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A-4

제7장 삐딱한 신학 제8장 독재와 법치

by 김진광

제7장 삐딱한 신학


주기도문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천주교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암송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러시아 정교회 대한교구에서는 주기도문을 2020년부터 다음과 같이 암송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것이나이다. 아멘)


한국 개신교 개역개정판 새번역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장 12절을 한글 개역개정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성경은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RSV(The Revised Standard Version) 성경은

“and forgive us our trespasses as we forgive those who trespass against us;”라고 번역하고 있다.


누가복음 11장 4절을 한글 개역개정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NIV는

“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one who sins against us”,

킹제임스판(KJV, The King James Version 1611년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후원으로 54명의 학자들이 번역한 성경으로 흠정판이라고도 함)은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 one that is indebted to us”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몇 가지 주기도문 본문에서 죄지은 자를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자면 죄(sin, trespass)라기보다는 빚(debt) 또는 빚진 자(debtor)가 더 정확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빚을 죄라 번역하는 것이 더 종교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였으니” 중 어느 것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가의 문제다. 인간의 용서와 신의 용서 사이에 순서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간 사이에서 용서만을 놓고 보더라도 이는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용서를 구할 때에는, 먼저 인간이 인간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였다(혹은 인간이 인간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을 보다 확실히 선언하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용서하였으니”가 더 신앙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서 인간이 신에게 갈구하는 것은 보다 현실적이다. 일용할 양식과 빚 탕감을 언급한 후에야, 행여나 세상 죄의 유혹에 빠져 신세를 그르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순서상 타당하다. 당시 매일매일을 노숙자처럼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예수는 듣기 좋은 말씀뿐만 아니라 빵과 물고기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어 먹이며 데리고 다녀야 했기에, 신에게 드리는 기도도 그만큼 절실했을 것이다.


주기도문의 해당 부분은 마태복음보다 누가복음의 번역이 본문에 더 충실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모두 용서하였으니(‘사하여 주는 것 같이’가 아니라)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인간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먼저이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그다음이라는 의미에서 더 솔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죄를 짓는 자는 계속 생겨나고 있고 이들을 모두 용서하여야 하는 일이 신앙생활의 일부분이라면,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모두 용서하였는지 아니면 남에게서 용서받아야 할 죄를 지은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


물론 신의 용서는 아가페적이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 구원자)이며 살아있는 신의 아들로 믿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용서는 무의미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천국행 티켓을 받아 이제 구원의 문에 들어섰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의 문을 열고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 the order of salvation)을 따라 천로역정을 여행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은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영역에 종사하는 분들의 엄청난 반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 정도의 비전문가적 관점에 대해서 관용을 구하는 것이 비신앙적이라 보지는 않는다.


사도신경

개역개정판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은 다음과 같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NIV에 의하면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universal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사도신경의 역사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암송하기를 주저하는 교인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각종 모임에 참석하는 주교들의 가슴에 걸린 은십자가 목걸이는 연회석상의 포도주에 담긴 독을 검사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였다. 종교회의의 발표문은 구절구절 권모술수와 이해관계와 수많은 이단 단죄와 마녀재판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사도신경은 기존의 로마신경을 바탕으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된 것이다. 이 첫 번째 공의회에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Arius 256-336)를 이단(異端 heresy)으로 정죄하고 파문한다.


이단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모함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힌두교가 불교를 이단(나스티카 nāstika)으로 몰아세웠으며, 기독교가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이슬람 수니파가 시아파를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중세 시대 종교재판의 죄목은 단지 이단이라는 이유 한 가지였다. 한번 찍히면 죽거나 심각한 불구가 되었다.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을 때, 공식 성명서에는 가롯유다와 같은 자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가롯유다는 예수의 12제자의 한 명이었으며, 예수를 배반한 실체적 진실이 있는 자로서 그래도 가장 스탠다드한 이단의 전거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네스토리우스는 가롯유다에 상당할 정도로 예수를 배반한 증거가 있었는가? 여기서 珍光은 생각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아리우스 근처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작은 교리적 이견(신인양성론, 성모신성론)을 가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파문과 추방 끝에 객사하였으니, 이보다 더 억울할 일이 없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가 추방된 지 3년이 채 되기 전에 아리우스를 복권하고 추방령을 취소하였으며, 심지어는 아리우스파에게서 세례까지 받는다. 335년 황제는 오히려 아리우스 주교와 대척점에 있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 대주교를 추방하기까지 한다. 337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고 나서 아타나시우스파가 다시 득세하면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는 영구적으로 파문된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부(하나님), 성자(예수), 성령(Holy Spirit)의 삼위일체론 중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서 성자는 성부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성부만 있고 성자가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점에 근거한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가 본질상 같을 수 없다고 본다. 반면에 아타나시우스파는 성부와 성자 둘 다 동일 본질을 공유한다는 입장이다.


