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대한민국 죽음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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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법배경
2. 세 가지 기본원칙
3.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와 말기환자
4. 연명의료와 연명의료 중단결정
5.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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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호스피스 서비스
7. 대만의 연명의료결정제도
8. 대만의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시사점
9. 일본의 개호보험제도와 한국의 장기요양보험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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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hospice)라는 용어는 중세 유럽에서 순례자와 여행자를 위한 숙소 또는 돌봄의 장소를 의미하였다. 현대적 의미에서 호스피스는 말기환자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완화(palliative)하고 평안한 임종을 돕는 돌봄(care)의 철학과 제도를 뜻한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호스피스 제도를 살펴보면, 제2조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이하 ’ 호스피스‘)는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질환(이하 ’호스피스 대상질환’)으로서 말기환자로 진단된 환자 또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이하 ’호스피스 대상환자‘)와 그 가족에게 통증과 증상의 완화 등을 포함한 평가와 치료를 목적으로 제공되는 의료“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호스피스(hospice care)와 완화의료(palliative care)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면, 호스피스는 임종을 앞둔 암 등 특정 질환 환자에게 통증 관리와 돌봄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완화의료는 보다 넓은 개념으로, 중증 환자는 물론 가족구성원에게 진단 시점부터 질병 진행 전 과정에서 고통을 경감하고 포괄적 돌봄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호스피스는 완화의료의 특수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질병 자체를 근본적으로 치료하려는 의료(curative care)에 비해, 완화의료는 질병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통증을 완화하고 증상을 줄여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 중점을 둔다. 따라서 중증 환자에 대한 완화의료 단계 이후 말기환자에 대한 호스피스 단계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호스피스 대상질환은 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COPD), 만성 간경화증 및 그밖에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질환(예: 만성호흡부전∙만성기관지염, 진폐증 등)을 말한다.
제10조에서는 말기환자 등은 의원, 한의원, 병원, 한방병원, 요양병원, 종합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담당의사에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입법자는 병원의 연명의료에서는 ’임종과정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 호스피스 서비스에서는 ’말기환자와 연명의료계획서‘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28조에서는 호스피스 대상환자가 호스피스 전문기관에서 호스피스를 이용하려는 경우, 호스피스 이용 동의서와 담당의사가 발급한 호스피스 대상환자임을 증명하는 의사 소견서를 첨부하여 호스피스 전문기관에 신청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16조에서는 호스피스 전문기관에서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말기환자가 임종과정에 있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을 담당의사의 판단으로 갈음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해당 분야 전문의 1인‘이나 ’가족 합의‘ 등 절차적 제약 요인을 단순화하였다.
호스피스 전문기관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 한국의 의료 환경에서 말기에 처한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임종 장소는 호스피스 전문기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행 호스피스 전문기관은 암 환자 기준으로 약 20~30%만 수용 가능하며, 대상 질환 또한 암을 비롯한 일부 질환에 국한되어 있다. 그 결과 중증 치매 환자나 뇌졸중 환자는 요양병원과 종합병원 응급실을 오가다 임종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현재 상황에서는 통증 관리나 비용 부담 측면에서 요양병원의 여건이 호스피스 전문기관에 비해 훨씬 더 열악한 것으로 보인다.
호스피스 전문기관에서의 임종이 가장 선호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입소 대상 질환의 범위를 확대하고 단기간 내 호스피스 기관의 수를 늘리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될 것이다. 대상질환은 말기 암뿐 아니라 사망률 상위를 차지하는 뇌혈관질환, 심혈관질환, 알츠하이머병, 치매 등으로 확대해야 한다.
