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A-1

제1장 A 제2장 헤라클레이데스의 바자

by 김진광

제1장 A


언제부터인가, 오랫동안 영어 알파벳 첫 글자 A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138억 년 전의 우주와 46억 년 전의 태양과 지구와 38억 년 전의 생명과 20만 년 전의 인간이 동일한 시공간에서 그물처럼 연결되는 가운데, 인류 역사에서 기원전 1천 년의 기간이 무척 중요한 시대인 것으로 느껴졌다. 굳이 야스퍼스(K. Jaspers)의 나래티브, 축(軸)의 시대(Achsenzeit)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21세기에 이르는 수많은 인류 사건들과 인과의 수수께끼가 대부분 기원전 1천 년 동안에 실마리가 만들어졌을 것 같은 상상과 추론이 확신으로 이어지는 어느 시점, 珍光은 비록 아마츄어에 불과하고 날마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동굴 속을 헤매는 히브리 노예의 심정으로 뭔가 기록을 남기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영어 알파벳의 원조가 되는 그리스문자는 기원전 1천 년경, 페니키아 상인들이 페르시아와 스키타이를 상대로 하는 중개무역으로 재미를 보는 중에 고안한 글자에서 기원하였다. 초기 페니키아문자에서는 A의 모양이 저녁 7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것이 그리스로 넘어와서는 황소의 형상을 180도 뒤집어놓은 모양인 오늘날의 A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珍光의 추론에 의하면, 대문자 A는 소를 정면에서 바라본 이미지이고 소문자 a는 소를 측면에서 본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은 결코 뒤집거나 추상화하는 잔재주를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니키아 상인들이 만든 알파벳은 옆 나라들에도 전해져 글자의 모양은 다르지만 음성은 그대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히브리어 문자의 첫 글자와 페르시아어의 첫 글자 모두 황소를 뜻하는 알렢(alef)이다. 이와 같은 유형을 이집트의 상형 표의문자와 인도 산스크리트 설형 표음문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보다 앞서 중국 상(商)나라에서는 갑골형 표의문자가 발생하였다. 한자(漢字) 牛(우) 역시 소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와 동물을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말(言語)과 기억과 감정은 하늘을 나는 새나 바다의 물고기나 육지의 짐승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본성이나, 글자(文字)는 기억과 감정을 구조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한 대뇌의 작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농경정착 생활을 기반으로 한 청동기 사회에서는 제식과 계급지배와 성문법과 상거래의 보증을 위한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문자가 필요하였으며,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되어 인류는 점토판과 파피루스에 문자를 적기 시작하였다.


정면성

먼저 두 가지 정도의 관심사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첫째 인류가 문자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무렵은 식물의 작물화와 동물의 가축화가 정착한 시점이라는 점이다. 즉, 인류 역사에서 불이 발견된 지 한참 후 토기와 청동기가 발명되고 인구가 늘어나고 생활경제가 수렵채취에서 벗어나 농경정착으로 변화하고 상업과 수공업이 활성화되어 가는 시점이라는 점이다.


문자의 시대는 잉여생산물에 의한 원시적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는 한편으로, 도시화 분업화와 더불어 성문법에 의한 계급질서가 체계화되었으며 또한 빈부격차 등 사회문제가 동시에 익숙해져 갈 즈음이라는 점이다. 문자는 스키타이나 흉노 등 유목국가에서 보는 것처럼, 비록 국가형성의 필요조건은 아닐지라도 정주생활을 시작한 농업사회에서는 중요한 생활수단이 되었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다. 밭을 경작하고 물건을 운송하며 유사시에는 식용으로 쓰였다. 소는 제사를 위한 희생제물로서도 양이나 염소 비둘기 곡물가루에 비해 훨씬 더 중요하였다. 따라서 농경정착 사회에서 문자의 첫 글자가 소 그것도 거세한 황소를 상징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말(馬)이 중요시되는 것은 유목국가와 농업국가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부터이다.