그리 중요할 것 같지 않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오리겐(Origen 185-253), 아리우스(256-336),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0-373), 네스토리우스(386-451)를 둘러싼 끝없는 이단논쟁과 마녀재판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지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상 하나(one substance, one nature)이나 위격(位格 hypostasis)이 다를 뿐(three personae)이라는 데 의견이 합의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불리는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숨어 있는 아리우스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정경(canon)을 정리하면서 그가 정경으로 지정하지 않은 서적들은 불태우라는 지침을 내리자, 수도원 수사들은 이를 파기하거나 일부는 항아리에 넣어 동굴 속에 숨겼다. 그중 하나가 거의 1,500년 만인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Nag Hammadi)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은 근처 파코미아 수도원(Pachomian monastery)에서 나온 파피루스 문서들로서 콥트어(Coptic language)로 쓰여진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문서들과 기타 다른 문서들이었다. 이중 대표적인 문서가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이다. 요즘 물 만난 고기처럼 도마복음의 해석에 몰두하는 서구 신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경건하게 암송하고 있다. 다만 원문에는 있으나 한글 사도신경에는 없는 부분, “He descended into hell”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천주교 사도신경에서는 이 부분을 “저승에 가시어”로 암송하고 있으며, 성공회 기도서에서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로 번역하고 있다. 1908년과 1958년 개신교 사도신경에서는 “음간에 나리샤”, “음간에 내리사”로 번역하고 있다. 음간(陰間)은 스올(Seol 죽은 자들이 가는 처소), 음부(Hades), 지옥(Hell, Inferos)의 의미일 것이다.


현재 개신교 사도신경에서는 이 부분을 번역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지옥강하설에 관한 논쟁인데, 예수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부흥하는 중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기 전에 저승 죽음의 세계 또는 지옥이나 스올, 무저갱, 혹은 연옥에 내려갔다는 사실을 대놓고 말하기는 어려웠다는 증언이 있다. 지옥강하를 ‘저승’으로 의역한 한국 가톨릭이나, 문구 자체를 삭제해 버린 한국 개신교나, 결국 신자들의 오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하나, 성부와 성자를 본질상 하나의 실체로 보는 관점에서 예수의 권세가 미치는 범위에 천국과 지옥을 구분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장소적 개념으로서 음부에 관한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사건 후 사망 가운데 있었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함으로써 사망 권세를 이겼다고 해서, 역사적 예수나 신적 예수에 대한 믿음이 손상되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1,5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원문을 그대로 살리고 원문에 충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8장 독재와 법치


솔론

고대 그리스에서 솔론(Solon 기원전 638-558)이 집정관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아테네는 세 부류의 정치세력이 있었다. 귀족으로 구성된 평지파(men of the plains)와 상인 중심의 해안파(men of the shore), 뒤늦게 형성된 농민 노동자 중심의 산지파(men of the mountains)가 그것이다. 솔론은 3개 파의 이해관계를 아우르면서 개혁을 단행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농업의 양극화로 경제는 피폐한 상태였다. 솔론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단행한 개혁정치를 정리해 보면, 첫째 무거운 짐 덜어주기(세이사크테이아 Seisachthei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부채 탕감 정책이었다. 현존하는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인신을 담보로 하는 대출을 전면 금지하였다. 부채 탕감의 범위에는 농경지를 담보로 압류된 농경지까지 포함하였다. 이로 인해 부채 때문에 노예계급으로 추락한 시민들의 신분이 회복되었다.


둘째 솔론은 올리브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였다. 올리브유가 수출주력상품이 되자 올리브에서 기름을 짜는 인부, 올리브유를 생산하는 기계를 만드는 기계공, 올리브유를 담는 그릇을 만드는 도공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올리브 산업이 발달하자 연관효과로, 당시 수도인 아티카(Attica)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도자기 산업에 종사할 정도였으며 도자기 역시 수출주력상품이 되었다. 이와 함께, 솔론은 모든 시민들이 자식들에게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가르치도록 장려하여 그들이 빈민층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솔론의 개혁정치는 인민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당면한 현재의 어려움인 부채와 가난을 국가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극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주력산업을 육성하여 미래까지 보장하려는 정책으로서, 3천 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현명하고 탁월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솔론의 개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다양한 법률을 정비하거나 제정하여 개혁을 제도화하고자 하였다. 솔론은 참주정치를 혐오하였으므로 법치라는 수단을 시도하여 제도화를 꾀하였다.


