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비단길 제10장 몬트리올 예수
제9장 비단길
실크로드
인도반도는 약 7천만 년 전까지는 섬이었으나, 약 3,500만 년 전부터 유라시아판과 충돌하면서 대륙에 편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대륙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화산활동이 일어나 데칸고원이 형성되고 히말라야산맥과 티벳고원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히말라야는 연간 약 5mm씩 융기하고 있다.
더 북쪽으로는 파미르고원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이 타림분지를 감싸고 있다. 산맥과 사막 사이사이에 동서문명의 교류를 담당하는 길들이 형성되었다. 천산산맥 북쪽의 천산북로와 천산산맥 남쪽의 오아시스북로와 오아시스남로를 흔히 실크로드라 부른다. 비단길은 15세기에 대항해시대가 열리기까지 2,000년 이상 동서간 문화와 상품의 주요 교역로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기원전 7세기부터 스키타이인들이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국가들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담당하는 초원길이 있었다. 초원길은 흑해와 카스피해와 우랄산맥과 알타이산맥을 연결하는 길이다. 비단길(Silk road, Seidenstrasse)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에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이 그의 저서 「중국본토」에서 처음으로 명명하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문명을 만들어내는 두 가지 시스템은 농경과 유목이었다. 이 중 농경민이 문자를 발명하고 사용하여 역사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유목민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흉노(匈奴) 동호(東胡) 서융(西戎) 북적(北狄) 남만(南蠻)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동일한 음가(音價, phonetic value)를 나타내는 한자를 사용하면서, 최대한으로 유목민을 비하하는 글자를 선택하는 것으로부터 잘 알 수 있다. 奴는 종 또는 노예를 뜻하며, 胡와 戎 狄 蠻은 미개한 이방인을 뜻한다.
이 장을 쓰기 위하여, 정수일의 저서 「고대문명교류사」 및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공원국의 「유목문명기행」, 스기야마 마사아키의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장건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등극하면서 한 고조 유방 이래 굴욕을 안겨준 흉노에게 구원을 청산할 기회가 왔다. 기원전 138년 한무제는 장건(張騫)과 귀화한 흉노인 감보(甘父)를 월지(月氏)에 파견한다. 월지를 가는 목적은 과거 흉노에 원한이 있는 월지와 동맹을 맺어 양쪽에서 흉노를 치기 위함이었다.
장건 일행은 천산북로를 통해 나아가다가 흉노에 붙잡힌다. 거기서 반쯤 포로 상태에서 결혼도 해가면서 10년을 머무르다 탈출하여, 파미르고원을 넘어 대완(大宛 Fergana)과 강거(康居)를 거쳐 월지에 도착하였다. 월지는 원래 감숙(甘肅) 지방에 살고 있었으나, 흉노의 침략으로 대다수의 백성이 서쪽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오손(烏孫)의 침략으로 소그디아나(Sogdiana 속특 粟特) 지역으로 옮겨갔다. 월지는 알렉산더 왕의 군대가 병합한 지역인 대하(大夏 Bactria)를 복속하고 거기에 정착하여 훗날, 쿠샨왕조(Kushan 貴霜 기원후 30-375)로 이어진다.
장건이 방문할 당시 월지는 국태민안의 전성기여서 흉노와 전쟁을 벌일 의사가 전혀 없었다. 실망한 장건은 기원전 128년 오아시스 남로를 통하여 귀국길에 오른다. 오는 길에 다시 흉노에 붙잡히는 등 고생 끝에 13년 만에 흉노인 아내와 감보와 함께 장안(長安 한나라의 수도)으로 돌아온다. 죽은 줄만 알았던 장건 일행이 돌아오자, 한무제를 포함한 대신들이 손수 마중을 나가 크게 울며 맞이했다고 한다.
이후 장건의 2회에 걸친 추가 사역으로 동서 간 중앙아시아 통로가 열리고 견마(絹馬)무역이 활발해진다. 8세기 말에는 위구르(Uyghur)가 당(唐)나라에 판매한 말의 숫자가 연간 10만 마리에 달하였다고 하니, 말 한 마리를 비단 40필로 계산하면 1년 동안에 평균 400만 필의 비단이 거래된 셈이다.
