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수소경제 제6장 선악의 피안
제5장 수소경제
수소와 탄소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주는 138억 년 전에 빅뱅으로 탄생하였다. 46억 년 전에는 태양계가 형성되었다. 태양계 전체의 9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태양은 75%의 수소와 25퍼센트의 헬륨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양은 1초당 4억 내지 6억 톤의 수소를 태워,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지구를 비롯하여 태양계의 수많은 식구들에게 빛이라는 형태로 에너지를 보내주고 있다.
태양을 도는 8개 행성 중 하나인 지구는 대기와 물, 암석과 금속(철 니켈 마그네슘 알루미늄 나트륨 칼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의 대기에는 질소(약 78%)와 산소(약 21%)가 존재한다. 수소(H₂)를 태운다는 것은 수소 핵융합(Hydrogen fusion) 반응을 일으킨다는 의미인데, 수소가 높은 온도로 가열되면 빛을 방출한다. 태양에서 오는 빛이 지구에 도달하면 지구 표면은 에너지를 흡수하여 들뜬 상태가 되어 여러가지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식물의 엽록체(Chloroplast)나 바닷물 속 남조류 또는 남세균(Cyanobacteria)은 빛에너지를 매개로 하여, 이산화탄소(CO₂)와 물(H₂O)로부터 탄수화물(Carbohydrate)과 산소(O₂)를 합성한다. 이것을 광합성작용(Photosynthesis)이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수소와 산소가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한편 벼락이나 식물성 박테리아의 작용으로 수소, 탄소, 산소에 질소(N₂)가 가세하여 아미노산(Amino acid)이 생성되며, 세포 내에서 리보솜(Ribosome)은 아미노산을 연결하여 단백질을 합성한다. 세포질 내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는 산소를 호흡하는 과정을 통해 각종 유기물질을 사용하여 ATP 형태의 에너지를 생산한다.
문제는 수소와 탄소다. 햇빛에너지는 수소로부터 나오며, 물과 이산화탄소는 열과 비, 구름, 바람을 만들어낸다. 화석원료 보다 수소원료가 더 친환경적이고 친우주적임은 자명하다. 수소원료는 물 분자 내 수소와 산소의 공유결합을 이온상태로 잠시 떼어놓은 다음, 전기에너지를 사용하고 제자리에 돌려놓는 작용이므로 엔트로피(무질서도 無秩序度)의 증가가 상대적으로 적다. 반면, 화석에너지는 지구 내에서 파낸 물질을 사용하므로 무제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구환경의 균형을 깨뜨리면서 기후위기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되고 있다.
지금처럼 탄소배출량이 늘어나 행성 반사율(Albedo)이 감소하게 되면, 먼저 바다의 온도가 상승하고 해수면도 상승할 것이다. 이미 진행 중이다.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동토 내 축적된 메탄가스가 방출되자, 집중호우와 폭설 등 이상기온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지구환경의 무질서 즉 엔트로피 증가 현상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과 재배지는 뚜렷하게 북상하고 있으며, 일부 어종은 5년 전보다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기타 농산물 생산량의 감소와 산불의 증가와 해충의 증식 등 예측이 가능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이 지구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에는 사라진 정어리떼가 나타나고 오징어 어획량이 다시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바다에서 해수면 온도 상승 외에 우리가 모르는 추가적인 변화가 진행 중일 수 있다.
기후환경 변화는 산업화(産業化)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자초한 재난 즉 인재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인류는 결자해지의 자세로 기후위기의 문제에 시급히 대처해야 할 책무가 가로놓여 있다고 할 것이다. 아니면 인류는 공룡처럼 멸종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혹자는 기후위기에 대한 우려는 기우(杞憂, 근거 없는 걱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지구 환경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던 시대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지구는 고유의 자생력과 회복력으로 이를 극복해 왔다는 믿음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믿음이 막연한 믿음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 500여 년간 산업화 과정의 결과로 인류의 삶의 질은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더 향상되었다. 인간의 영양상태는 양호해지고 각종 질병은 극복되어 가고 있으며 평균수명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머지않아 가정마다 AI 로봇을 가정에서 반려동물처럼 활용할 정도로 과학은 진보하고 있다. 상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뉴턴의 제3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작용이 있으면 같은 강도로 반작용이 있다. 지구 밖으로부터는 인간에게 유해한 우주 방사선(Cosmic rays)이 더 많이 쏟아지고 있으며, 바다에 플라스틱은 쌓여만 간다. 사계절 중 살기 편한 봄과 가을은 짧아지며 미세먼지는 증가하고 폭설과 폭우가 빈번해지고 있다.
과학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삶의 질은 그 자체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샌프란시스코 거리에 펜타닐 중독자가 비참하게 거리를 배회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기피하고 애를 낳지 않아 초고령화 사회를 가속하고 있다. 지구 도처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현재, 지구인의 정신세계가 지금부터 2천 년 전 도연명이 찾았던 복숭아꽃 마을에 비해 더 나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AI 시대가 지구인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증거도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류는 적어도 공룡이 지구상에 살았던 만큼만 살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약 1억 년 동안은 지속적으로 지구를 보전해야 할 책무를 가진다.