솔론은 자신이 만든 법률에 대해 시범기간을 설정하여 향후 10년 동안 이를 고치거나 폐지하지 말 것을 약속받은 후, 반대세력의 저항이나 로비를 피하고자 장기간의 해외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 솔론은 이집트를 방문하여 아틀란티스 신화(인류문명이 물로 멸망하여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키프로스에서 신도시(솔론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솔로이’로 명명)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솔론이 귀국하여 보니, 아테네는 페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기원전 600-527)가 그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던 참주정치(僭主政治, tyranny)를 시행하고 있었다. 페시스트라토스는 농민, 노동자 중심의 산지파를 배경으로 귀족, 상인계급과 투쟁하는 가운데, 두 차례의 추방 끝에 참주에 오른 입지적 인물이었다. 나름, 솔론의 정치를 계승 추종하려 하였다. 그러나 솔론은 망명을 결심하고 아테네를 떠난다.


솔론의 언급 중에는 자신의 처지와 경험으로부터 흘러나온 감회가 엿보인다. 훗날 크로이소스에게는 두 가지 불행이 닥쳐온다. 아들 둘 중 한 명은 농아였으나, 다른 한 명은 출중하였다. 그 중, 출중한 아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공교롭게도, 과거 살인을 저질렀으나 죄를 면하여 주었던 자가 던진 창에 맞아 죽었다. 또한 크로이소스는 키루스의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크로이소스는 장작불 위에서 화형당하는 자리에서 솔론의 이름을 세 번 외쳤다고 전해진다.


아테네에서 민주정이 수립되는 것은 이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기원전 510년경이다. 아테네에서 실제로 민주정은 스파르타와의 2차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410)과 겹치면서,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 nes)와 페리클레스(Pericles 기원전 495-429)의 재위기간인 약 180년 남짓 지속되었다. 솔론이 참주제를 혐오했던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일단 참주의 자리에 올라가면 내려올 방법이 없으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참주는 시민들을 인격적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서로 크기가 다른 돌멩이들처럼 도구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다.


키루스

헤로도토스는 현장답사와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히스토리아이(Historiae)」라는 탐사보고서를 스토리텔링하듯이 서술함으로써, 그 깊이와 사실관계에 관계없이 후세의 사가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기원전 580년경 메디아 왕국과 리디아 왕국은 전쟁 중이었다. 기원전 585년 일식(日蝕, solar eclipse)을 계기로 두 왕국은 화친을 맺고, 그 증표로 메디아 왕자 아스티아게스(Astyages)와 리디아 공주 아리예니스(Aryenis)의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그들 사이에 만다네(Mandane)라는 공주가 태어났다.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가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마고스(Magos 마술사)들의 예언을 믿고, 만다네를 피정복민 출신 페르시아인 캄비세스 1세와 결혼시킨다.


만다네 공주가 키루스를 출산하자, 아스티아게스(Astyages)는 개국공신인 하르파고스(Harpagus)를 시켜 외손자를 살해하도록 한다. 그러나 하르파고스는 그 지시를 따르지 않고 키루스를 목동 미트라다테스에게 맡긴다. 나중에 이를 알아챈 에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 앞에서 그의 자식을 화살로 쏘아 죽인 다음, 그 살로 만든 음식을 먹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원전 554년 키루스(Cyrus)는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와 전쟁을 시작한다.


키루스는 충복이 된 하르파고스의 도움을 받아 메디아의 수도 악바타나(Ecbatana)를 정복하고, 나라 이름을 페르시아로 바꾼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거대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es dynasty)의 시작이다. 이보다 앞서, 메디아 연합군에 의해 아시리아(Assur)가 멸망하였다. 키루스의 페르시아가 메디아, 리디아와 지중해 연안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국가들과 신바빌로니아 등 이른바 서아시아 3대 강국에 대한 패권을 차례로 장악함으로써 제국의 틀을 갖추었다. 이제 남은 곳은 그리스와 이집트 및 카스피해 동쪽에 있는 유목민연합체인 마세게타이(Massagetae)였다.