또한 대만 등의 사례를 참고할 때, 대형병원에 호스피스 병동 설치를 의무화하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다. 다른 방안으로는 요양병원의 기능과 인원을 보강하여 호스피스 전문기관화하는 방법이 있다. 어떤 방안이 마련되더라도 중요한 것은, 초고령 사회에서 노인 질환과 노인 사망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실 속에서 호스피스 기관을 단기간에 빠르게 확충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상황을 검토해 볼 때, 고령의 예비 환자에게 호스피스 기관은 사실살 이용하기 어려운 ’그림의 떡‘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호스피스 대상 질환에 해당하지 않으면 입소 자격이 전혀 없어, 결국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말기 암 환자의 경우 호스피스 전원이 결정되더라도 평균 입원 기간이 1개월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고려하면, 담당의사가 말기환자로 인정하고 호스피스 입소를 위한 의사소견서를 작성하는 시점이 지나치게 늦은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말기환자가 통증에 시달리는 기간은 길어진다.
한번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인공영양을 위한 콧줄을 삽입하면, 이를 제거하는 과정은 지난하기만 하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막연한 종교적 내세관, 가족의 ’효도 콤플렉스‘, 병원의 손익계산서 앞에서 무력화된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의 죽음 문화가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니 개선의 시기도 그만큼 늦어진다. 언제까지 죽음의 문제를 ’ 죽는 자만 억울하다 ‘는 생존 게임의 차원에서만 바라볼 것인가?
대만의 연명의료 관련 법은 「환자자율권법(patient right to autonomy,2015)」과 「호스피스 완화의료법(hospice palliative care act, 2000)」 두 가지로 구성된다. 환자자율권법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여 사전의료결정(AD, advance directives)을 제도화한 법이며, 호스피스 완화의료법은 말기환자의 호스피스 돌봄을 제도화한 법이다.
겉으로만 보면 대만의 두 법을 합쳐놓은 것이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존재한다. 대만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호스피스 제도를 정교하게 마련한 반면, 한국은 연명의료 결정 여부를 중심에 두어 병원 측의 입장을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관심과 태도의 결과로 기존의 연명의료계획서 제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불완전하게 덧붙여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 따라 대만은 환자 입장에서 실효적이고 과정 중심적인 ACP(advance care planning)를 운영하며, 이를 바탕으로 법적 효력을 가진 문서인 AD(advance directives) 제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는 의료인 주도의 연명의료 결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지나치게 까다롭게 설계되고 환자의 자기결정을 제약한다. 각종 서류는 작성하지 않은 것보다는 유리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확실히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기본 원칙으로 내세우지만, 환자와 가족은 물론 의료진조차 이해하기 어렵고 번거로운 복잡한 절차가 자기결정을 방해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은 아직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충분히 인정하고 보장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연명의료 결정 제도의 복잡성이라는 ’소프트웨어‘와 관련 시설의 미비라는 ’ 하드웨어‘가 결합되어 앞으로 더 많은 불편한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고령의 예비 환자들은 죽음을 스스로 준비해야 하며, 이른바 ’각자도생‘의 상황에 놓여 있다.
대만의 연명의료제도가 주는 시사점은 크다. 여러 국내외 자료를 검토한 결과, 연명의료제도는 대만의 제도를 벤치마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연명의료와 호스피스 제도만 놓고 본다면, 대만은 동서양의 철학과 제도를 융합하여 간결하면서도 실질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대만의 제도를 분야별로 정리해 한국의 현행 제도와 비교하면, 한국 연명의료제도의 개선 방안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1) 연명의료 결정의 기준이 되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와 ’말기환자‘라는 이원적 개념은 통일될 필요가 있다. ’말기환자‘의 개념에 좁은 의미의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를 흡수하여 재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대만에서 ’말기환자‘는 ”치료로 회복이 불가능하고, 의학적으로 생명이 수개월(통상 6개월) 이내에 끝날 것으로 예상되는 환자“를 의미한다. 또한 ’말기환자‘의 판단 주체는 병원에서는 담당의사와 전문의 1인이 함께 판단하며, 호스피스 기관에서는 담당의사 단독 판단이 가능하다.