공룡의 멸종(Dinosaur extinction)은 중생대 백악기(Cretaceous)와 신생대 팔레오기(Paleogene)를 구분하는 결정적 사건으로서 K-Pg 멸종이라고 부른다. 6,600만 년 전 당시 지구의 주인이었던 공룡과 함께 생명체의 약 75%가 사라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멕시코 유카탄반도 칙술루브(Chicxulub) 지역에 지름 10킬로미터의 소행성이 충돌하였다. 소행성은 육지와 바다에 걸쳐 지름 180킬로미터의 거대한 크레이터(Crater)를 형성하였다. 이어서 거대한 해일이 발생하고 먼지구름이 대기를 뒤덮었다. 태양으로부터 햇빛에너지가 차단되면서 지구는 식어가고 빙하기에 접어들었다.살아남은 생명체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은 한반도 남해안에 수많은 흔적만 남긴 채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이산화탄소가 인위적으로 과도하게 방출되어 지구가 데워지고 있는 중이다. 공룡의 멸종이 빙하기로 인한 것이라면 인류의 멸종은 해빙기로 인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햇빛에너지를 차단하여 또 다른 빙하기로 이행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인류는 지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여섯 번째 멸종기인 홀로세 대멸종(Holocene extinction)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이를 막기 위해서 인류가 할 일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기후재앙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이 2002년에 지은 저서 「수소혁명(The Hydrogen Economy)」에 의하면, 2020년대의 세계는 이미 수소경제가 이미 상당히 진전되었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신재생에너지 관련 산업은 지지부진하고 특히 수소산업은 어려움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수소 관련 기술이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는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리프킨에 따르면 지금까지 인류가 지구에 저지른 가장 부정적인 해악이 지구온난화라고 주장한다. 인류는 불과 10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지구의 생화학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쳤으며, 수만 년 뒤 미래 세대가 이를 어떻게 평가할지 두려움을 남긴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는 대기 중에 쌓인 가스들이 지구의 복사열을 가로막는 현상이다. 온실효과라고 부르는 이러한 현상은 햇빛이 대기 속으로 들어와 지구 표면에 닿으면서 시작한다. 햇빛 중 일부는 에너지 상태로 지구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복사되어 대기권 밖으로 빠져나간다.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나 메탄 등 온실가스가 많을 경우에는 원활한 복사작용을 가로막아, 지구의 온도가 필요 이상으로 상승하여 지구의 에너지 균형이 깨진다.
지구온난화의 원인 가운데 70%를 차지하는 것이 이산화탄소이며, 메탄이 24%, 아산화질소가 6%를 차지하고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CO₂)의 농도는 화석연료 시대가 시작한 1750년에 비해 약 30% 이상 증가하였다. 이는 지난 2만 년을 통틀어 전례가 없는 것이다. 이산화탄소 방출량의 절반은 대지와 바다가 흡수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대기 중에 그대로 남는다. 또 다른 온실가스인 메탄(CH₄)은 1750년 이래 논과 쓰레기 매립장에서 약 130% 이상 증가하였다. 이 역시 과거 42만 년에 걸친 지질학적 역사에서 유례가 없던 일이다. 무분별한 화학비료의 사용으로 제3의 온실가스인 아산화질소(N₂O)의 농도는 1750년 이래 약 17% 증가하였다.
2001년 유엔 주도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구온난화의 실상과 예측을 알리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지구 표면의 온도는 약 1.1℃ 상승하였다. 이는 과거 1천 년 사이 가장 큰 상승 폭이다. 2100년이 되면 지표면 기온은 약 2.5~10.4℃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지난 1천만 년 동안 일어난 어떤 기후변화보다도 더 큰 사건이 될 것이다.
기온 상승은 지구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조 증상은 이미 시작되었다. 북아메리카 서부지역에 서식하는 호랑나비 한 종이 서식지를 북쪽으로 약 96km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태평양 연안의 연어는 해수 온도 상승으로 급감하고 있는 중이다.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산 만년설의 약 75%가 녹아내렸다.
향후 100년 동안 예상되는 변화를 살펴보면 빙하와 만년설의 융해와 해수면 상승, 강수량과 폭풍 및 가뭄의 빈도수 증가, 기후 급변, 동물 서식지의 불안정 및 상실, 생태계의 이동, 바닷물에 의한 담수 오염, 삼림 황폐화, 종 멸종의 가속화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어느 하나도 인류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해수면이 1미터 올라가면 방글라데시의 국토는 약 7%가 사라지고 약 6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것이다.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에 거주하는 주민도 비슷한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해수면이 3미터 상승하면 인도양의 몰디브와 태평양의 마샬제도는 물속에 잠기게 된다.
가뭄의 영향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들에 더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며, 기온이 한계점에 도달한 열대 지방과 남반구에서는 농작물 생산량 감소가 뚜렷할 것이다. 전염병 중에서 말라리아와 뎅기열이 넓은 지역에 확산될 가능성도 크다.
리프킨은 기후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수소경제 중심의 에너지 혁명을 제시한다. 꿈을 크게 꾸자면 수소경제는 지구온난화를 방지하는 소극적인 목표를 넘어 기존의 정보네트워크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에너지 혁명의 시대를 여는 제4의 물결이 될 수 있다. 태양광과 풍력 등 여러 가지 재생에너지 중에서도 수소를 주력 에너지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가장 환경친화적일 뿐만 아니라 일단 인프라가 갖춰지면 지속가능하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How To Avoid A Climate Disaster)」에서, 기후위기의 실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사점을 제언하고 있다. 지구에 사는 우리는 매년 510억 톤의 온실가스를 대기권에 배출하고 있으며 배출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다. 510억 톤을 0으로 줄이는 것이 우리가 달성해야 할 목표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면, 온실가스는 계속 배출될 것이고 기후변화는 기후재앙이 되고 말 것이다. 기후재앙은 서서히 차오르는 욕조처럼 언젠가는 가득 차고 물은 넘쳐 흘러내리게 될 것이다. 좀 더 자극적인 비유를 한다면, 기후재앙은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올 수 있다. 현재까지는 기후재앙에 대한 대처방안을 설득력 있게 반박하는 가설은 찾기 힘들다. 다분히 감정적이거나 운에 맡기자는 설명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호모 사피엔스가 적어도 공룡이 지구를 지배했던 기간인 2억 년만큼은 지구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럼에도 인류가 지구를 지배한 기간은 이제 5만 년밖에 안 되었다는 정도의 이야기다.
