에 만족하고자 한다. 여기에 더하여 한 번 쓴 글에 대해서는 뒤돌아보는 것을 싫어하는 필자의 편벽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겠으며 독자에 대한 무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필자는 이 나이가 되도록 우주와 지구와 생명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인간의 영육과 죽음에 대하여 확립된 지혜도 부족한 형편이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본서에 이어서 ‘히스토리 D(Death)’를 준비해 보고 싶은 의욕을 가지고 있다. 혹시 죽음학 개론 정도의 책자가 나온다고 해도 이 역시 필자의 자기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우려와 함께 미리 양해를 구하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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