두 번째 관심사는 페니키아어와 히브리어의 알렙, 그리스어의 대문자 알파에서 보는 것처럼, 왜 소의 모양을 형상화한 첫 글자가 정면성(正面性)의 원리를 따르고 있느냐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가 만든 문자는 왜 알타미라 동굴의 들소 그림과 같이 다이나믹한 한 장면에 대한 스냅샷의 포토이미지가 아니고,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서 보는 것처럼 정형화된 정면성의 원리를 따르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할 것 같다. 인간이 만든 문자는 예술적 표현의 수단이기보다는 인류가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명령과 의사소통, 또는 물건의 거래와 증거보존의 수단으로서 우선적으로 필요하였을 것이다. 예술적 측면에서만 보면 구석기시대의 알타미라 동굴의 들소 그림으로부터 기원전 5세기 미론(Myron)의 원반 던지는 사람을 거쳐, 19세기의 인상파 화가로 이어지는 예술 작품이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걸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기하학적으로 정형화된 벽화나 조각보다 더 독창적이고 더 우월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포토이미지

어떤 현상을 포토이미지(Photoimage)로 기억하는 방식은 인류의 원시 유전자 속성에 더 어울리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포토이미지는 원시 유전자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인류에게 보다 사실적이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험을 앞두고 시간제한 속에서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방법이 투입한 시간에 비해 훨씬 가성비가 좋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포토이미지로 기억하기는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생산성이 뒤떨어진다고 하는 ‘공부하기’에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다만, 속성으로 기억하는 방식은 휘발성이 강하므로 시험이 끝난 후에는 일정한 형식으로 기록해 남겨 둘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정형화는 상업적 측면에서는 대량생산에 필연적인 요소여서, 인류는 상당 기간 예술과 자본 중에서 자본을 우선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보다 더 풍요로운 의식주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인류는 표준화와 그 수단으로서 분업의 원리를 선택하였다. 자본은 노동과 결합하여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자본의 축적은 미래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권력자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용한 통치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예술성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 상(商)나라의 갑골문(甲骨文)과 주(周)나라의 금문(金文), 춘추전국시대를 이은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전서(篆書)의 아름다움은 1,500년이 지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독창적인 서체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인류 역사에서 문자는 농업사회가 정착되면서 발명되었고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본격적으로 통용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스키타이와 흉노 등 중앙아시아 유목국가들 대부분에게는 독자적인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돌궐 동호 선비 거란 여진의 문자가 국가의 멸망과 함께 쉽게 사라져 버린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문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는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나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성이 별로 없었다. 기억 속에 남아 구루(Guru)에서 구루로 전해지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문자

문자는 처음에는 상형(象形 hieroglyph) 또는 설형(楔形 cuneiform)의 형태로 출발하여 점차 뜻글자(表意文字 ideogram)와 소리글자(表音文字 phonogram)로 진화하였다. 소리글자는 음절문자(音節 syllabary) 또는 음소문자(音素 alphabet)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음소문자가 한글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자라는 것이 농경정주 생활에서 인구가 늘어나고 계급사회가 형성되는 가운데 잉여생산물의 거래 또는 조세 부과와 제식과 법령의 공포와 기록의 수단으로서 필요하였기에, 정형성이 필수적이었고 예술성은 부수적이었다고 하겠다.