빌 게이츠가 제시하는 의미 있는 통계자료가 있다. 510억 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인간의 활동 유형별로 차지하는 비중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시멘트, 철강, 플라스틱과 같이 무언가를 만드는 제조 활동으로부터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비중이 약 31%, 전력생산을 하는 과정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비중이 약 27%, 식물을 재배하거나 동물을 사육하는 과정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약 19%를 차지하며, 비행기·트럭·승용차·선박을 이용하여 어딘가로 이동하면서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비중이 전체의 약 16%에 이른다. 그밖에 에어컨·보일러 등과 같이 따뜻하거나 시원하게 하는 활동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약 7%를 차지한다.
여기서 전력생산 활동이 약 27%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나, 이것은 전력의 2차, 3차 산업연관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활동에서 청정한 전기에너지를 사용하고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100% 포집할 수만 있다면, 온실가스의 배출량은 0에 수렴할 수 있다. 현재까지는 온실가스의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기대 이하로 느리게 진행되고 있지만, 몇 가지 성공한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중국은 태양광 패널 원가를 줄이는 기술혁신에 성공하여, 태양광 전기의 생산원가가 2009년에 비해 약 90% 하락하였다. 덴마크는 1970년대 오일쇼크 이래 풍력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풍력으로 생산한 전기의 원가가 1987년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빌 게이츠의 마지막 제안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탄소배출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탄소배출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추진력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답은 명확하다.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는 2050년까지 온실가스를 제거할 수 있는 기술과 정책과 시장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제4의 물결
1874년 프랑스의 공상과학 소설가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은 소설 「신비의 섬」에서, 석탄 대신 수소가 미래의 주요 에너지원이 될 것임을 예견하였다. 1923년 영국의 생물학자인 홀데인(John Burdon Sanderson Haldane 1892-1964)은 수소가 미래의 에너지가 될 것임을 예언하고 수소의 생산, 보관, 이용 방법을 위한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바람 부는 날에 풍차를 이용하여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한 다음 생산한 전기로 물을 전기분해한다. 전기분해로 얻은 수소와 산소를 액화처리하여 지하 진공탱크에 저장한다. 이를 연료전지에서 재결합하면 전기에너지가 다시 생성된다. 이렇게 생성된 전기는 산업, 운송, 난방, 조명 등 원하는 부문에 사용할 수 있다.”
홀데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수소에너지 생산방식은 초기 투자비용이 엄청나게 소요될 것이지만 시스템이 안정되면 기존 에너지보다 더 저렴해질 것이며, 매연이나 쓰레기가 배출되지 않아 환경에도 이익이 되며 에너지를 어디서든 저렴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산업이 크게 분산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하여 이미 분산에너지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1999년 아이슬란드가 세계 최초의 수소경제 국가를 선언하고 과감하고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고 나섰다. 이를 위해 정유회사, 자동차회사, 전력회사, 비료회사, 대학교 연구소, 벤처펀드회사를 포함한 컨소시엄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에도, 아이슬란드의 낙관적 실험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실험장을 열어 놓으면 연료전지 자동차들이 대량으로 들어올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자동차회사들은 이 작은 시장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실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수소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기술과 연구개발 역량은 물론, 산업기반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아이슬란드는 탁월한 자연 에너지 환경과 적극적인 정부정책과 높은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여전히 수소경제 실험의 주요 무대이다.
珍光은 생각한다. 여러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수소혁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조건이 선행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수소연료를 경제적으로 생산 가능해야 한다. 수소는 기존의 탄소연료에서 나오는 부산물이어서는 안되며, 수소를 생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에너지는 친환경 에너지여야 한다. 어떠한 수소에너지 생산방식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하는 범지구적 기준을 충족하여야 한다. 둘째는 수소의 생산과 저장 유통 시스템은 지금 정점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정보통신 네트워크기술과 결합하여 분산에너지 혁명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청정 수소연료와 미니 발전소인 연료전지와 에너지저장장치와 인버터 등 전기변환장치와 탄소섬유 저장탱크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이 지구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개념이라면, 두 번째 조건은 정보통신 혁명과 더불어 수소경제를 에너지 혁명의 새로운 물결로 이끌어 가기 위한 적극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전기분해
땅속에 묻힌 탄소 대신 햇빛의 근원인 수소를 에너지원으로 쓴다면, 지구환경과 관련한 많은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소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 비용이 들어가는 과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수소를 저렴하게 생산하는 길은 없는지 비전문가의 시각에서 접근해 보기로 한다.
수소를 생산하는 방법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 전제를 설정해 본다.
첫째 그린수소여야 한다. 기존의 탄소를 사용하는 산업으로부터 생산되는 부산물로 수소를 채집하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공해라는 사회적 불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사회적 불경제를 유발할 수는 없다. 그레이수소나 블루수소가 아닌 그린수소여야 한다. 그러므로 물을 전기분해하는 방식에서 해답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 수소의 생산원가에서 경제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수소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비용이나 촉매제, 이온교환막 등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면, 이는 비단 경제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환경을 지키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
셋째 수소를 생산하여 운반하는 과정에서 송전설비와 전력케이블 등 새로운 환경파괴 설비가 추가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새롭게 송전탑이 들어서고, 풍차가 날아가는 새를 죽이고 소음을 유발하고, 바다 밑에 전력선이 깔리는 풍경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선이나 배관이 없는 수송방식이 친환경적이며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수소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방식은 유선이 아니라 무선이어야 할 것이다. 송배전선로 방식이 아니라 수도와 가스처럼 댐이나 탱크에 모아둔 것을 꺼내어 쓰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물을 전기분해하는 방식을 수전해(water electrolysis) 기술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알칼리 전해 방식(AEC, Alkaline electrolysis)과 고분자 전해질막 방식(PEM, polymer Electrolyte Membrane)이 있다. AEC 기술이 현재 가장 상용화된 기술로 알려져 있으나, 생산을 위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므로 한계가 있다. PEM기술은 가장 효율적으로 고순도 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백금촉매제, 전해질막 등 비용이 많이 드는 방식이다.