2) 연명의료 중단 결정의 기준은 ’말기환자‘라는 보다 넓은 개념으로 단순화됨과 동시에, 연명의료 중단 결정의 기준과 대상 항목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 가능한 범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말기환자(terminally ill patient) : 말기 암이나 말기 심부전 등과 같이 회복 불가능한 질환으로 임종기에 접어든 환자
(2) 비가역적 혼수상태(irreversable coma) : 의식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깊은 혼수상태
(3) 영구적 식물상태(permanent vegetative state) : 각성 주기는 있으나 의식과 인지가 완전히 소실된 상태로서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
(4) 중증 치매(severe dementia) :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자기결정능력을 상실한 상태
(5) 기타 회복 불가능한 상태 : 환자∙가족∙의료진이 사전돌봄계획(ACP)을 통해 논의하여 결정한 경우
한국과 비교하면 대만은 말기환자 외에도 혼수상태(코마), 식물인간상태, 중증 치매, 기타 ACP에서 결정된 상태까지 포함하여 연명의료 중단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한국은 죽음의 범위를 심폐사(cardiac death)를 원칙으로 하되, 장기기증을 전제로 한 뇌사까지 한정하고 있으며, 연명의료 중단 결정의 기준으로는 ’임종 과정에 있음‘을 제시한다. 다만 호스피스 전문기관 전원 요건으로는 더 넓은 범위의 ’말기환자‘를 인정한다.
대만은 한국에서 엄연히 살인방조나 살인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할 수 있는 혼수상태, 식물인간상태, 중증 치매, 기타 회복 불가능한 상태까지 연명의료 중단 범위를 확대하였다.
3) 대만은 연명의료 중단의 범위를 확대함과 동시에 연명의료 중단 대상 항목도 획기적으로 확장하였다. 한국의 경우 연명의료 중단 대상은 심폐소생술(CPR), 혈액투석(dialysis), 항암제 투여(chemotherapy), 인공호흡기 착용(mechanical ventilation), 체외생명유지술(ECMO 등), 수혈, 혈압상승제 투여 등이다. 그러나 대만은 위 항목 외에 중증 감염에 대한 항생제, 인공영양(artificial nutrition), 인공수액(artificial hydration) 등을 추가하여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다 폭넓게 보장하고 있다.
임종과정에서 존엄한 죽음을 방해하는 대표적 장비는 인공호흡기와 인공영양 공급 장치이다. 한국은 인공영양 공급의 중단을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환자의 선택권을 제한한다. 그러나 대만은 ACP의 내용에 따라 인공영양은 물론 인공수액 공급도 중단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는 환자가 원할 경우 단식에 의한 존엄사(VSED, voluntarilly stopping eating and drinking)까지 가능하게 하며, 일부 상황에서는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까지도 허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영양이나 수액 공급은 말기환자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으므로, 대만의 제도적 선택은 환자 고통 경감 측면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연명의료 결정과 관련하여 정교한 법 조문이나 기술적 세부 사항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제도 설계이다. 임종과정이나 말기환자와 같은 막연한 개념 정의보다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기준과 범위, 대상 항목을 전향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더 솔직하고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대만은 연명의료 관련 2 법을 통해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를 비교하면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은 성찰 없는 제도화 속에서 이해관계에 치우쳐 졸속으로 만들어졌음이 드러난다. 연명의료 중단결정 절차의 까다로움 이전에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확립하는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법이 대만 수준으로만 개정되어도 당장 안락사를 허용하라는 시위는 잦아들 것이며, 곡기를 끊는 캠페인도 줄어들 것이고, 비싼 수수료를 내고 스위스행 항공기를 탈 이유도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선행 조건이 충족된 후에야 다음 과제인 병원죽음과 자택죽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아직 요원하다. 결국 한국의 지금을 살아가는 고령의 예비환자들은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기 스타일에 맞는 죽음을 사유하고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2024년 현재, 한국에서 65세 이상 고령자는 1천만 명을 넘어섰으며(19.2%), 고령자 가구는 500만 가구를 넘어섰다. 고령자 가구 중 1인 가구의 비율은 37.8%로 이미 200만 가구를 초과하였다. 인구의 고령화와 함께 고령자 세대의 1인 가구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심각하다. 젊은 인구는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빠져나가고 빈집은 늘어나는 가운데, 재가복지시설, 요양원, 요양병원으로 대표되는 ’트라이앵글‘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데이케어센터에 다니던 누군가가 몸을 다쳐 요양병원에 입원하였다느니, 요양원에 입소한 누군가가 요양병원으로 옮겨간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다느니, 심지어는 혼자 사시던 누군가가 음독자살을 하였다는 소문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한국보다 고령자에 관한 통계에서 한 발 앞서가는 일본은 1995년 고베 지진 발생 5년 후인 2000년에 세계 최초로 공적 개호보험(간병보험) 제도를 도입하였다. 공적 개호보험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사회복지에 대한 마인드가 유난히 강해서라기보다는, 급격한 고령화 추세와 가족 돌봄의 한계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였다. 다만 고령자에 대한 간병 재원을 조세가 아닌 보험으로 해결하려 한 점에서 첫 단추를 잘 꿰었다고 할 수 있겠다.