말과 비단 외에도 비단길을 통하여 유리, 화약, 종이, 나침반, 인쇄술과 인도의 면화(棉花)가 지나갔다. 이 밖에도 호두, 석류, 포도, 사과, 살구가 오고 갔으며, 이들을 실어 나르는 말과 낙타를 통하여 각종 전염병과 면역 체계도 함께 전파되었다.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와 불교와 문자라는 귀중한 문명적 가치가 이 길을 지나 오아시스 국가들과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반초
장건 이후 전한(前漢)의 서역 경영으로 하서회랑(河西回廊)이 설치되고 서역의 55개국이 한나라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전한과 후한(後漢)의 혼란기를 틈타서 서역의 많은 나라들이 다시 흉노의 수중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반초(班超 기원후 32-102)는 명문가 출신이다. 형은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 32-92)이며, 여동생은 「여사(女誡)」의 저자인 반소(班昭 49-120)다. 반초는 문관 출신임에도 40세 나이에 의연하게 서역 경영의 출사표를 던진다. 이른바 ‘투필종군(投筆從軍 붓을 던지고 칼을 잡는다)’이다. 반초는 36명의 부하를 데리고 “불입호혈 언득호자(不入虎穴 焉得虎子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를 외치고, 서역의 초입에 있는 선선(鄯善, 누란 樓蘭) 왕국으로 들어갔다.
당시 서역에는 타림분지를 에워싸고 30여 개의 작은 도시국가들이 산재해 있었다. 천산산맥의 남쪽과 타림분지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북로에는 차사(車師), 언기(焉耆, 카라샤르), 쿠차(구자 龜玆) 고묵(姑墨), 온숙(溫宿), 소륵(疏勒, 카슈가르) 등이 있었으며, 곤륜산맥의 북쪽과 타림분지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남로에는 선선, 우전(于闐 우기 호탄), 사차(莎車)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초는 선선과 우기, 소륵, 구자를 옮겨다니며 30여 년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법으로 서역경영에 진력한 결과, 마침내 서역 50여 나라들이 한나라에 귀속되었다. 반초 사망 후 서역은 또다시 혼란에 빠진다. 한나라는 123년에는 반초의 아들 반용(班勇)을 파견하여 17개 나라를 귀속시켰다.
월지
기원전 중앙아시아 지형을 살펴보면 유목민에게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난 세 군데 지역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 지방으로 스키타이 본진이 거주하던 곳이다. 둘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서 소위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여기에는 일찍이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가 자리 잡았다. 셋은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위치한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국가로부터 서쪽으로 길게 뻗어 시르(Syr)강과 아무(Amu Oxus)강 사이 트랜스옥시아나(Transoxiana)에 이르는 지역이다. 오아시스 국가 동쪽으로는 기련산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은 원래 월지의 근거지였다. 월지는 중국의 비단과 알타이산맥의 금과 박트리아의 옥을 중개무역하여 이득을 취하는 한편, 기련산맥 기슭에서 가축을 키우면서 오아시스 도시국가의 농산물과 수공예품을 수입하여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한편, 고비사막 아래 오르도스 고원에 근거를 두고 있던 흉노는 수장 두만 선우(頭曼 單于)의 아들인 묵특(冒頓)을 월지(月氏)에 인질로 보내 양국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흉노와 월지 간 전쟁이 벌어지자, 묵특은 월지를 탈출하여 흉노로 돌아와 아버지 두만을 명적(鳴鏑, 울음소리 나는 화살)으로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다. 기원전 200년 묵특의 흉노는 중원을 통일한 한나라 군사를 백등산에서 격파하고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이 기세를 몰아 동쪽으로는 흥안령(興安嶺) 일대에 있는 동호(東胡)를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기련(祁連)산맥과 타림분지에 근거한 월지를 천산산맥 북쪽의 나라 오손(烏孫)과 함께 공략하였다.
기원전 176년 흉노에게 패한 월지는 천산북로를 넘어 소그디아나(Sogdiana)와 그리스계 박트리아(Bactria) 지방으로 이동하여 정착한다. 월지가 중심이 되어 세운 쿠샨(Kushan 기원후 30-375)왕조는 그리스 문화와 인도 불교를 융합하여, 간다라 미술(Gandhara art)이 상징하는 ‘팍스 쿠샤나(Pax Kushan)’를 창건하고 장차 대승불교 전파와 융성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마라집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rajiva 344-413)은 구자(龜玆) 출신으로서 인도의 명문 귀족인 아버지 쿠마라야나와 구자 왕국의 공주인 어머니 지바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의 나이인 356년에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카슈미르(Kashmir) 얀기사르(Yarkand)에서 대승(大乘)불교와 소승(小乘)불교를 배우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구마라집의 시대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439)였다. 오호십육국시대는 넓은 의미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포함된다. 한(漢)나라가 망하고 조조의 위(魏), 유비의 촉(蜀), 손권의 오(吳)가 할거하는 삼국시대가 도래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진(晉)나라를 사마염(司馬炎)이 찬탈하고 서진(西晉 266-316)을 세웠다.