물(H₂O)은 수소와 산소가 결합된 물질이다. 물에서 수소와 산소를 분리하면 양극에는 산소가 발생하고, 음극에서는 수소 이온과 전자가 발생한다. 최근 기준으로 볼 때, 수전해로 생산한 수소 1킬로그램은 자동차가 100km를 달릴 수 있는 양이며, 여기에는 65kWh의 전력에너지가 소요된다. 여기에 자재비와 제경비를 고려할 경우, 수소 1킬로그램의 생산단가는 약 15,000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풍력발전선
공해상에 풍력발전기를 장착한 수소생산 선박을 띄운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 풍력발전선이라 부르기로 한다. 수소생산을 위한 풍력발전선의 장점은 낮은 생산원가와 높은 기동성이다. 일 년 내내 바람이 강한 공해상을 찾아 이동할 수 있다. 풍력발전선이 생산한 전기는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ESS(에너지저장장치)에 저장되며, 다음과 같은 용도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첫째 풍력발전선이 생산하고 저장한 직류전기로 바닷물을 증류하여 수전해용 용수로 사용하고, 증류한 수증기를 수전해를 위해 가열하는 데 사용한다. 수전해는 섭씨 약 800℃ 이상의 조건에서 효율이 최대화되고 양질의 수소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둘째 풍력발전으로 생산한 수소에너지의 일부는 수전해로 생산한 수소를 액화시키는 데 사용한다. 수소의 액화 온도는 약 -253℃이며 액체상태의 수소는 기체상태에 비해 약 1/800로 압축된다. 압축된 수소는 수소탱크에 보관한다. 참고로, 천연가스는 -162℃에서 액화하며 약 1/600로 압축된다. 생산한 수소를 기화온도가 낮은 암모니아 형태로 액화하여 저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생산한 수소전기는 풍력발전선의 동력으로도 사용한다. 공해상에서 생산한 수소를 저장한 풍력발전선이 연간 여러 차례 항구에 입항하면, 수소탱크와 ESS는 전용운반차량에 실려 수소충전소와 전력수요거점으로 운반된다. 이 과정에서 송전선로나 해저케이블은 필요 없다. 고속도로에서 유류탱크 차량이 운행하는 원리와 같다.
풍력발전선이 성공적으로 적용된다면 수소 생산원가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기에너지는 0에 수렴할 것이며, AEC방식의 상용화가 촉진될 것이다. 해저 및 육상의 전력선도 불필요하며 따라서 송전탑이나 송전선도 불필요하다. 지상권 문제나 기존 전력회사와 선로 분쟁 같은 것은 발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태양광에너지가 기존의 송전선로에 연결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풍력으로 생산한 수소의 공급은 수요거점별로 독립적이어야 한다. 신재생에너지는 한전과 같은 기존 시스템과 연결점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 기존 네트워크와 연결이 적을수록 바람직하다. 그래야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규제의 밀림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풍력발전선은 친환경적이며 경제적으로도 이상적 모델이 될 수 있다. 미래에는 화석원료가 전면 수소로 대체되고 바다와 식물에서 광합성은 지속되면서, 지구상의 탄소는 균형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한편 이산화탄소와 함께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인 메탄가스(CH₄)도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수소생산에 비해 농축산업이나 음식물쓰레기 천연가스 등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를 줄이는 작업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수소에너지가 일상화되면 기존의 화력은 물론 원자력이나 액화천연가스(LNG)의 사용은 급격히 감소할 것이다. 수소 생산은 궁극적으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함이지만, 수소의 공급방식은 기존의 전기보다는 수도나 가스 시스템에서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제6장 선악의 피안
심연의 괴물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그의 저서 「선악의 피안」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한다. 당신이 심연(深淵 abyss, abgrund)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 본다”고 설파하였다.
“He who fights with monsters should look to it that he himself does not become a monster, for when you gaze long into the abyss, the abyss also gazes into you(Wer mit Ungeheuern kämpft, zusehen mag,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
우리는 수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위선의 가면을 쓰고 타락한 사례를 본다. 자의든 타의든 보통 사람들보다 더 거룩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심연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조폭 수사를 전담한 경찰이나 검사들에게서 조폭의 흔적이 베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상대를 미워하면서 닮아가는 법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되게 함이라”고 쓰고 있다. 거룩하다가 타락하면 개전의 정을 따지지도 않고 천국행 티켓을 몰수한다고 하니, 겉으로만 거룩한 자들에게 보내는 날카로운 경고라 할 수 있다. 성스럽다는 뜻인 sacred의 어원은 고대인들이 빨래를 하거나 제사용 짐승의 피를 씻어내는 우물가였다고 한다. 더러워진 옷이나 제사를 위한 희생제물을 씻어내는 곳은 성스럽기도 하는 한편, 피 냄새를 자극하기도 한다. 거룩한 성(sacred city)과 세속도시(secular city)는 그리 멀지 않다.
앞에서 니체가 인상적인 말을 남겼음에도,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나치정부는 위버멘쉬(超人, Übermensch)에 경도되었다. 법실증주의자 칼 쉬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히틀러의 비상계엄을 옹호하여 나치에 부역하였다가,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와 함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섰다. 강단에서는 거룩한 자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타협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가진 자는 아름답다라는 칼 슈미트의 금언은 오늘날에도 엘리트 집단의 뇌리에서 한여름밤의 드림으로 유효하다. 박정희의 유신쿠데타, 전두환의 군사쿠데타, 최근에 일어난 시대착오적 친위쿠데타를 옹호하는 엘리트 법조 세력들에게 그는 여전히 마음속의 대부로 남았다. 개체변이는 체계변이를 반복한다고 하여 일세를 풍미하였던 생물학자 헥켈(Ernst Haeckel 1834-1919)의 유물론적 생물발생의 법칙은 파시스트의 인종차별주의에 이용당하고 말았다.