8년 후인 2008년 한국은 장기요양보험 제도를 도입하고 각종 프로그램(방문요양, 방문간호, 요양원, 요양병원 등)을 시행하면서 일본의 제도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한국은 고령자 간병 문제에서는 흉내 바둑을 두듯 철저하게 일본을 뒤따라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형해화되는 현장을 보게 된다. 珍光의 길지 않은 현장 경험에 의하면, 사회복지 종사자들은 제도와 봉사 사이에서 딜레마를 안고 복지행정요원에 안주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만큼 복지수급자는 도구화되고 수단화될 수밖에 없다. 사회복지분야 학자들 역시 한국형 복지모델을 구축하는 일은 요원한 채, 해외 자료를 단순 번역하여 전달하는 형편에 머물러 있다.
일본에서 개호보험이 시행된 지 25년이 경과한 지금, 몇 가지 긍정적인 신호들이 발견된다. 고령환자에 대한 돌봄 사각지대, 일명 ‘개호 난민’의 문제가 대부분 해소되었으며, 종래 가족 돌봄을 책임지던 여성(‘며느리 돌봄’)을 돌봄의 굴레에서 해방시켰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20여 년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간병 전문인력이 꾸준히 양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병 인력의 처우 문제, 재정 악화로 인한 서비스 축소와 본인 부담금 인상 추세 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일본의 개호보험으로 대표되는 고령자 돌봄 제도가 비교적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국에는 없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주치의(family doctor)’ 제도가 비교적 정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가 좁혀져 있다는 것인데, 이에 비해 한국의 의사들은 전문가로서 특권 의식이 강하다. 특권의식이 강한 만큼 첨단 의료기술 면에서는 장점을 보이지만, 편안하고 친절해야 할 죽음의 문화 앞에서는 솔직함과 겸손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둘째, 제도의 운영 면에서 일본은 지방정부가 운영 주체로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편이다. 반면에 한국은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중앙집권적 조직이 장기요양보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珍光의 경험에 따르면 국민건강보험은 장기요양보험제도를 철저히 매뉴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원과 통제를 받는 조직들 역시 지나치게 매뉴얼과 문서(red tape)에 의존하게 된다. 사회복지제도는 본래 현장 중심이고 사례 중심이어야 하며, ‘지역 돌봄’으로 지역화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다. 현재의 중앙집권적 방식이 고령환자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피부에 와닿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셋째, 일본에는 죽음의 문화를 정면으로 직시하며 이를 선도하는 계층이 많다는 점이다. 그들은 고령자 간병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하며, 사회복지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은 죽음을 직시하고 사회적 담론을 이끌어가는 지도층이 턱없이 부족하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 역시 늙고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며, 도덕적 직무유기의 상황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이상의 견해는 어디까지나 고령의 예비환자의 입장에서 본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전문가들과 지도층의 분발을 촉구하는 호소로서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