키루스는 먼저 마세게타이를 공격하였다. 키루스의 원정대는 처음에는 여왕의 아들인 마세게타이 총사령관 스파르가피세스(Spargapises)를 사로잡아 죽이는 등 우세를 보였으나,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여왕 토미리스(Tomyris)의 군대에 패배하고 키루스는 참수되어 피로 가득 찬 포도주 주머니에 담가졌다.


기원전 202년 해하전투(垓下戰鬪)에서, 초(楚)나라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중국의 중원을 통일한 한(漢)나라 유방(劉邦)은 북방 유목민족 집단인 흉노(匈奴)의 묵돌 선우(冒頓 單于)를 가볍게 여긴 듯하다. 유방의 군대는 평지에서 쓰던 전술만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기마궁수 騎馬弓手) 히트앤런을 구사하는 초원세력에게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키루스의 마세게타이 공략 실패 및 훗날 다리우스의 스키타이 전투 실패 경험과 유사한 점이 많다.


유방은 백등산(白登山) 전투에서 흉노에게 패배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져 빠져나와, 흉노와 굴욕스러운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된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의 동생 나라로서 한무제 시대까지 거의 60년 동안, 해마다 형님인 흉노에게 대량의 비단 쌀 술 등 특산물을 진상하고, 한나라 공주를 선우에게 혼인으로 보내며 국가를 유지해 가는 처지에 놓였다.


다리우스

솔론의 민주정에 대한 실험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 등장하는 시점까지도 지속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시조인 키루스가 전사하고 장자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기원전 530-522)가 왕위에 올랐다. 캄비세스는 폭력성이 강하고 지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캄비세스는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집트 원정에 나선다. 원정 기간 중, 동생 스메르디스(Smerdis)가 왕위를 찬탈하는 꿈을 꾸고 불안한 나머지, 심복인 프랙사스페스를 시켜 아우를 살해한다. 이 틈을 타서, 본국에서는 마고스가 가짜 스메르디스를 앞세워 집권한다. 공교롭게 캄비세스는 원정을 접고 귀환하는 과정에 병사하면서 제국은 공백 상태에 들어간다.


이때 오타네스(Otanes), 다리우스(Darius) 등 7인의 귀족이 나서서 일어나 마고정권을 수습하고 정체(政體)를 무엇으로 할지 논의한다. 7인 회의의 명단은 오르테스, 인타프레네스, 고르비아스, 메가비조스, 아스파티네스, 히타르네스 그리고 다리우스였다. 7인 회의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2,500년 전 페르시아 지도자들의 국가 정체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어,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민주정 혹은 법치주의라는 제도가 과연 민주주의라는 사상체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가라는 오랜 의문을 해결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7인 회의의 원로격인 오타네스는 민주정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캄비세스와 마고스의 횡포를 겪었다. 이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행동한다. 훌륭한 인물이라도 일단 독재자가 되고 나면 평상시의 사고방식을 벗어나게 된다. 독재자의 두 가지 악덕은 시기심과 교만이다. 교만은 그가 가진 지나친 부와 권력으로부터 생겨나고, 시기심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며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 반면에, 민중정치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관리들은 추첨으로 선출하며 모든 안건은 민회에서 결정한다.” 오타네스의 의견과 문제의식은 마치 아테네의 솔론과 페리클레스를 합쳐놓은 듯 이상적이었다. 아울러 당시 지구의 동편과 서편의 시대정신이 비슷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베가비조스는 과두정치(寡頭政治)를 주장하였다. “독재정치를 철폐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민중에게 정권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최선이 아니다. 민중보다 더 어리석고 교만한 존재는 없다. 독재자의 교만을 피하려다가 국가권력을 절제 없는 민중의 손아귀에 맡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은 겨울철에 불어난 강물처럼 맹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좌충우돌할 뿐이었다. 우리는 가장 훌륭한 자들의 집단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정권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다리우스가 나섰다. “민주제와 과두제와 군주제가 최선의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면 이 중 군주제가 월등하다고 주장했다. 가장 탁월한 한 사람에 의한 지배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과두제에서는 서로 공을 세우려 다투다가 반목이 생기고 파쟁이 생기며 유혈사태로 이어져, 결국에는 군주제로 회귀하기 마련이다. 민주제에서는 부패가 만연하게 되며 누군가 민중의 지도자로 나서 부패의 연결고리를 종식시키고 민중의 추앙을 받게 되면, 그가 곧 군주가 된다. 더구나 우리는 조상 전래의 관습을 쉽게 폐지해서는 안 된다.”