등산을 자주 간다고 해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길러지고 대인배가 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산에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다르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천성적인 탓인지 환경의 탓인지 아직도 잘 알 수는 없으나, 확실한 것은 전두엽에 한 번 이상이 생기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에서 자유와 파시즘은 마치 시계추와 같이 진자(振子, pendulum)운동을 반복한다고 한다. 그러나 관찰자의 입장에서 진자운동에 몸을 맡기기에는 우주와 지구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담벼락에 대고 소리라도 질러봐야 하는 것이 지구를 살아가는 자의 최소한의 도리라 생각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영향력 있는 실존주의 철학자임에도 그의 「존재와 시간」은 여제자이자 내연녀이자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 앞에서 무력했다. 1960년 예루살렘의 전쟁재판소에서는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총통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그의 변명을 지켜본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으로서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고인이 된 김근태를 고문하던 자가 고문을 당하는 자를 앞에 두고 가족과 통화하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걱정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내란이나 외환죄의 중요 임무에 가담하거나 종사한 자가 흔히 하는 변명들 앞에서, 영화 「뉘른베르크 재판」의 미군 측 군법무관의 대사는 상징성을 지닌다.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부재한 자에게 악은 평범하게 나타날 뿐이다. 본인은 콘베이어벨트 작업대 위에서 소정의 작업에 충실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무심코 지나친 열려있는 맨홀뚜껑이 술 취한 자에게 대형 사고로 연결된다 한들, 부작위에 의한 작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항변할 여지는 있다. 인간의 광기가 낭만으로 흐르면 하나의 거대한 사조가 되지만, 총칼의 행사로 나타나면 대량학살로 이어진다.
광기의 역사는 1204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 1258년 일칸국 훌라구의 바그다드 침공, 1572년 성 바돌로매 축일의 위그노 학살, 1933년 스탈린 정부의 우크라이나와 카자흐 농민 참사, 1980년 전두환 독재정권의 광주민주화운동 탄압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1962년 6월 아히이만은 유죄 판결을 받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차라투스트라
니체는 선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방의 조로아스터와 싯다르타에게서 답을 구했던 듯하다. 그러나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빛과 지혜)와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多 지혜의 완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니면 깊이 아는 것을 포기하고 선과 악을 쾌(快)와 불쾌(不快)의 개념으로 무색무취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니체의 원형회귀나 권태라는 개념은 당시 초기 자연과학의 원자론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전자의 궤적과 유사하다.
니체 역시 당시 유럽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던 과학탐구의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선과 악이나 양심에 관한 문제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막상 판단하거나 결정을 내릴 때에 닥쳐서는 혼란스럽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악의 문제를 고민한 결과, 의(義, righteousness)와 의로워짐(justification)이라는 새로운 잣대를 제시함으로써 애매모호한 선악의 문제를 넘어서려 하였다고 생각한다.
조로아스터(Zoroaster, Zarathustra)는 아베스타(Avesta)에서 “어떻게 아샤(Asha)를 따르면서 올곧은 목자가 암소를 얻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아샤는 진리(truth), 존재(existence, reality), 올바른 행위(right action), 우주의 질서(order)를 뜻한다. 목자가 외부 침략자의 약탈에 직면하여, 이를 정당한 방법을 써서 막아내면서 자신들의 소유를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겠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종교의 한 부분이 되었다. 선한 목자가 선한 싸움에서 선한 방식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신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하여 아프카니스탄 북부 박트리아의 어느 곳에서 인류의 삶과 죽음에 관한 보편적 문제의식을 품고 하늘을 바라보던 한 인간이 있었다. 선지자 자라투스트라는 맑은 하늘의 해와 별을 바라보면서, 신과 천지창조, 선과 악, 천국과 지옥, 사탄, 메시아, 부활, 심판, 구원,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제식(祭式)을 체계화하였다.
훗날 이 가르침이 바빌론(Babylon)에서 포로생활(Babylonian captivity 기원전 597-538년)을 겪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유일신 여호와(또는 야훼 Jehovah, Yahweh)를 섬기는 유대교가 되고, 더 훗날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토대가 되었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이 완성된 데에는 바빌론 포로의 후손으로서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를 경험한 바 있는 제사장이자 율법학자 에스라(Ezra 기원전 504-421년)의 큰 공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하에서는 메리 보이스(Mary Boyce 1920-2006)의 「조로아스터교의 역사」와 공원국의 「유목문명기행」을 주로 참조하였다. 기원전 2500년과 2000년 사이 우랄산맥 동쪽에 살던 유목민들이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남쪽으로 이동한 원인은 잘 알 수 없으나, 소와 말과 양, 염소, 낙타와 같은 동물의 가축화로 개체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이동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식물의 작물화가 인류를 농경정착생활로 이끌었다면, 동물의 가축화는 인류를 유목정착생활로 유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인도 이란인들이 남하하여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말과 낙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 부족은 정남 쪽으로 내려와 이란 지방에 정착하였고, 다른 한 부족은 카라코람산맥을 넘어 히말라야산맥을 우회하여 인도 대륙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인도대륙은 오스트레일리아나 그린랜드처럼 대륙에서 떨어져 나간 별도의 섬이었으나, 5,500만 년 전에 유라시아대륙과 충돌하여 히말라야산맥이라는 큰 주름을 형성하면서 티베트고원에 붙게 되었다. 지금도 히말라야산맥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초원의 혹독한 환경에서 태어나 과감하게 남하한 인도 이란인들은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을 만들고 그 안에 최고신 아후라(Ahura 阿修羅), 불과 태양의 신 미트라(Mitra), 물과 창조의 신 바루나(Varuna 또는 아팜나파트 Apam Napat), 전쟁과 승리의 신 인드라(Indra 또는 베레트라그나 Verethragna)를 배치하였다.