서진이 이민족 용병들에 의해 멸망하자, 사마씨 가문은 남쪽으로 피난하여 현지 호족세력들과 함께 동진(東晉)을 건국하였다. 진공상태가 된 화북지방에는 이민족 국가들이 활개치게 되었으니, 이를 오호십육국시대라 부른다. 5호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羯) 강(羌) 저(氐) 등 다섯 이민족을 뜻하며, 16국은 오호 또는 한족이 화북지방에 세운 주요 16국을 뜻한다.
역설적이게도, 중국 불교는 이민족이 지배하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한다. 티베트계 저족 출신 부견(符堅 337-385)은 전진(前秦)의 3대 왕으로서 신하 왕맹(王猛 325-375)의 보좌를 받아 화북을 통일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통일을 목표로 내세우고 부하 장수 여광(呂光 338-399)에게 서역을 정벌하도록 하는 한편, 백만 대군을 징집하여 동진(東晉)을 공격한다.
384년 전진의 장군 여광(呂光 337-399)은 구자로 쳐들어가 구자의 왕을 살해하고 구마라집을 포로로 잡는다. 구마라집은 양주(凉州)에서 18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부견의 백만대군이 비수(淝水) 전투에서 동진에게 의외로 패하자, 여광은 후량(後涼)을 세우고 왕이 된다. 그 후 부견의 부하 장수 요창(姚萇)이 반란을 일으켜 전진을 멸하고 후진을 세운다. 붙잡힌 부견은 충의를 저버린 요장을 질책하고, 수감된 사찰에서 예불을 드린 후 사약을 받는다.
401년 후진(後秦)의 왕 요흥(姚興)이 불교에 심취하여 당시, 후량에 머물고 있던 구마라집의 신병을 확보하여 장안으로 데려와 국사로 삼고 불경을 번역하게 한다. 구마라집은 생전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금강경(金剛經) 등 약 300여 권의 불경을 번역하였다. 우리가 아는 불교 용어인 관세음보살, 극락, 지옥,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들이 그가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구마라집은 본의 아니게 10명의 부인을 거느린 파계승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부담을 느꼈을 것인데 생전에,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을 보고서 향기만을 취할 뿐 더러운 진흙은 보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제법(諸法 dharma)이 공상(空相)이며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이 모두 공(空 śūnyatā)이었던가? 구마라집은 불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무(無)’ 대신 ‘공(空)’이라는 글자를 차용하였는데, 노자(老子)가 이미 무(無)라는 글자를 너무 멋있게 사용하였으므로 부득이 공(空)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구마라집은 불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불경 원전이 표음문자(소리글자)인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는데 반하여, 한자는 표의문자(뜻글자)임을 고심하여 의역(意譯)과 음역(音譯)을 노련하게 사용하였다.
구마라집의 번역 방식은 아직 글자가 만들어지지 않은 신라와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뜻을 표기하기 위해서는 뜻이 같은 한자를 차용하고(의역),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소리가 같은 한자를 차용하는(음역) 방식을 채택하여, 나름 독특한 시의 형식인 향가(鄕歌)와 만엽집(萬葉集)이 탄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는 관세음보살이 탄생하였다. 관세음보살의 출생지는 AD 1세기 쿠샨왕조의 간다라(Gandhāra) 지방이다. 흉노의 공격을 피하여 서쪽으로 서쪽으로 방황하다가 박트리아에 정착한 월지의 땅에서, 헬레니즘의 스토아(Stoa) 철학과 인도 불교의 깨달음의 지혜가 만나 관세음보살과 미륵보살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비단길의 주역은 인간과 동물과 무생물뿐만이 아니었으니, 비단과 말과 식물의 씨앗과 바이러스 외에도 사피엔스가 이루어낸 무형의 정신적 가치가 통행하였다.
구마라집 사후 200여 년이 지난 다음, 당나라의 현장 법사가 인도를 다녀와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śvara)’을 원문에 충실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번역하였다. 자비와 연민의 보살은 중생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주는 자이면서, 동시에 울부짖지 않아도 스스로 중생의 형편을 잘 아시는 자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현장
현장(玄奘 602-664)은 당(唐)나라 승려로서 불교 경전을 산스크리트어(Sanskrit) 원문으로 연구하고자 열망하였다. 629년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그 당시 외국 여행을 금지한 법을 어기고 약 2만km 밖 인도로 떠났다. 16년 후인 645년에 귀국하여, 인도여행 견문을 정리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당 태종에게 바치고, 가지고 온 불교 경전의 한역에 착수하였다. 대표적인 번역이 대승불교의 정수인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 600권이며, 이를 260자로 요약한 경전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반야경전에 의하면, 반야(般若 지혜)의 바라밀(到彼岸 완성)을 통해 해탈(moksha)하고 열반(nirvana)에 이르기 위해서는 6가지의 덕목을 실천하여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가 그것이다.