논란 끝에 다수가 다리우스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출마를 포기한 오르테스를 제외하고 6인이 선출방법을 결의하여 경선에 참여한 결과, 다리우스가 선출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새로운 왕에게 복종하였다. 다리우스의 선출 과정에 불공정한 비화가 있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자료만으로 추리해 보건대, 다리우스는 마고스를 척결하는 데 직접적인 공로가 있었고, 키루스와 가까운 집안이라는 연고가 있었다는 점에서, 모종의 인센티브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상앙

순자(荀子)가 주장한 법치주의에 대한 실험은 중국 진(秦)나라의 상앙(商鞅 기원전 390-339)과 이사(李斯 기원전 284-208)에게 계승되었다. 상앙은 위(衛)나라 사람으로서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구인령을 발표하자 진나라로 입국하였다. 등용된 상앙은 진효공을 설득하여 변법(變法 사회개혁법)을 시행하였다.


변법의 집행 수단은 한마디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 요약된다. 열 집 또는 다섯 집을 1개 조로 묶어 서로 감시하도록 하고, 어느 한 집이 죄를 지으면 나머지 집들이 똑같은 벌을 받도록 하였다. 이른바 십오제(什伍制)라고 하는 연좌제를 시행한 것이다.


한편 군공수작제(軍功受爵制)를 시행하여 전쟁터에서 적의 머리를 베어 오면 마땅한 작위를 내렸다. 이때부터 수급(首級)을 취했다는 말은 승진했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진나라는 변법의 시행으로 날로 강성해져서, 이류국가에 불과하던 진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秦, 楚, 齊, 燕, 趙, 魏, 韓)의 하나로 부상하여 천하 통일의 잠재력을 갖추게 되었다.


효공이 세상을 떠나고 혜문왕이 즉위하였다. 혜문왕(진혜공)은 어릴 적에 상앙이 만든 법을 어겼다가 스승이 대신 처벌을 받은 원한이 있었는지라 즉시 상앙을 탄핵했다. 상앙은 달아나다 변방의 여관에 들어갔으나 여관 주인은 상앙의 법에 의하여 여행증이 없는 손님을 묵게 하면 처벌받는다며 숙박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자승자박의 지경이 된 것이다. 상앙은 붙잡혀 거열형(車裂刑)이라는 가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상앙 집안의 가족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이사

이사(李斯)는 초나라 사람으로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1-233)와 함께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의 문하에서 배우고 뜻을 펴기 위해 진나라로 들어가 진시황을 섬겼다. 이사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군현제도를 시행하는 등 부국강병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라이벌인 한비를 독살하고 진시황에게 분서갱유(焚書坑儒 기원전 213-206)를 사주하기도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이사 열전에서, 이사가 진시황에게 분서갱유를 권하는 글을 보면, “군주를 비방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당파를 일삼고 있으니 이를 금하기 위해서 모든 문학과 시경 서경 제자백가의 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를 없애도록 하고 금지령을 내린 지 삼십 일이 지나도 없애지 않는 자는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을 가하여 성 쌓는 일을 하는 죄수로 삼으십시오. 의약 점복 농사 원예에 관한 책은 없애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쓰고 있다.


분서갱유는 한 때 백만 권 이상의 장서를 자랑하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기원후 391년, 로마 황제의 이교도 출입금지령과 이슬람의 침공에 따라 불타고 사라진 일을 떠올리게 한다. 이름난 문장가였던 재상 이사는 간축객서(諫逐客書)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을 남기고 있다.


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태산은 흙덩이를 따지지 않고 크기를 키우며

바다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고 깊이를 더한다


그의 삶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타국에서 온 빈객들을 추방하려던 왕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진시황이 37년 객사하자, 비서실장인 환관(宦官) 조고(趙高)와 국무총리인 승상(丞相) 이사는 유서를 조작하여 강직한 맏아들 부소(扶蘇)보다는 만만한 둘째 호해(胡亥)를 태자로 삼고, 부소와 그를 후원하는 장군 몽염(蒙恬)에게 자결을 명했다. 2세 황제가 등극하자 조고와 이사는 경쟁적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내세웠다. 선왕의 자녀 24명과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연좌제를 강화하고 세금을 더 무겁게 걷으며 부역을 징발하여 아방궁을 지었다. 그리하여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 중 절반이 이미 형벌을 받은 전과자였으며, 형벌을 받아 죽는 자가 날마다 시장 바닥에 쌓였다. 사람을 많이 죽인 관리를 충신으로 대접하였다.