정동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에서 니체가 선과 악의 도덕구조를 부정하면서도 선과 악의 창시자인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야기한 것은 역설적이라고 주장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에서 출발하여 죄, 부활, 심판, 구원, 종말로 이어지는 방대한 가르침을 펼쳤다. 니체는 선과 악을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로 간주하여, 선과 악의 존재를 거부하고 도덕 자체를 파기하려 하였다. 영원히 회귀하는 세계에 시작이 어디 있으며 종말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그의 저서에 차라투스트라를 빌려온 것은 19세기 당시만 해도 차라투스트라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서로 처지가 비슷하다고 감정이입이 가능했다고 본다.
영혼
영혼이라는 한자어가 최초로 등장한 기록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 기원전 340-278)이 쓴 ‘애영(哀郢)’이라는 시라 전해진다. 일부를 인용하면,
羌靈魂之欲歸兮(강영혼지욕귀혜) 돌아가고 싶구나 영혼아
何須臾而忘反(하수유이망반)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느냐
背夏浦而西思兮(배하표이서사혜) 하포 등지고 서쪽을 생각하니
哀故都之日遠(애고도지일원) 나날이 영도는 멀어져 슬퍼진다
* 강(羌): 감탄사, 도(都): 초나라의 400년 수도 영도(郢都)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여,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설(immortality of the soul)을 주장하였다. 영육이원론에 기초하면, 사람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가거나 다른 형태로 환생하게 된다.
종교는 애니미즘(animism)에서 기원하여 다신교, 최고신 숭배를 거쳐 일신교로 발전한다고 한다. 영육이원론에서 더 나아가 영을 영(pneuma, spirit)과 혼(psyche, soul)으로 분리하여 영혼·육체·혼의 삼원론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성령(聖靈)을 부각하여 삼위일체론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에서 성령(Holy Spirit)은 성부 성자와 함께 본질은 하나이지만 세 가지 위격(una substantia tres personae)을 가진 존재로서 삼위일체론은 칼타고의 터툴리안(Tertullianus 160-220)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성령에 관하여 신약성경의 설명은 여러 군데에 있으나,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이라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소통의 통로가 있으며, 신의 로고스(logos)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조명되고 전달된다는 것이다.
珍光은 생각한다. 영혼육에 대한 지나치게 깊은 논의는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다. 니체가 말하는 심연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이단의 교리를 주장하는 세력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은 선악과와 영혼육삼원론과 계시록의 숫자들에 깊이 빠져서 이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보인다는 점이다. 비록 이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영혼육에 대한 지나치게 자의적인 집착은 원리주의와 율법주의,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와 각종 귀신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만들어진 신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누군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서, 타원형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는 중국산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그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신에 대한 불가지론을 우화로 설명하였다.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이라는 용어는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에 앞장섰던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5)가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인간의 운명과 행위에 관여하는 신이 아니라, 존재의 질서 있는 조화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 하여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의 입장을 취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신에 대한 언급은 더 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5)는 신과 자연을 같은 실체의 두 가지 이름으로 보는 일원론적 범신론을 주장하였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주장만으로도 유대 공동체에서 추방당할 정도였다. 이러한 범신론적 종교관에 대해서 기독교 유신론자들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 또는 지적인 무신론이라고 비판하였다.
스티븐 굴드는 과학과 종교는 서로 겹치지 않는 영역(non-overlapping magisteria, NOMA)을 다룬다고 주장하여 근본주의 진화론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리차드 도킨스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유력한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아마도 현재까지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목회자나 신학자 누구도 도킨스류의 디테일과 화려한 수사를 반격하며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여겨진다. 신학자의 ‘당위’로 과학자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은 영원한 평행선일 뿐일지도 모른다.
종교와 과학, 유신론과 무신론, 창조와 진화, 지적설계와 자연선택에 관한 논쟁은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먼저 도킨스는 ‘성서논증’ 편에서, 앤드루 윌슨의 저서 「예수(Jesus: A LIFE, 1992)」를 인용하면서 요셉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스어 tekton은 목수임이 분명하지만, 원어인 아람어 naggar는 장인(匠人)이나 교양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오역 하나가 세계사를 바꾼 예는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알렉산드리아의 70인역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Book of Isaiah) 7장 14절의 오역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로 젊은 여성을 뜻하는 almah를 그리스어에서 처녀 또는 동정녀를 뜻하는 parthenos로 번역하고, 마태복음의 기자가 이를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성모 마리아의 ‘처녀잉태설’의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반이슬람주의자인 이븐 와라크(Ibn Warraq)에 의하면, 이슬람 경전에 순교자에게는 72명의 처녀가 주어진다는 약속이 있는데, 여기서 처녀는 ‘투명한 백색 과일’의 오역인데, 이 오역 하나로 오늘날까지 수많은 자살테러가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도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베들레헴 출생의 배경이 되는 ‘인구조사’는 역사적 기록과 시기적으로 불일치한다. 당시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Quirinius)에 의한 인구조사는 헤롯왕 사후인 기원후 6년경이었는데, 누가복음의 기자가 구약성경 미가서(Micha the Morashtite) 5장 2절에 나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을 의식하여, 의도적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본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영국 런던의 저명한 목회자 니키 검블(Nicky Gumbel) 목사는 「IS GOD A DELUSION?」에서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종교와 과학을 논한다.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不具)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무신론, 특히 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인류에게 자행된 폭력의 사례는 너무 많다. 나치 독일에 의해 홀로코스트에서 사망한 사람은 유대인 600만 명을 포함하여 1,100만 명에 달한다. 스탈린의 소련에 의하여 1933년에서 1945년까지 12년 동안,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연안국에 이르는 소위 블러드랜드(bloodlands)에서 1,4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스탈린은 굶주림으로, 히틀러는 인종청소로 대학살을 저질렀다.