대당서역기는 전 12권 dir 10만 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아시아 및 인도의 136개국의 불적과 풍속 생활 등을 담고 있다. 이 중에서 현장이 방문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왕복 여정에서 57개국에 이른다.
혜초
현장으로부터 약 백 년 후, 신라인 승려 혜초(慧超 704-787)가 천축(인도)을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혜초는 신라인으로서 15세에 당나라 광주(廣州)에 들어가 천축국 출신 밀교승(金剛智 671-741)을 사사하였다. 금강지가 입적하자 그의 제자 불공(不空)에게 사사한다.
스승인 금강지의 권유로 723년에 광주를 떠나 바닷길로 수마트라와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에 들어간다. 약 4년 동안 인도와 서역 지방을 수행하고 구자(龜玆 Kucha)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온다. 혜초가 밀교승의 길을 택한 것은 8세기 당시 중국 불교가 이미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전성기를 지나 쇠락하고 있었고, 밀교가 성행하는 중이었음에 연유한 것이라 짐작한다. 혜초가 방문할 당시 인도는 불교가 기반을 잃고 힌두교가 다시 득세하고 있었으며, 쿠샨왕조에 이어 사산 왕조(Sassanid Dynasty)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아랍인의 이슬람교가 주류로 부상하는 시기였다.
혜초가 신라인임을 증명하는 사료로서는 불공(不空 705-774)의 유서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이기 때문이다. “오부(五部)의 일가를 이룬 나의 여섯 제자 중…… 신라의 혜초…… 후학들을 계시해서 법등(法燈)이 끊이지 않도록 하여 나의 법은(法恩)을 갚도록 하라” 당나라 승려 혜림(彗琳)이 쓴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불경 사전)」에서도 혜초가 3권의 “왕오천축국전”이란 책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그 내용보다는 그것을 발견하게 된 스토리가 더 드라마틱하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에 의하여, 중국 서북부 감숙성 돈황(燉煌) 천불동(千佛洞)에서 필사본으로 발견되었다. 천불동의 원래 명칭은 막고굴(莫高窟)이라 하며, 보통 돈황석굴이라 불린다. 돈황(燉煌)은 한무제 때 장건의 서역착공을 계기로 개척된 도시로서, 1-2세기의 반초 부자와 5세기의 구마라집(鳩摩羅什)과 7세기의 현장과 8세기의 혜초가 이곳을 지나갔으며, 13세기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수많은 여행가와 탐험가들이 지나간 동서의 관문이었다.
돈황문서는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구자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씌어져 있으며, 도합 삼만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문서의 작성 연대는 368년부터 1032년까지 다양하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서 다섯 편의 오언시(五言詩)를 남기고 있는데, 그 중 남부 인도(남천축)로 가는 바닷길, 베트남 근처에서 쓴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我國天岸北 (떠나온 고국은 하늘 북쪽에 있고)
他邦地角西 (가려는 천축은 땅끝 서쪽에 있네)
日南無有雁 (뜨거운 남쪽 나라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誰爲向林飛 (누가 내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혜초의 여행기가 돈황석굴에서 용케 발견되었으나 지금까지 타국에 머물러 있으니, 고국에 소식을 전해줄 기러기는 여전히 없는 셈이다. 4년여에 걸쳐 바닷길로 가서 비단길로 돌아오는 여정은 현장법사처럼 화려한 행차는 아니었다. 혈혈단신으로 인도에 들어가 인도 불교의 몰락과 수많은 오아시스 도시를 견문하였다. 천산산맥의 눈설과 파미르 고원의 험로를 직접 보고 돌아와 돈황석굴에서 묵언수행으로 기행기를 남겼으니, 한 편의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왕오천축국전은 1,500년이 지난 지금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혜초 승에게 고국이 따로 있을 수 없겠지만, 밀교승이 되어 인도 불교의 마지막 시기를 보고 돌아오는 마음은 착잡하였을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착종하던 도시국가들의 역사와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연구가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행하여지고 있음을 보는 珍光의 마음도 착잡하다.
