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대한민국 죽음사용설명서
2026년 한국에서 병원 죽음을 다루는 사용설명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전문가의 견해가 아니라, 고령의 예비 환자의 관점에서 본 개인적 의견이다. 珍光은 다음에 제시하는 의견 하나하나에 잠재하는 막대한 이해관계의 무게를 짐작하기에 제도가 쉽게 개선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불행하게도 어느 하나조차 우리 세대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자는 한국의 가파른 고령화 속도와 저출산, 그리고 높은 자살률과 지방 소멸의 현주소를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1) 뇌사와 심폐사의 통일
현재 사망의 기준은 심폐사(심장과 호흡의 정지)를 원칙으로 하며, 장기 기증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뇌사를 인정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뇌사와 심폐사는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동일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뇌사 환자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죽음을 지연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뇌사를 죽음의 기준으로 통일하더라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2) 임종과정과 말기의 통합
연명의료결정법에서 연명의료를 중단하기 위한 기준은 환자가 ‘임종과정에 있을 것’이며,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기 위한 기준은 ‘말기환자일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주관적 의료 판단을 제도적으로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산물이다. 기준은 단순할수록 효과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엄격한 ‘임종과정’ 기준을 다소 완화된 ‘말기환자’ 기준과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말기환자의 호스피스 요건 완화
호스피스기관 전원 요건은 현재 말기 암 환자 등 4대 질환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4대 질환 외에도 가정이나 요양원에서 돌봄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중증 치매 환자‘와 가족에게 심각한 경제적 부담을 주는 ’ 식물인간 상태 환자‘도 포함될 필요가 있다.
4) 연명의료 중단에 인공영양 포함
연명의료결정법에서 중단 대상이 되는 연명의료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혈압상승제 투여, 항암제 투여, 수혈 등이다. 중단이 불가한 행위는 통증 완화 치료, 영양분 공급, 수분 공급, 산소의 단순 공급 등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현장에서 환자에게 큰 고통을 주는 연명의료 행위는 인공호흡기 못지않게 인공영양공급이다. 말기환자로 판정된 이상, 환자나 가족이 원한다면 인공영양공급도 중단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 ’ 의사조력자살‘이니 ’ 안락사‘로 단정하여 의사가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게 해서는 안 된다.
5) 호스피스기관과 요양병원의 통합
한국의 병원 죽음에서 요구되는 ’ 친절하고 편안한 죽음‘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호스피스 서비스의 확충이다. 국가 차원에서 대형병원에 호스피스기관 설치를 의무화하기 어렵다면, 기존 요양병원이 호스피스 전문기관 기능을 병행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보완하고 지원하여야 한다.
6)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에 대한 예우
종래에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지만, 이제는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서, 체외 이탈한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과학적 사실관계를 떠나 시신과 장기는 단순한 실험용 도구나 매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유무와 관계없이 몸은 우주와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존중받아야 한다. 죽은 자의 몸을 다루는 자세와 태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존엄하게 바뀌어야 한다.
7) 사전연명의료 의향서의 법적 효력 강화
현실적으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제도는 ’ 사전연명의료 의향서‘이다. 그러나 현실은 기존의 의사 주도의 ’ 연명의료계획서‘가 병존하면서 제도가 일관성 없이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연명의료계획서 제도를 폐지하고, 환자가 건강한 상태에서 죽음에 관하여 의사와 충분히 상담하고 기록화한 ACP(advance care planning, 사전돌봄계획)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기초로 환자가 자기결정에 따라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하고, 이를 외국의 AD(advance directives, 사전의료지시서)에 준하는 수준으로 법적 효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환자가 충분히 숙고하게 하고 자유의지로 결정을 내리면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자기결정권이다.
8) 의사는 의료인이면서 가이드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도로가 있는가 하면,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도 있듯이 인생은 쌍방향 통행이다. 의료인은 생명을 다룬다는 협의의 기능에만 충실하고 나머지를 믿지도 않는 신의 영역으로 미뤄서는 안 된다.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삶과 죽음 사이의 수많은 스펙트럼이 밝혀지고 있는 이상, 의료인은 생명의 치료사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말고 죽음의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앞둔 환자는 친절한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편안한 죽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1) 대양감(oceanic feeling, 大洋感)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앤서니 스토(Anthony Storr, 1920-2001)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 이론을 토대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켜 「고독의 위로(Solitude: A Return to the Self)」라는 저서에 담고 있다. 珍光에게는 철학자나 종교인의 거창한 고독 담론보다, 스토의 ’손에 잡히는 고독‘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사회적 존재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외부세계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경험과 기억이라는 데이터를 축적해 간다. 그러다 나이가 든 어느 시점부터 기존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면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창조하는 기회에 들어간다.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자신의 심리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유와 상상을 통해 분열된 기억의 조각들은 하나로 통합하고 새로운 창조의 길을 모색하는 행위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우주와 나를 합일화해 가는 과정을 로맹 롤랑은 ’대양적 느낌(oceanic feeling)‘이라 불렀다.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축적된 데이터를 창조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연습이 필요하고, 그동안 나와 외부 세계가 연결되어 온 시스템을 정돈하고 나의 내면과 대화하는 새로운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나와의 대화가 노이즈 없이 주파수 혼선 없이 원활하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독해져야 한다.