구석기 자연주의 예술에서 보는 스냅사진과 같은 포토이미지는 여러가지 시사점을 준다. 창조는 논리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상상과 시행착오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언어나 예술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복식부기를 배우는 지름길은 감각적으로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외우거나 그리는 것이다.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초기 단계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꾸 읽고 외우다 보면, 대뇌에서 데이터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상호작용을 일으켜 논리적으로 연결되고 정리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유전자와 기억장치는 신석기보다 구석기에 특화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교육 전문가들에 의해 교육과정을 단계별로 나누고 나이에 맞게 진도가 나아가도록 설계한 공부 방법이 천자문을 읽히고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던 조상들의 공부 방법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다. 스냅샷으로 포토이미지를 저장해가는 훈련이 인간의 뇌에게는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컴퓨터를 복잡한 매뉴얼에 의존하여 낑낑거리며 배우기보다는 먼저 현장에서 단순하고도 실전적으로 익히고 나서, 인과관계와 논리구조는 뇌 속에서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하는 교육방법이 더 효과적임은 경험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인간이 불을 발명하고 돌칼을 만들고 토기를 굽고 야금술을 익히고 바퀴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동물을 길들이는 오래된 행동들은 포토이미지와 시행착오와 돌연변이의 산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천재는 포토이미지의 데이터 저장량과 이를 응용하기 위한 검색 능력에 비례한다.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의 탐사보고서 「역사(Historia)」는 이집트, 리디아(Lydia), 메디아(Media), 아시리아(Assur), 바빌로니아(Babylonia), 페르시아(Persia),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 이오니아(Ionia) 지방의 도시국가를 답사하고, 스키타이(Scythia)의 흥망성쇄와 함께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2차에 걸친 전쟁을 다루고 있다. 특히, 스키타이에 관한 기록은 사마천「사기」의 흉노열전과 함께, 문자 역사가 거의 없는 북방 유목제국을 다루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지구상에서 유목민족에 관한 기록은 드물다. 유목민족의 특성상 문자로 된 기록이 많지 않고 설령 기록이 있다 하더라도 정확성이 의심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이 대적하는 상대방 국가의 기록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왜곡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은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역사서를 쓰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을 보여주고 있다.


페르시아와 한나라가 제국을 통일하였음에도 북방의 유목민족은 초원 전투에서는 버거운 상대였다. 마세게타이, 스키타이, 흉노, 돌궐, 거란, 여진, 몽골 등에게 호되게 당한 역사가 있다. 이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단서가 말(馬)이었다고 생각한다.


유목민족은 광활한 초원에서 수시로 이동하는 민족이다. 지역 개념이 없어 언제든지 치고 빠지는 청야(淸野)전술을 구사하고, 어려서부터 기마궁수(騎馬弓手)로 단련된 민족이다. 그들이 패배한 것은 온전한 실력 차이에 있다기보다는 농경정착 민족의 편리함과 사치에 맛들인 결과이다. 공원국의 「유목문명기행」에 따르면, 인류는 기원전 4천 년부터 말을 길들이기 시작하였다. 말에게 재갈(bit)을 물리고 굴레(bridle)를 씌우고, 고삐(reins)를 채우며 안장(saddle)과 등자(stirrup)를 얹히면서, 말의 용도는 겨울식량과 운송의 수단에서 전투용으로 변화하였다.


기원전 2천 년에 말이 끄는 사륜전차가 등장하고, 기원전 1천 년부터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기마궁수가 초원을 누비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기마유목민족의 출현이다. 말과 활의 절묘한 조합으로 스키타이와 흉노 제국이 등장한 것이다.


말은 덩치에 비해 겁이 많고 섬세한 동물이다. 소는 힘이 세지만 빠르지 않고 낙타는 다양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말은 들판과 사막과 열대 우림은 물론 혹한의 극지방을 달린다. 인간은 말로 인하여 초원지대로부터 추운 지역과 높은 산과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으로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인간이 말을 이용해 극지로 갔다기보다는 말을 따라가다가 극지에 도달한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다.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자 유럽국가들은 대서양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무슬림과의 전쟁에 단련된 스페인의 하급기사들은 불과 수십 마리의 말들로 아즈텍(Aztec)문명과 잉카(Inca)문명을 도륙하였다. 이로부터 150여 년 동안, 정복자의 학살과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사라졌다. 19세기 들어서는 말 탄 문명인들에게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제2장 헤라클레이데스의 바자


네스토리우스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386년경 시리아 서쪽 게르마니키아 출신으로, 안디옥(Antioch)에서 신학을 배우고 수도원 생활을 거쳐 428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교부로 임명되었다. 당시 동로마 교회에서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사이에 심각한 주도권 다툼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새롭게 부상하는 콘스탄티노플에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루스(Cyrillos, 375~444)는 431년 에베소(Ephesos) 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아파가 멀리서 오느라 미처 도착하지 못한 가운데 알렉산드리아파를 주도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이단(heresy)으로 정죄하고 파문하였다. 파문장에서는 네스토리우스를 예수 12제자 중 배반자 가롯 유다에 비유하였다.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한 사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예수의 신인양성론(神人兩性論)으로,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가 신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후 신성(Logos)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다른 하나는 마리아의 신성 부정론으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 신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이다.