제10장 몬트리올 예수
몬트리올 예수
무명 배우 다니엘은 몬트리올 교회로부터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예수의 수난을 담은 연극의 연출을 맡아줄 것을 제안받는다. 그는 자신이 직접 쓴 대본을 들고서 배우들을 찾아 나선다. 다니엘이 예수 역을 맡고,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세례요한, 빌라도 역을 캐스팅하고 연습에 들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연극의 막은 오르고, 교회 측의 기대와는 달리 야외 공연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다. 삽시간에 현장은 흥분과 감동의 박수 소리에 들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감동은 잠시, 경찰들이 몰려와 배우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공연장에 설치한 십자가가 무너져 내려 다니엘 위에 떨어진다. 의사는 다니엘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그에게서 별다른 차도가 없자, 담당 의사는 장기 기부를 위해 친구들의 동의를 구한다. 그의 눈과 심장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제공된다. 다니엘의 죽음 이후, 연극을 같이 했던 친구들은 극단을 창립하여 연극 공연을 계속한다.
흔히 기독교의 진수를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십자가와 부활을 일상생활 속에서 일상적인 언어로 보여준 셈이다. 珍光은 이 영화가 교계의 항의를 받아 국내 상영이 제한된 시절에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때 영화가 주는 암시가 너무 커서 그 후로 오랫동안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예수가 몬트리올 예수, 서울 예수로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고 생각하던 중, 정호승 시인의 「서울의 예수」라는 시를 접하게 되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는 역설을 마주하면서, 한국 교회에 대하여 뭔가 할 말을 해야겠다는 심증을 굳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을 마주할 때, 예수를 지나치게 의인화하면 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지 않느냐, 종교다원주의에 불과하지 않느냐라는 비판은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신플라톤 철학과 오리겐의 알레고리와 융의 신화를 이단이라고 이야기하면, 갈릴레이도 이단이고, 네스토리우스도, 히파티아도, 잔다르크도, 뉴턴과 다윈도, 유관순도, 불트만도, 아인슈타인과 틸리히도 이단이다.
역사적 예수가 어느 날 서울 한복판에 나타나 신약의 초기 시대처럼 일상의 언어로 말하며 일상의 몸짓으로 다가온다면, 그를 부담스러워하는 부류들과 수많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인가? 가롯유다가 오히려 이단을 정죄하는 자기모순적 역설에 성직자들은 언제까지 눈감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지난날, 페스트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병든 자를 돌보며 죽은 자를 염하던 기독교공동체의 형제애는 어디 가고, 알렉산드리아 키릴루스 주교의 형제단(Parabalani 파라발라니)이 저지른 이단 사냥질에 남은 것은 정치깡패라는 오명뿐이다. 자유당 시절 서북청년단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국립대학 입학 허가증의 무게는 1948년 4월 3일까지 1년여 동안, 제주 땅에서 스러져간 수만의 희생 앞에서 너무도 가볍게만 느껴진다. 그들과 작별하기에는 남아 있는 아픔이 너무 크다. 그래서 아직도 작별하지 않는다.
2023년 11월 27일자 연합뉴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천문학 교수를 꿈꾸던 15세 소녀가 급작스러운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뒤, 장기를 기증하여 다섯 명의 생명을 살리고 하늘로 떠나갔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이예원 양이 분당차병원에 심장, 간, 좌우 신장을 기증했다고 밝혔다. 아버지 이준재 씨는 “하늘나라에 매일 같이 편지로 일상을 전하며 딸을 그리워하고 있다. 예원이에게서 새 생명을 얻은 분들이 건강하게 예원이 몫까지 열심히 살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밝혔다.
오리겐
오리겐(Origenes 185-255)처럼 인생을 치열하게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오리겐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7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아버지가 순교하고 재산을 몰수당하자,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리문답학교의 교사가 되어 가르쳤다. 오리겐은 히브리어 성경과 5가지 헬라어 성경을 비교한 「헥사플라(Hexapla)」를 편찬, 주석하는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훗날 이단으로 정죄되어 지금은 단편적인 내용만 남아 있다. 오리겐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문자적 의미를 넘어, 그리스 철학을 기반으로 한 알레고리(비유)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러다 보니 원리주의자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남녀 간 이혼에 관해 질문하면서, 이혼 절차가 그리 엄격할 바에는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는 “나면서 고자(eunuch)된 자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일부러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다”고 말씀하였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남녀 간 성욕은 인간의 본성인데 고자가 아닌 바에야 결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서, 고자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자, 살면서 환관으로 만들어진 자(예컨대 왕실에서 시중드는 자나 사마천처럼 궁형을 받은 자),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의 길을 선택한 자(예컨대 사도 바울, 가톨릭 성직자)가 있다고 말씀한 것으로 이해한다.