강요된 고독은 감옥과 같아 정신을 병들게 하지만, 자유의지로 선택한 고독은 또 다른 나와의 대화를 가능케 한다. 그것은 융이 말한 ’ 생의 후반기‘와 죽음을 잇는 경계에서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축복이다. 내면의 훌륭한 데이터를 사유와 상상으로 승화하지 못한다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생략하는 셈이다. 임종 직전까지 의식이 살아 있는 순간, 곧 사라지고 말 물질 계산이나 하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심정은 얼마나 허탄한 일인가.
우리는 괴로움이 외로움보다 더 괴로운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고독에 들어가 내면을 들여다보고 대화함으로써 창조물을 남긴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여기에는 ’ 고독하기‘와 ’대화하기‘라는 두 개의 연습이 필요하다. 수많은 선각자들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고독을 통해 자기 자신과 대화할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2) 고독의 의미
미국 해군 제독이자 탐험가였던 리처드 버드(Richard E. Byrd, 1888-1957)는 1934년 남극의 기상 관측 기지에서 홀로 겨울을 보내며 6개월의 기록을 「Alone」이라는 책에 담았다.
그는 4월 14일 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후 4시, 영하 31도, 오늘도 산책을 하다가 침묵을 듣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낮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으며, 밤은 거대한 평화와 함께 태어나고 있었다. 여기에는 조화롭고 소리 없는 우주의 가늠할 수 없는 작용과 힘이 있었다. 조화, 바로 그것이었다. 그 조화는 침묵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것은 평온한 리듬, 완벽한 화음이 빚어내는 선율, 어쩌면 천체가 내는 음악이었다.
그 리듬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 순간, 인간이 우주와 하나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리듬은 너무도 질서 정연하고 조화롭고 완벽하여, 그것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일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에는 분명 목적이 있으며, 인간은 그 전체의 일부로서 결코 우연한 부산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절망의 핵심에 닿아보고, 그 절망이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질서 정연한 우주, 코스모스는 절대로 카오스가 아니었다. 인간은 낮과 밤이 그러하듯, 합법적으로 그 우주의 일부였다.”
버드는 침묵, 평화, 조화, 리듬, 질서 정연함, 그리고 코스모스가 곧 고독의 의미이자 언어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코스모스(cosmos)라는 이름의 꽃은 국화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로, 원산지는 멕시코다. 18세기 스페인 탐험대가 발견하여 스페인을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한국에는 1910년대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와 지금은 가을을 대표하는 꽃으로 자리 잡았다. 순우리말로는 가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하여 ’살랑이꽃‘이라 부른다. 올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우주와 인간의 합일을 사유하고 상상해 볼 일이다.
3) 창조적 고독
고독은 상상과 창조의 인큐베이터라고 할 수 있다. 사상가 몽테뉴는 ’누구나 내면 깊숙한 곳에 자신만의 작업장을 가지고 언제든 그곳에 들어가 자유와 고독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글쓰기는 치료의 한 형태다.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상황에 내재된 광기, 우울, 극도의 두려움을 어떻게 피하고 사는지 궁금해진다.‘고 했다.
상상력은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서 특히 발달하는 경향이 있다. 고독은 상황에 따라 해로운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이로운 영향을 주기도 한다. 상황이 지나치게 열악하여 정신병적 증상을 일으킬 정도가 아니라면, 인간관계가 거의 없거나 부족한 상태는 오히려 상상력의 밑거름이 된다.
상실이나 분리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창조적인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우울의 자극을 받아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며, 삶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자신이 가치 있고 능력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되찾으려 한다. 인류 역사에서 천재라 불릴 만한 인물들의 삶을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아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그의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한다. 그리고 속세의 목표와 애착에서 벗어나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내면에 있는 정원을 경작하기 시작한다.
칸트, 비트겐슈타인, 뉴턴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들은 독창적이고 추상적인 사고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으며, 다른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지 않은 고독한 천재들이었다. 높은 수준의 추상적 개념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고독과 강력한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삶의 대부분을 고독하게 보내지 않았다면 그런 업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삶의 중반기까지는 인간관계나 친밀감에 집착하다가, 삶의 후반기에 들어서는 자신의 내면과의 대화를 중시하는 현상은 베토벤, 리스트, 슈트라우스, 브람스의 음악에서도 잘 드러난다. 베토벤 현악 4중주 16곡은 좋은 예가 된다. 초기 작품(제1~6번, 1798-1800)에서는 선배인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대담한 표현이 돋보인다. 중기 작품(제7~11번, 1806-1814)에서는 본격적으로 베토벤의 자유로운 형식과 강렬한 감정 표현, 난이도가 나타난다. 후기 작품(제12~16번, 1824-1826)에서는 자신의 내면과의 철학적 성찰이 드러난다. 삶의 후반기에 접어들면, 요절한 작곡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대중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음악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을 일찍 감치 들여다보고 집착하게 되면 위험할 수 있다. 본의 아니게 부모와 조기 사별하는 등으로 일찌감치 내면과의 대화에 들어간 사람들은 비록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천재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잃어버린 친밀한 애착(인간관계)에 대한 보상이었다.