훗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네스토리아니즘(Nestorianism)에서 전혀 이단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단언하였다. 오늘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서무오설이나 교황무오설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수많은 이단들이 양산될 수 있다.


히파티아

삼촌인 대주교에 이어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에 오른 키릴루스는 과격한 방법으로 이단과 이교도들을 단죄하기 시작하였다. 415년에는 친위세력을 동원하여 유대인 회당을 습격하고 학살을 자행하여 그들의 재산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이집트 총독인 오레스테스와 갈등이 심화되었다. 키릴루스는 총독과 친분 관계에 있던 저명한 여성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히파티아(Hypatia, 355?~415)의 죽음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지성 히파티아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여러 나라에서 많은 학생들이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었다. 히파티아는 왕자나 철학자 등 다수의 남성들로부터 구혼을 받았으나,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라고 답하며 거절하였다. 415년 3월 그녀는 무세이온(museum)에서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주교 휘하의 친위행동대, 일명 ‘파라발라니’라 부르는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납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히파티아는 마차에서 끌어내려져 캐사리온 교회로 끌려가 날카로운 도자기 조각들에 의하여 살이 찢겨 나가는 고통 속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시신은 도시 밖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워졌다.


히파티아 살해 사건은 로마제국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동로마 황제는 물론 서로마 황제까지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키릴루스는 파라발라니의 지휘권을 빼앗겼으나 머지않아 다시 되찾게 된다. 이로써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마지막 도서관장의 딸이자 마지막 천체과학자는 도서관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세기의 기독교 역사가는 히파티아 사건이 순전히 정치적 동기에 의해 자행된 것이며 그녀의 이단성은 찾아볼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18세기의 비평가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이 히파티아 살해 사건은 편협하고 악랄한 성직자들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고대 자연과학의 종말이라고 비판하였다. 지금도 키릴루스 교부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루터교, 성공회에서 공히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교도와 이단으로부터 기독교의 정통성을 지켜냈다는 의미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 학당」에는 58명에 이르는 고대의 학자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 흰옷을 입은 여성이 히파티아다. 그녀는 조로아스터, 디오게네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등과 함께 홍일점으로 나란히 서 있다. 프랑스 시인 샤를르 리즐은 시집 「히파티아」에서 그녀를 찬미했다.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몸은

그리스의 청명한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홀로 변하지 않고 살아남아

비록 죽음은 떨리는 우주를 흩트려 놓았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히 불길로 눈부시고

모든 것은 그녀에게서 다시 태어나

세상은 여전히 그녀의 흰 발아래 엎드려 있다”


2009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아고라(Agora)」가 제한적인 나라에서만 상영되었다. 아고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연구소를 뜻한다.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그리스 자연철학에 입각하여 ‘진리’를 내세우면 신플라톤주의자나 영지주의자로 내몰릴 수 있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이단까지는 아니었고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연합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영지주의와 경계가 모호하여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이단으로 정죄될 수 있었다. 히파티아는 이를 조심하여 영지주의자들과는 거리를 두고 종교와 정치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나름 고심했고 한다. 그러나 보기 드물게 미와 지성을 겸비한 여성으로서 유명세에 괘씸죄가 발동하면 약이 없는 경우가 많다.


