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사후생
기원전 7세기,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이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며 죽음을 자연의 순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이어 기원전 5세기, 플라톤은 육체(soma)와 영혼(psyche)을 구분하고, 육체의 죽음은 곧 영혼의 해방이며 영혼은 불멸한다고 주장하였다. 약 400년 후, 예수의 가르침은 조로아스터 이후 1천 년간 이어져 온 사유를 통합하였다. 그는 육체(body)와 영혼(soul)이 합일된 인간과 신의 계시와 예언이 통행하는 성령(pneuma, Holy Spirit)을 구별하였다.
중세 기독교사회가 약 1,500년 이상 지속되던 시기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 생각(cogito)하는 나‘는 스스로 사고하고 의식하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판단하는 정신적 존재로서,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적 실체인 신체를 조절하는 주체로 이해된다.
신의 영역인 ’ 영혼‘과 구별되는 인간의 ’정신‘과 ’물질‘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철학과 과학의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지동설,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으로 대표되는 17세기 과학혁명을 촉발하였다. 과학은 기술과 결합하여 폭발적으로 발전하였고, 그 결과 뉴턴의 만유인력,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그리고 현재의 양자역학과 인공지능(AI) 시대로 이어졌다.
과학기술의 한 분야인 의학 역시 진화론과 유물론의 세례를 받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인간의 육체에 한정되었으며, 영혼은 종교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정신 또한 육체의 일부인 뇌의 파동과 전기적 에너지 작용으로 설명되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의식이 뇌에 국한되지 않고 세포 단위 하나하나에 내재한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양자역학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기존의 유물론∙진화론∙과학기술적 접근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와 같이 과학은 철학과 함께, 시작부터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전제로 발전해 왔다. 의학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이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영혼과의 경계를 탐험하면 할수록, 과학기술적 방법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또 다른 경험의 세계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유물론적 과학주의에 경도되어 온 의사들에게는 다소 곤혹스러운 상황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당분간 생명을 넘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탐구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생명 현상만 연구하기에도 벅찰 뿐 아니라,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여전히 자신의 전문 영역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1부의 ’죽음 사용 설명서‘에서 의료화되고 제도화된 죽음의 현실과 문제점을 어느 정도 정리하였다. 특히 한국의 실정이 녹록지 않으며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못할 것임을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죽음예비환자는 행간에 숨어 있는 정보를 통해 각자가 죽음의 결정 주체가 되어 당면한 위험을 최대한 회피하고 스스로 편안하고 존엄한 죽음을 모색해야 함을 확인하였다.
이제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눈을 돌릴 차례이다. 사후 세계 또는 사후생(死後生)에 대한 관심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는 듯하다.
첫째, 생명에 대한 관심과 마찬가지로 사후세계에 대한 탐구도 일부 소수의 의사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죽음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직업이 의사이기에 그들의 관심은 더욱 절실할 것이다. 특히 정신과 의사나 사후생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의사들이 이에 해당한다. 의학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기에 자료의 곳곳에 관찰과 증명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적 방법론이 반영되어 있다.
둘째, 사후생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역시 유물론과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학문적 전통 속에 있기 때문에, 사후생에 대해서도 이를 경험한 사람들의 사례와 증거를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evidence-based approach). 이러한 접근은 신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영혼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연구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고령의 예비 환자에게 사후세계는 중요한 문제다. 그들은 의사들만큼 한가롭지 못하다. ’ 죽으면 끝이다 ‘라는 관점을 유지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생애 말기에 건강을 관리하며 고통 없는 죽음을 바라지만, 말기 암 환자나 중증 치매환자가 되어 고생하다 죽어도 어쩔 수 없다.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운명이라는 강물에 맡겨진다.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그동안 선각자들이 수집해 놓은 다양한 사례 유형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밑도 끝도 없는 철학적 담론이나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적 교조 앞에서 당황할 수 있다.
흔히 죽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박사의 ’죽음의 5단계‘를 떠올린다. 珍光은 발달단계이론의 모델을 연상시키는 이 5단계설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만 죽음 앞에서 5단계 또는 7단계의 감정이 뒤섞여 나타난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겠다. 그래서 자주 되새기게 된다. 예컨대 에드거 앨런 포의 ’ 아나벨리‘와 ’ 레이븐‘을 읽으며, 이 시들이 각각 죽음의 몇 번째 단계에 놓여 있는지 상상해 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기억하기로 했다.
’ 부분적으로 타협하면서도 우수에 젖어 초승달을 바라본다 ‘
* 부정(denial) :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분노(anger) : ‘왜 하필 나야?’
타협(bargaining) : ‘조금만 더 살게 해 주세요’
우울(depression) : 절망과 슬픔에 빠짐
수용(acceptance) : 죽음을 받아들이고 평온을 찾음
초월(transcendence) : 죽음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감
승화(sublimation) :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재구성함
최근 한국에서도 임사체험(NDE)과 전생 기억 사례 등을 근거로 사후세계의 존재를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정현채는, 의식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의식의 독립‘을 주장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의 이동으로 인식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던 ’죽음학‘을 공론화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사랑∙지혜와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
’의식의 독립‘은 인간에게서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는 데카르트의 사고에 그치는 것이며, 신의 영역인 ’ 영혼‘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도외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과학, 특히 의학이 실증주의의 범주에 갇혀 있다는 한계를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넘나들려는 시도를 한다면 어불성설일 수 있다.
사후세계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여전히 부족하다. 주류 과학계는 임사체험이나 전생 기억을 사후세계의 결정적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뇌기능 변화설(환각설)이다. 임사체험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뇌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반응(산소 결핍, 혈류 부족, 엔도르핀 분비 등)에 의해 생성된 환각이거나, 인간의 인지 편향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약물이나 특정한 신체 조건을 조성하면, 유사한 경험을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럼에도 달라진 사실이 있다. 죽음이 곧 모든 것의 종말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죽음 이후에도 삶이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공식화는 ‘과학적‘ 공식화를 전제하는 것이므로, 과학계∙정부∙종교계 전체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반복 가능한 증거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간극이 존재한다.
사후세계를 입증하는 유형별 사례를 검토하기에 앞서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사후세계가 과학적으로 유형별로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단순하고 싱거운 것이다. 시골 앞마당의 강아지가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금방 그 실체와 원리를 알아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사후세계는 획일적인 구조가 아니라 인간 각자에게 개별화된 유형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사유와 상상이 결합된 통찰의 영역이어야 하며, DNA 나선형 구조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유형별 모델은 죽음 후 세계를 이해하는 보조적 참고 자료에 불과하다. 사후세계를 이야기함에 있어 처음부터 과학적 접근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적 증거도 종교적 신념도 아닌 제3의 영역인지도 모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