오리겐은 사도 바울의 길을 선택하고 몸을 혹사하여 성적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창조주가 주신 몸에 일부러 육체적 거세 상태를 만들어야 했느냐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서는 모가 나면 정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선각자들의 말로는 항상 비참하였다.
알레고리 성서학자에 어울리지 않게, 성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 원문에 엄격하였다. 오리겐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스스로 성불구자가 되었다. 차가운 바닥에서 일부러 오래 지내다 보니 저절로 성적 불능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이 약점이 아닌 약점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오리겐은 종말에 가서는 마귀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다 구원받을 것이라는 “보편적 구원론”을 주장하였다. 마귀나 죄지은 자들은 응당 지옥에 떨어져 천벌을 받아야 하는데, 무저갱에서 고생 좀 하다 보면 구원받는다고 하였으니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오리겐은 선구자적인 신학자이자 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서품(敍品 ordination, 교회 신도 중에서 특별히 가려낸 사람들에게 교직을 수여하는 의식)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레아(Caesarea) 주교에게서 서품을 받아내자,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오리겐을 출교한다.
AD 250년에 로마에 전염병이 돌자, 데키우스 황제(Decius 재위 249-251)는 그 원인을 기독교에 돌리고 많은 교인들을 처형하였다. 255년경, 나이 많은 오리겐은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의 레바논 남부에 있는 지중해 해안도시 두로(Tyre)에서 사망한다. 오리겐은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루터와 뮌처
16세기 종교개혁은 1517년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교 교문 벽에 써 붙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시작하였다. 루터는 반박문에서 로마교회의 면죄부 판매행위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루터는 철학을 전공하였으나,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법학 박사 과정에 진학하였다. 법대에 진학한 지 몇 달 후, 길을 가는 도중에 떨어진 벼락에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순간적으로 성(聖) 안나(Anna,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광부들의 수호신)에게 수도자가 될 것을 서약한다.
루터가 사제서품과 신학박사, 비텐베르크 대학교수, 수도회 감독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중, 1515년 교황청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수도사 요하네스 테첼(Johannes Tetzel 1465-1519)을 파견하여 면죄부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테첼은 “헌금함에 쨍그렁 하는 소리가 나는 순간 연옥의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웅변하면서, 면죄부 판매를 독려하였다. 루터는 파렴치한 신성모독을 중단하라고 비판하였으며, 테첼 역시 루터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대주교는 루터를 교황청에 고발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루터의 반박문은 독일어권 전역에 퍼져나갔다.
1521년 로마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루터는 체포와 살해의 위협 속에서 영주들의 보호를 받으며 루터 독일어 성경 번역판을 발행하는 등 종교개혁을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이어 나갔다. 독일어 성경 루터 번역판은 당시 발명된 인쇄술에 힘입어 독일 전체에 보급되었으며, 종교개혁의 불길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루터는 “산헤드린(Sanhedrin)”이라는 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성경에서 산헤드린은 예수에게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운 유대인 종교회의인데, 루터가 개혁적인 라틴어 성경 번역 작업에 산헤드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는 대범하고 포용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러나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를 지도자로 하는 농민들의 사회개혁 요구에는 단호히 반대하였다. 루터는 로마교황청의 횡포에는 맞섰지만 영주 귀족과 농민 농노 사이에서는 귀족 편에 섰다. 루터는 종교개혁이 세상적인 사회개혁으로 확산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을 보면, 루터보다 1,100년 전 후진(後秦)에 포로로 잡혀와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던 구마라집의 처지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라틴어의 문학성을 살려가면서 유려하고 알기 쉽게 번역된 독일어 성경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합력하여 무상으로 폭발적으로 보급되었다. 루터 생전에 1백만 부가 팔렸다고 하니, 당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다 읽었다고 할 수 있다.