성 바돌로매 축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한 히파티아의 죽음 사건이 헬레니즘과 기독교가 충돌하는 가운데, 기독교 세력이 이교도 혹은 이단을 비이성적으로 정죄한 사건이라면, 1572년 프랑스의 성 바돌로매 축일에 일어난 집단학살은 기독교 구교세력이 신교세력을 박해한 사건이다. 바돌로매(혹은 나다나엘 Bartholomew)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예수가 ‘간사함이 없는’ 자라 칭찬했던 제자이다. 예수 사후 동방전도에 나서 인도 혹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72년 8월 24일 새벽 4시, 교회당 종소리와 함께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은 시작되었다. 구교 세력의 가톨릭 군대는 위그노(Huguenots)라고 불리는 신교 세력의 지도자 해군 제독 콜리니(Coligny)를 비롯한 수천 명의 신교 교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학살은 지방으로 확산되어 불과 일주일 만에 5만 명의 위그노들이 살해되었다. 콜리니의 시신은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으며 성난 군중들은 시신을 훼손해 파리 거리를 끌고 다녔다. 폭도로 변한 군중들은 남녀 아이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으며 위그노 사냥은 마치 대중적인 스포츠처럼 센 강을 피로 붉게 물들이며 곳곳에 시체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 사건은 16세기 종교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珍光은 생각한다. 인간의 폭력성은 종교와 무관하며 어떤 면에서는 종교가 더 폭력적이기까지 하였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폭력과 종교의 가면을 쓴 정치는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제물로 삼았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이 무섭다고들 한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물과 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 순간, 신은 사라지고, 신이 없는 빈자리에 그들만의 이기심만이 오롯이 자리 잡는다. 일방적으로 매도하자면, 종교폭력은 이단의 닮은 꼴이며 달의 어두운 뒷면에 지나지 않는다.


네스토리우스가 동쪽으로 간 까닭

네스토리우스는 에베소에 감금되었다가 안디옥 페트라(Petra)를 거쳐, 이집트 히비스 수도원으로 유배되어 450년에 생을 마감한다. 네스토리우스가 유배지에서 익명으로 쓴 책의 이름이 「헤라클레이데스의 바자」다. 죽는 날까지 익명으로 글을 남겨야 했던 심정이 처절하기까지 하다.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는 교인들은 페르시아로 도피하여 498년 동방독립교회를 세우고 동로마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독립교단을 출범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전도사들은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를 받아 가면서, 인도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 소그디아나를 거쳐 천산산맥 북쪽을 넘어,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를 거쳐 중국으로 진출한다. 이들은 현지화를 중시하여 중앙아시아 전도 여정 중에 에프탈(Ephtalites) 문자와 돌궐(突厥) 문자를 창제하기도 하였다. 651년 사산조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이슬람 압바스왕조가 들어섰음에도, 네스토리안들은 번영하여 기술자, 의사, 번역가 등 특화된 직업에 종사하면서 선교에 힘썼다. 왕의 주치의가 되기도 하고 우물을 파는 기술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대 그리스어 고전들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잘 보관해 둔 결과, 먼 훗날 유럽으로 역수입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된 16세기 르네상스에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의 공로가 숨어 있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 사후에 기독교가 사도 바울(使徒 Paul)을 중심으로 아시아 서쪽으로만 전파된 것으로 나오지만, 사도 도마(使徒 Thomas)의 인도 전교가 확인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동방전도 역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도 도마