그렇다고 해서, 유신론자들에 의한 폭력과 학살이 정당화될 수 없다. 1478년 스페인 이단재판소의 초대 재판관으로 도미니코회 수사인 토르케마다 토마스(Thomas de Torquemada 1420-1498)가 선임되었다. 이단재판소에서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하여 고문(拷問)을 허용하였으며 유죄판결이 난 자는 즉시 화형에 처해졌다. 토르케마다가 재임한 15년 동안 2,000여 명이 처형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잔인함과 광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1832년 이단재판소가 해체되기 2년 전, 그의 무덤은 도굴되고 유골은 도난당해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1991년 소련 연방이 붕괴되고 지도자 티토가 사망하자 유고슬라비아에서 10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민간인에 대한 잔인한 학살로 이어졌다. 유고 연방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코소보, 크로아티아 등 7개국으로 분리되었다.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라 불리는 이 전쟁은 동방정교회 소속의 세르비아와 가톨릭계의 크로아티아, 이슬람계 보스니아의 종교전쟁이기도 하였다. 이 내전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에 의하여 수십만 명의 보스니아 주민이 살해되었다. 2007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세르비아 정부에게 집단학살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인류에 의해 자행된 집단학살은 표면상 내세우는 명분과는 달리 실제로는 종교와는 직접적 상관관계가 없다. 3세기 말 중국 동북부의 모용선비족은 한민족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부여를 침략하여 궤멸적 타격을 가하고, 부여인 대부분을 노예로 끌고 갔다. 북위의 탁발선비는 같은 선비족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참합피 전투에서 패한 후연의 모용선비 5만 군사를 생매장하였다. 13세기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피와 잉크로 뒤덮었으며, 바투의 몽골군은 키예프를 멸절시켰다. 잔인한 정복자 티무르는 페르시아의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북부 인도에서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종교를 전면에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본질상 종교와 무관하였다. 종교가 이들의 정치적 야만성을 다스려주지 못한 것이 유감일 뿐이다.
진화생물학의 선두에 있는 리차드 도킨스는 ‘신의 존재증명’으로 열거하는 유력한 케이스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며, 그가 「이기적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에서 보여준 유물론적인 방법론과 현란한 수사를 사용하여 신의 부존재증명을 논증한다. 여기에서는 도킨스가 제시한 몇 가지 케이스를 살펴봄과 동시에 도킨스의 디테일 일변도의 진화론적 원자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도킨스의 과학에 따르면 생명현상이 너무 하찮고 허망해 보일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연구는 일부 과학자들에게는 학문하는 즐거움의 대상일 수 있지만, 가설이 가설로 무너지는 상황에서 과학자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
영국의 물리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yle 1915-2001)은 방송 중 무심코 사용한 ‘빅뱅’이라는 용어가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인 빅뱅이론으로 발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신의 존재에 관해서도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였으니, 그의 비유에 따르면 지구상에 생명이 출현할 확률은 고물 야적장에 갑자기 돌풍이 몰아와 보잉747 여객기를 조립해 낼 확률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어느 행성에 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영역(Goldilocks Zone)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주변에 목성과 같은 거대한 행성이 있어서 자체 중력으로 소행성의 지구 충돌을 막아주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달과 같은 위성이 지구의 자전축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도킨스는 우주에 1,000억 개의 은하(galaxy)가 있고 각 은하마다 평균 10억 개의 행성이 존재한다면, 지구처럼 생명이 존재하는 행성이 존재할 확률은 10억분의 1이고, 이를 우주 전체로 보면 약 10억 개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즉, 생명이 존재하는 10억 개의 골디락스 행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결코 작은 수가 아니다.
비너스의 꽃바구니(Venus’s flower basket) 또는 바다수세미라 불리는 생명체는 지구에서 9억 년 전부터 발견되고 있는 해면동물이다. 바다수세미의 몸체는 유리 성분의 규산염 그물이 격자 형태로 이중으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이중격자의 효율성을 연구한 공로에 힘입어 2개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물건이기도 하다. 9억 년 전에 자연이 도랑을 치워 놓고 이제 와서 인간이 가재를 잡는 격이라면, 현대 자연과학의 수준도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다. 이 바스켓 속에 어린 새우가 암수 한 쌍으로 들어와 성장하고 번식해서 새끼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나면, 부부새우는 덩치가 커져서 바스켓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속에서 일생을 마감한다. 그야말로 해로동혈이다.
해로동혈(偕老同穴)이라는 고사성어는 시경(詩經)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는 뜻으로 남녀 간에 생사를 같이하는 금슬(琴瑟)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시경의 패풍(邶風)과 왕풍(王風)에,
집자지수 여자해로(執子之手 與子偕老)
(손 부여잡고 함께 늙어가리)
곡즉이실 사즉동혈(穀則異室 死則同穴)
(죽어서도 한 곳에 묻히리)
창조론자들은 사람의 눈이나 곤충의 날개 등은 진화의 원리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정교하고 복잡하여, 창조주의 지적 설계로만 설명 가능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주장한다. 이를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IC)이라고 말하는데, 도킨스는 이에 대해 어떠한 복잡성도 장구한 시간에 걸쳐 단계적인 진화로 설명 가능하다고 반박한다.
지금부터 5억 4천만 년 전, 생물 다양성이 급격히 증가한 시기가 있었다. 이를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 한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중간단계의 화석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창조론자는 이 틈새를 채워주는 것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도킨스는 반박한다. 돌들을 끼워 맞춘 아치(arch)가 안정되고, 환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것은 비계(飛階 scaffold)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계는 아치가 완성된 후에는 제거되어 보이지 않을 뿐, 실재했다고 설명한다. 도킨스는 주장한다. 진화한 기관들은 뛰어나고 효율적이지만 종종 결함이 보이기도 한다. 그 결함이 창조주에 의해 설계된 경우라면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통, 탈장, 자궁탈출증 등 인류의 질병 중 많은 것들은 수억 년에 걸쳐 네 발로 걷도록 다듬어진 몸을 그대로 지닌 채, 두 발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창조주라면 이런 불편한 상황을 방치했겠느냐는 주장이다.