마침내 충성 경쟁에서 승리한 조고는 이사와 그 아들을 모반 혐의로 투옥한다. 심한 고문 끝에 없는 죄를 자백하자 이사와 삼족을 멸했다. 이사에게 내려진 형벌은 비형(코를 베어내는 형벌)과 요참형(허리를 자르는 형벌)을 병과하는 것이었다.


이사의 스승인 순자(荀子)의 「순자」 군도편(君導篇)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지법지의 정법지수자 수박 임사필란 (不知法之義 正法之數者 雖博 臨事必亂)


법의 의로움을 모르면서 법을 다루는 자는 비록 박식할지라도 반드시 어지러운 일을 만들어낸다는 말은 현대의 국가시스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숙련된 관료와 법기술자에 의존하면 여러 사람이 불행해진다. 유능한 고급 관료였으나 그런 만큼 백성을 개돼지로 본 상앙과 이사는 수많은 전과자를 양산한 채, 그들 자신이 거열형(車裂刑)과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졌다. 죽을 때까지 억울함을 호소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들은 정해진 법에 따라 법대로 왕에게 충성한 죄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비록 진나라는 강력한 법치에 힘입어 일시적으로 부국강병이 되었지만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였다.


정치인들이 흔히 쓰는 사자성어 중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은 순자의 왕제편(王制篇)에서 유래하였다. 임금이 배라면 백성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엎어버리기도 하는 물이다. 국가의 지도자가 이 말을 단순한 선거용 수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인류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누구나 시늉은 할 수 있지만 실천은 거의 블가능한 주문처럼 여겨진다.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태사공자서

법가(法家)는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와 같은 과이면서도 안티테제로 생겨났다고 하겠다. 유가의 성선설과 다르게, 인간은 나면서부터 본래 악하다는 성악설을 기반으로 한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列傳) 마지막 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법가는 가깝고 먼 관계를 나누지 않고 귀하고 천한 것을 차별하지도 않으며 법에 따라 단죄하므로, 가까운 이를 가깝게 대하고 존귀한 자를 존귀하게 대하는 온정이 끊어지고 말았다. 한때의 계책은 될 수 있어도 오랫동안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엄격하여 온정이 적다’라고 한 것이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 분수와 직책을 분명히 함으로써 서로 권한을 뛰어넘거나 침범할 수 없도록 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珍光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겉으로는 법치를 표방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가깝게 대하고 존귀한 것을 더 존귀하게 대하여 온정이 지나치게 되는 것은 또 무엇인가? 법치를 표방한 온정주의가 만연하는 현실이 순전한 법치주의 못지않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법이라는 것이 큰 고기는 빠져나가고 작은 고기만 잡히는 이상한 그물이 되는 세태가 더 심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왕정 또는 독재와 법치주의가 교묘하게 결합하였을 때, 얼마나 합법적이면서도 비열하고 교활한 독재가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함무라비 왕에서부터 상앙, 이사의 법가, 여진 함보(函普)의 소매은(燒埋銀) 제도에 이르기까지 나름 그 시대에 걸맞은 법은 충분했다. 그러나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벌한 로베스피에르를 또다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법정은 같은 법률 같은 판사 같은 검사였다는 사실이다. 동시대 가장 완벽한 헌법이라고 평가되던 바이마르 헌법도 히틀러의 파시즘 정권 탄생을 마지 못했다. 우리의 어린 왕자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바보야, 문제는 엘리트(Elite)야, 엘리트는 이리떼야, 막스 웨버가 틀렸고 카프카가 옳았어” 그렇다면 대안은 있는가? 珍光이 아는 한 대안은 없다.


한편 민주정은 군주제, 과두제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의 제도에 불과한가? 아니면, 민주정이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 수준까지 고양될 수 있는 시스템인지 상고해 볼 때가 되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정신을 하나의 정신적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만 이를 너무 과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인류사에서 독재자의 폭정과 폐해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군중심리에 휩쓸린 광신적 폭력도 만만치 않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독재정과 민주정은 선택의 문제라기 보다는 심성의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는 파시즘과 자유의 팬듈럼(pendulum, 진자 振子) 사이의 왕복운동이라는 말이 타당하다면, 인류 역사에 어떤 제도가 있을 때 그것을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하여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 제도가 운용되는 사회와 개인에게 파시즘의 요소가 강하느냐 아니면 자유에 대한 의지가 강하느냐의 정도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 인간이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국면에 처하였을 때, 이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의지와 심성의 문제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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