니체는 「선악의 피안(Beyond Good and Evil)」에서 이렇게 설파하였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深淵, abyss)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
이러한 사유와 통찰은 그 자신이 5세 때 아버지가 뇌질환으로 사망하고, 이어 남동생도 사망하는 등 통제할 수 없었던 사건들에 영향을 받은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카프카의 놀라운 소설 세계에는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질책뿐 아니라, 두 남동생의 어린 나이 사망과 세 여동생의 나치 강제수용소 희생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여기에 20세기 초 유럽 자본주의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무자비한 관료주의가 드러내는 개인의 소외와 무기력감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의 소설 ‘성(城, Das Schloss, 1922)’에서 주인공 K는 성(城)과의 소통을 위해 전화국에 가서 전화 설치를 신청한다. 담당 공무원은 신청 서류 양식을 찾지 못해 허둥댄다.
“서류가 여기 어딘가에 있어야 합니다. 분명 있어야 하는데, 저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잘못 분류되었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지금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마침내 그는 한 뭉치의 서류를 찾아 오래 뒤적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게 아니군요.”
그리고는 모든 것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중에 다시 오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그때쯤이면 아마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을 겁니다.”
이것이 막스 웨버가 찬미했던 관료제의 참모습이기도 하며, 21세기 현재에도 민원 창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미 1920년대 카프카의 감수성은 관료주의의 레드테이프(red tape)과 매뉴얼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소외되어 가는 개성의 몰락을 예견했다.
정신질환자의 딜레마는 사랑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친밀한 관계 맺기를 똑같이 절박하게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카프카는 이러한 내적 분열을 막기 위해 글쓰기를 하나의 회피 행동으로 삼았다. 그의 두려움은 누군가와 가까운 관계를 맺을 경우,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지켜주는 유일한 능력(내면에서 서로 갈등하는 요소들을 글을 통해 한데 모으는 힘)이 훼손될 것이라는 데 있었다. 카프카에게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히려 그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4) 고령자의 고독
위에서 언급한 위험 요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령자가 고독을 쉽게 받아들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령자는 천재들이 어린 시절을 겪어오면서 느꼈을 상실과 분리의 고통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늙어 있고, 인간관계의 단절을 힘들어하기에는 이미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러므로 고령자는 두려움 없이 남은 시간 내면을 탐험하며 상상과 창작의 세계에 쉽게 뛰어들 수 있다.
고령자는 자신만의 고독의 작업장에 편하게 들어갈 수 있다. 물론 작업장에 들어가기 전에 작업장 밖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정리할 일이 있다면 미리 정리해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만의 작업장에서 누릴 자유도 제한된다. 이승에서 벌여놓은 일이 많을수록 정리할 것도 많을 것이다. 그것은 재산이나 명예나 공적일 수도 있고, 카르마라 할 수도 있다.
많은 고령자들이 이 카르마의 동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곤 한다. 珍光은 전직 병원장이자 건물주였던 사람이 치매에 시달리면서도 별다른 대비 없이 세상을 떠나, 자식들이 유류분 소송에 휘말리게 하는 것을 보았다. 이 비극의 저변에는 물질주의와 과학주의, 무신론, 그리고 과도한 애착과 무게가 혼재되어 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못하는 집착은 결국 가족에게 상처와 분쟁을 남기며, 인간 존재의 허망함을 드러낼 뿐이다.
고령자는 고독이 자신에게 미치는 해악을 다스릴 수 있다. 독약도 잘 쓰면 약이 된다. 고령자에게는 어린 시절에 겪었을 만한 상실과 분리의 경험은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래이며, 어차피 인간관계도 점차 단절되어 가는 중이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내면세계에서 상상의 탐험을 누릴 자유는 충분히 남아 있고, 그 과정에서 덤으로 생겨나는 창작의 산물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모든 사람이 천재인 것은 아니므로, 천재들이 겪었던 고통의 보상이 그들만의 것이었다면, 우리는 보상 없는 내면의 탐험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고령자에게 고독은 삶의 마지막을 회고하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할 마지막 찬스이기도 하다. 그동안 외연 확장에 힘써왔으니, 조용히 거두어들일 때도 되지 않았는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당장 스스로 고독의 경지에 들어가기를 연습하라. 그러다 보면 내면 속의 선한 존재가 다가올 것이다. 가끔 선하지 못한 존재가 나타나면 선한 의지를 동원하여 단호히 거부하라. 이것이 고령자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축복일 수 있다.
그동안 울고 웃으며 싸워온 세상과 단절한 채, 잠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잃어버린 내면과 다시 대화를 시작하며, 창조적인 사유와 행위에 몰입한다. 역사적 천재들이 그 대가로 치러야 했던 정신질환과 소외, 그리고 고립은 고령자에게는 오히려 견딜만한 독약이다.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충분히 해볼 만한 도전이 아니겠는가. 별다른 창작물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 내면세계의 무한한 우주를 미리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선물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