신화인류학자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 1854-1941)는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에서 “인간의 심리는 욕망으로 채색된 믿음을 허용하는 보편적 성향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욕망으로 채색된 믿음에 세속적인 축복이나 구원, 영생, 부활 등을 대입해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기독교의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가 ‘오직 믿음(Sola Fides)’이라는 기본 전제가 훼손된다면, ‘오직 은혜’도 ‘오직 그리스도’도 없다.
신에 대한 불교의 태도는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신의 존재 자체를 밝히려는 것이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한다. 유신론과 무신론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아함경(阿含經)은 초기 불교의 경전으로서, 기원전 1세기에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문서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아함은 산스크리트어 아가마(agama)에서 유래하며, 가르침 또는 말씀 모음집인 로기온(logion)을 뜻한다. 아함경에 독 묻은 화살에 관한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의사를 찾아왔다. 환자는 억울한 마음에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환자는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전에 죽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가 영원한가와 같은 문제의 해답을 알고자 하면, 그는 해답을 알기 전에 죽을 것이다. 석가모니에게 독 묻은 화살은 바로 번뇌의 화살이다. 욕망이라는 현실적 장애물을 제거하지도 않으면서 불멸의 영혼이나 무한대의 우주와 사후세계를 찾아 헤맨다면, 이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있는 신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라고 기록되어 있다.
잠언 30장 아굴의 잠언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궁창의 물을 옷에 담은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고 묻는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Faith is confidence in what we hope for and assurance about what we do not see)”라는 다소 난해한 구절이 있다. 珍光의 해석에 의하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현실로 이루어지게 하며(reality, exact representation), 보이지 않는 것까지 경험을 넘어 볼 수 있게 하는(not empirical evidence) 증거(proof)이자 선물(gift)이다.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에 입각한 과학자들은 애니미즘이나 영육이원론까지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마저 용납하지 못한다면, 영지주의나 신플라톤주의는 물론 삼위일체론도 파고들 자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현상을 밈이나 심리적 부산물로만 설명하려 한다. 과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하는 수많은 현상에 대하여, 진화론은 유용하면서도 값비싼 도구가 된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과학을 하는 방법론이라면, 과학적 방법론을 영적 세계에까지 확장하려는 태도는 지나치게 협소한 접근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신앙은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며,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은 곧 신을 부인하는 것이라 하였다. 궁극자, 창조주, 구세주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지, 어렵게 말하는 신학자들의 궁극적 관심을 떠나서 필부필부에게는 신앙은 신을 알고자 하는 지식이라 단순히 표현할 수 있다.
앞서 니키 검블 목사의 저서에 의하면,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파스칼, 케플러, 뉴턴, 패러데이, 다윈, 파스퇴르, 멘델, 맥스웰, 톰슨, 아인슈타인 등 저명한 과학자들은 유신론자이거나 최소한 불가지론자들이었다. 근래에는 양자역학이나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무신론의 짙은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우주의 시작과 생명의 탄생에 대하여 얼마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도 바울(Paul 5-65)에게 다마스커스의 회심(conversion)이 없었다면 골수 율법학자인 그를 설득할 자가 이 세상에는 없었을 것이다. 브루스(Frederick Fyvie Bruce 1910-1990)는 그의 명저 「바울(Paul: Apostle of the Free Spirit)」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제외하고는 바울의 회심과 위탁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은 없다고 기술한다. 신약성경 사도행전(Acts of the Apostles) 9장에 바울의 회심을 설명하는 극적인 장면이 나온다.
“As he neared Damascus on his journey, suddenly a light from heaven flashed around him. He felt to the ground and heard a voice say to him, ‘Saul, Saul, why do you persecute me.’ ‘Who are you, Lord?’ Saul asked. ‘I am Jesus, whom you are persecuting.’ he replied.”“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광신적인 율법주의자로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쟁이들을 체포해 압송하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위에서 환상 속에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난 후,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택정된 그릇이 되어 예수를 전도하다 순교에 이르는 스토리는 감동적이다.
2015년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중국의 장양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영혼의 순례길(Paths of the Soul)」이 상영되었다. 어느 날 티베트의 작은 마을 니이마에 세 가족 11인이 모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유로 신들의 땅이라 불리는 성산(聖山) 카일라스(Kailash 수미산)까지 총 2,500km에 이르는 오체투지 삼보일배의 순례길에 나섰다. 순례가 평생의 꿈인 노인, 죽은 동물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하는 백정, 출산을 앞둔 임산부, 어린 소녀 등이 나름대로 소원을 품고 성지를 향해 1년여의 긴 여정을 시작한다. 가는 동안 No Fear In My Heart이 배경음악으로 계속 흘러나온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서 시작한다. 차라투스트라와 싯다르타는 영혼에 지혜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여기에 더하여, 기독교는 영혼 분리를 전제로 하여 신과 인간이 교감하는 통로인 성령(聖靈)을 만들어 그 위격을 삼위일체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커다란 영역이 있다는 사실이 인간이 지구상에서 생명체의 상위 그룹으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珍光은 상상력을 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동물이 식물이나 원생동물에 있는 전체형성능(totipotency)을 포기하는 대신 감성과 기억과 언어와 생각을 얻었다면, 인간은 동물이기를 포기하는 대신 양심과 자유의지와 영혼과 문자를 얻었다. 미래의 인류는 영원한 생명, 즉 불사성(不死性, immortality)을 얻기 위해 육체를 포기하는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결단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우주와 지구와 자연과 생명현상에서 우연한 사실이나 기적에 대해서 신의 설계인지 자연의 선택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들은 매우 많다. 흔히, 남녀관계에서 아흔아홉 가지의 기적이 한 가지의 우연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기적과 우연을 자세히 알기 위하여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동원하거나 거대한 확률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으로 흐를 수 있다. 시골집 앞마당의 강아지가 하늘을 나르는 미지의 비행물체를 보고 짖어댄다고 해서, 비행기의 원리를 알고서 짖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