내일 이 땅에 심판의 날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Wenn ich wüsste, dass morgen der jüngste Tag wäre,
würde ich heute noch ein Apfelbäumchen pflanzen)”
스피노자의 말이 아니라 루터의 말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를 바탕으로 한 온건하고 비폭력적인 방향이었다. 따라서 급진적이며 농노계급의 당면 문제까지 해결하려는 칼슈타트(Karlstadt 1480-1541)나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와는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루터는 이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루터는 16세 연하의 수녀 출신 여성인 카테리나와 결혼하였다. 종교개혁 초기에 개혁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수녀들이 보복 위험을 피하고자 루터에게 도움을 청했다. 수도원에 청어를 납품하는 상인의 상자에 숨겨서 수녀 10여 명을 탈출시키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카타리나(Katharina von Bora 1499-1552)였다. 루터가 중매를 두 번 섰음에도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자, 카타리나가 루터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루터의 집에는 6명의 자녀와 고아인 조카 6명 외에 대학교 조교 신분인 20~30여 명의 학생들과 유모, 집사, 하녀, 가정교사 등 총 50여 명이 숙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맥주 공장과 포도 농장, 축산 및 양어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턱도 없이 모자란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루터는 남다른 기억력으로 글을 빠르고 거침없이 잘 쓰는 편이었다고 한다. 반면, 말은 수시로 육두문자를 섞어대는 독설가였다. 이단을 죽이자는 추종자들의 주장에 이단을 태울 장작불에 거위나 구워 먹자며 반대하였다. 영적 투쟁은 세속적인 수단인 폭력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 점에서 토마스 뮌처와 달랐다. 루터의 사상은 권위에 대한 믿음(fides in auctoritate)을 믿음의 권위(auctoritas fidei)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루터가 죽고 나서 그의 모든 저작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뮌처는 초기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였으나, 성경 중심의 종교개혁에 그치지 않고 성령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사회의 봉건적 악습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25년 5월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은 루터의 지지를 원했으나, 루터는 오히려 이들을 기독교도가 아닌 자들(unchristian)이라 규탄하며 진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농민군은 포병도 기병도 없고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프랑켈하우젠(Frankenhausen) 전투에서 영주들의 연합군과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사로잡힌 뮌처는 온갖 고문을 받은 끝에 참수형에 처해졌다.
돌이켜 보면, 뮌처의 개혁 사상은 300년 이상 너무 앞선 것이었다. 사회주의 실험을 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1천 년 이상을 지속한 중세가 면죄부 사건으로 정교분리의 시발점이 된 것까지는 행운이었으나, 함무라비 법전 이래 4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왕과 귀족과 서민의 삼분법은 쉽게 허물어질 체제가 아니었다. 이로써 시대를 너무 앞서가면, 본인은 물론 수많은 추종자들까지 연좌되고 이단으로 정죄된다는 법칙 아닌 법칙이 증명되었다.
바리새인
페르시아 제국 시절, 유대인 지도자 에스라(Ezra)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동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지(기원전 458년) 100여 년 지난 기원전 333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의 군대가 페르시아를 정복한다. 알렉산더의 사후, 제국의 연장선 상에 있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대인을 탄압하자,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eus 기원전 165-160)와 형제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켜 하스모니안(Hasmonean) 왕조(기원전 142-63)를 수립한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Pompey 기원전 106-48)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헤롯(Herod 기원전 73-4)을 유대지방의 왕으로 삼는다. 기원후 66년, 또다시 유대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제국 로마는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9-79) 장군과 그의 아들인 티투스(Titus 39-81)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파괴한다(70). 유대인들은 마사다(Masada) 항전으로 최후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끝내 패배하고, 디아스포라(Diaspora) 신세가 되어 2천 년의 기나긴 유랑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신구약 중간기라 불리는 기원전 300년의 기간을 설명하는 자료는 「마카비서」와 요세푸스(Josephus 37-100)의 「유대전쟁사」 정도이다. 유대인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상을 떠돌기 전 300여 년간은 셀레우코스왕조, 헤롯왕가, 로마제국과의 항쟁과 하스모니안 왕조의 내분으로 점철된 기간이었으며, 처절한 저항의 끝은 나라를 잃은 유랑민으로 귀결되는 비극이었다. 그들의 신 야훼도 포기한 것 같은 버림받은 시절에 예수가 태어났고, 예수는 33년 후 유대인 바리새파의 주도로 체포되어 신성모독죄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바리새파(Pharisees)는 유대교의 경건주의 종파로서, 기원후 70년 유대 독립전쟁에서는 친로마 노선을 취하여 살아남았다. 바리새파 중 힐렐(Hillel)의 손자이며 저명한 율법교사(랍비 Rabbi)인 가말리엘(Gamaliel)의 제자가 사도 바울이다. 바리새파 외에도 제사장 중심의 기득권층인 사두개파(Sadducees)와 금욕적인 에세네파(Essenes), 무력 항쟁을 지지하는 젤롯(Zealot)이 있었다.
‘바리새’라는 이름의 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珍光의 추론에 의하면,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온 페르시아 출신의 엘리트 계층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슬람에 밀려나 인도에 정착한 조로아스터교도를 지금도 파르시(Fars, Parsi)라고 부른다. 파르시 후손 중 대표적으로, 그룹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본명 Farrokh Bulsara 1946-1991)가 있다.