1945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Nag Hammadi) 마을 뒷산 동굴의 항아리에서, 도마복음을 비롯한 여러 문서가 온존한 채 발견되었다. 콥트(Copt)어로 기록된 이 문서는 카이로 시장을 돌아다니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고대 신화와 영지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정신분석학자 융(Carl Gustav Jung)의 노력으로 카이로 박물관으로 돌아기게 되었다. 도마복음은 한때, 영지주의 색채가 강한 외경 정도로 취급되었으나, 인도에서 도마 사도의 전승이 여러 군데 발견되면서 현재는 서구 신학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은 현재와 같은 상태로 기록되기 전에 먼저, 마가복음과 예수의 말씀(Logion)을 기록한 Q문서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마복음은 Q문서 외에 또다른 원본 문서일 수 있다. 도마복음은 로기온(말씀)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그 기록 방식이 공자의 논어나 석가모니의 불경과 유사하다. 아마도 도마복음은 공관복음의 인도판 아니면 더 나아가서 아시아판 복음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만큼 당시 대승불교의 흐름과 유사하게 단순명료하고 신비주의적이면서 밀교적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635년경 중국 당태종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를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허용한다. 한편 당나라는 이민족 장수를 변방의 절도사로 삼아 국경을 방어하게 하는 이른바 굴레와 고삐라는 기미(羈縻)정책을 채용하였다. 이는 후한시대(AD 25-220) 반초(班超)가 서역 국가를 공략하면서 쓰던 방식인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연상시킨다. 대표적인 절도사 가서한(哥舒翰)은 돌궐 출신 절도사로서 토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전과를 세웠으나, 안록산(安祿山)의 난에 처형당한다. 고선지(高仙芝)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절도사로서 서역 원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751년 달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안록산의 난에 사망하였다. 안록산(安祿山)은 소그드인의 후손으로 거란족과 여진족을 관할하는 동북부 담당 절도사였다. 세력 면에서 절도사 중 가장 강력하였으며 한 때, 양귀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755년, 부하인 사사명(史思明)과 함께 안사(安史)의 난을 일으켰으나, 난리 중에 둘 다 자식들에게 살해되었다.


781년에는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 대진사(大秦寺)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대진=로마, 경교=기독교)가 건립되었다. 안록산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네스토리안 장수 이사(伊斯 Mar Yesbuzid)의 제안에 따라, 교부 경정(景淨 Adams)이 비문을 짓고 여수암(呂秀巖)이 글씨를 쓴 이 비문은 동양 최고(最古)의 기독교비로서, 총 1800자의 한문과 시리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십자가 아래 여의주와 연꽃과 부운(浮雲)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에 불교적 요소와 도교적 요소를 포용한 것으로 보인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가 로마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정착하기까지 4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네스토리안은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마리아의 신성 논쟁에 휘말려 이단으로 몰리고 나라를 유랑하면서도, 타 종교를 포섭하고 현실 정치와 경제에 적극 개입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과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소르각타니 베키

1206년 테무진이 몽골고원을 통합하고 오논 강변에서 열린 쿠릴타이(Quriltai 족장회의)에서 칭기스칸으로 추대되면서 세계사에 유래없는 정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칭기스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주치’, 차남은 ‘차가타이’, 3남은 ‘오고타이’, 4남은 ‘툴루이’였다. 1227년 칭기스칸이 서하(西夏 중국 북서부에 티베트족이 세운 나라) 원정 중 부상으로 사망하자, 후계자의 지위는 논란 끝에 3남인 오고타이에게 넘어갔다. 후계 자리를 사양한 4남 툴루이와 부인 소르각타니 베키 사이에는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 ‘아리크부카’ 등 네 아들이 있었다.


일 칸(IL Khan)국의 재상이면서 의사이자 역사가였던 라시드 우드딘(1250-1318)은 「집사(集史)」에서 소르각타니 베키는 총명하고 영리하며, 능력 있고 강인한 인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녀의 심모원려에 의하여 몽케는 제4대 칸(Khan)이 되고, 쿠빌라이는 제5대 칸이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르각타니가 독실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1252년 그녀가 사망하자 시신은 감숙성의 한 교회에 안치되었다. 그녀는 기독교인임에도 무슬림들에게 호의적이어서 부하라(Buhara) 등 여러 곳에 이슬람 신학교인 마드라사(Madrasa)를 설립하였다.


珍光은 생각한다. 네스토리우스가 450년 이집트 수도원에서 사망한 후로부터 당나라가 멸망하고(907),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거쳐 몽골족의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천년의 세월을 넘어 활발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신약성경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한 예언이 이루어졌다. 사도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사도 도마와 네스토리우스가 동쪽으로 가기 위한 신의 뜻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생을 마감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잘 있거라

나의 친구 사막이여,

유배지여, 나의 어머니여

그대는 부활의 날까지 나의 몸을 지키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