길선주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종교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거나 내분이 극심할 때 강화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이 정통 여부나 이단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1907년 평양에서 기독교 대부흥 성회가 열렸다. 대부흥운동을 이끈 사람은 길선주(吉善宙 1868-1935) 목사였다. 길선주는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장사를 하다 실패하는 등 어려움을 겪은 끝에 입산수도하여 도를 닦고 있었다. 지인의 소개로 「천로역정(天路歷程)」을 읽고 사로잡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 목사가 되어 평양 대부흥운동을 이끌어낸다.
길선주 목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3·1 독립선언에 동참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옥중에서 요한계시록을 1만 번 읽고 출옥 후, 북간도와 함경도를 돌며 전도 여행을 펼치다 부흥 집회 중 쓰러져 사망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평양 대부흥회에 앞서 1903년, 원산에서는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선교사의 주도로 대부흥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김백문
1910년 한일합방으로 상당수 민중이 간도(間島)와 사할린(Sakhalin)으로 떠나가고, 반도 내에서는 뜻있는 많은 민중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혀 혹독한 고문으로 폐인이 되거나 유랑생활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 1917-1990)은 경북 칠곡 출신으로서 함경도 회령에서 일하는 형을 따라갔다가, 김남조라는 여인의 전도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에는 원산에서 평양신학교를 나온 백남주(白南柱)의 제자가 되었다.
육이오전쟁으로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중에 「기독교근본원리」를 저술하였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이고 844페이지에 달하는 「기독교근본원리」는 그동안 흩어져 있는 한국판 기독교 이단사상을 집대성한 저작으로서 후일, 통일교나 JMS교의 기본교리가 되었다고 한다.
김백문은 1945년 해방 직후 경기도 파주에 이스라엘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육이오 후에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청수교회(淸水敎會)를 세우고 활동하였다. 「기독교근본원리」라는 책은 시중에서 찾을 수 없어 그 내용을 상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없으나, 종교학자 탁지일 교수의 「김백문의 기독교근본원리」에 의하면, 김백문은 구약성경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을 핵심교리로 다룬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시점상 세 가지 이상의 전승을 합쳐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천지창조의 주체가 ‘하나님(God, Elohim)’이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Lord God)’이기도 하며, ‘여호와(Lord, Jehovah, 야훼)’로 표기되기도 한다. 히브리 민족의 신이 다신교의 신 ‘엘로힘’에서 유일신 ‘여호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표기법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엘로힘이 복수명사라는 점을 들어 여호와가 여러 신들 중의 하나의 신임을 강조하기도 하나, 종교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창세기 저자가 모세일 수도, 에스라일 수도 있다는 점이 신앙을 저해할 수는 없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함께 먹은지라”라고 되어 있다.
김백문에 의하면, 인간은 최초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즉 여호와 하나님이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한 선악과(forbidden fruit, 금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인간은 원죄를 본겅적으로 타고나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기존 기독교 교리와 다름이 없다.
김백문은 선악과 사건에 대하여 뱀의 얼굴을 한 악령(또는 타락한 천사)과 하와가 육체적 음행을 하여 성적 타락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피를 물갈이하는 피가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피가름의 교리는 김성도, 정득은, 김백문으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문선명, 박태선, 정명석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한다.
기존의 정통 기독교 교리에서도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에서 뱀의 유혹이 성적 타락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를 육체적인 피가름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주술적이다. 이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귀신’이라는 한국적 기독교 교리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이쯤 해서 니체의 경구를 다시 소환해야 할 지점이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그대가 심연(Abyss)을 오랫동안 들여다볼수록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 볼지니……”
어떻게 하면 선한 생각과 선한 행함을 하면서도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기원전 1천 년부터 차라투스트라 이래 수많은 성인들이 고민해 온 명제이다. 이 문제에 직면하여, 원죄에 천착하고 피가름으로 해결하려는 해석은 샤마니즘적이다.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종교에 샤마니즘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이단의 출발점이다. 선악과를 성적 타락으로 보는 해석은 오리겐과 어거스틴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그들은 성적 타락을 또 다른 성적 타락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유신론과 무신론을 별개로 하고, 인간의 인지기능이 발달함에 따라 선과 악에 대한 고뇌가 생겨났으며 이것이 인간의 본능과 충돌하면서 삶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것과 선악과 사건은 이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모순에 대한 알레고리적 표현이라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본다. 성경의 특정 구절을 특정인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하면, 영지주의(Gnosticism), 오컬트(Occultism), 밀교(Esotericism)와 친하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