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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May 30. 2023

엄마는 즐겁고 딸은 그냥 전주 여행

엄마는 말씀하셨다.

"가장 어린 사람이 그 집안의 주인이다."

첫째와 둘째의 성별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많으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자아 분열을 하는 기분이다.


'홍길동전'의 처첩 제도를 설명하다가 '변기는 내 친구' 책을 읽는다. 이불에 몸을 말고 김밥이 되어 바닥을 구르다 대분수 더하기를 설명한다. 'Ive의 after like'에 맞추어 딸과 춤을 추다가, ' 멋쟁이 토마토'가 되어 몸을 흔든다. 몸은 둘째와 자동차 장난감 옆에 있는데, 눈은 딸이 학습지를 제대로 풀고 있는지 감시한다. 최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둘에게 공평하게 배분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나와 남편 모두 첫째로 자라서 첫째가 느낄 상실감을 미리 준비했다. 둘째를 임신한 후, 그리고 출산한 후 4개월 정도 심리센터에 다녔다. 첫째 아이의 성격과 특성을 알고, 그에 따라 엄마 아빠가 해야 하는 일들을 배웠다. 둘째를 시댁에 맡기고, 박물관에 가거나 2박 3일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늘 현명하신 김여사 님의 말씀 대로 더 어린 녀석에게 손길이 더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기질 자체가 예민한 둘째이기에 첫째는 혼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가끔 둘째만 밖에 나가면 첫째는 보드게임 세 개와 그림책을 들고 기다린다.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은 다양한 목소리가 재밌고, 엄마가 못하는 보드게임은 본인이 이겨서 재밌단다. (아가야, 엄마는..... 언제 쉴 수 있는 거지? )


방역 수칙도 풀렸고, 엄마에게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두 달에 한 번, 1년에 6번 엄마와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첫째는 멀미가 워낙 심해서 기차로 닿을 수 있는 곳, 목적지가 기차역과 가까운 곳으로 정하기로 했다. 처음 여행지는 전주. 이상하게 연이 잘 닿지 않아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던 곳.


인터넷을 검색하다 전주 토박이 가이드가 직접 진행하는 여행 상품을 찾아 신청하였다. 전주부성을 따라 원도심을 한 바퀴 도는 프로그램. 아침 일찍 기차를 탔다. 적어도 대 여섯 명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우리 둘 뿐이라고 하신다. 가이드님을 독점할 수 있지만, 중간에 살짝 주전부리를 사 먹으려고 했던 계획은 실행이 어렵겠다.  


전주에 가본 적이 없던 나는 원도심이라고 하여도 그 유명한 한옥마을을 거치는 경로일 것이라 추측했다. 전주부성의 옛 길을 따라 도는 코스라 하여 작은 수원 화성.. 정도를 상상했다. 하지만 본래의 성은 사라졌고, 전주시에서 부성 자리를 따라 만들어 놓은 흔적만 있었다. 한옥마을을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코스였다.

경기전에서 시작하여 전라감영까지 두 시간을 걸으며 전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호랑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을까? 어느 날은 털이 많은 호랑이였다가, 뚱뚱한 호랑이였다가, 어느 날은 날쌘 호랑이는 할머니 어렸을 적에는 앞 산 굴속에 살았단다. 매일, 매일 들어도 또 듣고 싶었다. 해외여행을 가도 멋진 풍경보다 그 안에서 만나는 바위나 샘물에 전해오는 전설이나 민담이 더 매력적이다. 그런 '나'를 설레게 하는 코스였다.


두 시간 동안 몇 백 년 동안의 전주 설화를 압축해 들었다. 조선 시대 이성계의 이야기부터 일제 강점기, 전주 성당, 70년대 영화인들, 한약재들을 팔았던 약령시거리, 비빔밥과 국밥, 혼불 최명희 이야기, 양귀자 작가의 서점, 민정당 당사, 치맥 아닌 가맥, 환경 문제까지 발 닿는 장소 하나하나에 숨겨진 아니 아직 잊히지 않은 전주의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설명하는 태도에서 전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셨지만 전주 알림이 가이드가 되셨고, 다양한 활동을 하신다고 한다. 크고 화려한 유명한 식당이 아닌 오래전부터 지역 사람들이 다니는 식당을 소개해 주신다.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의 모습은 늘 감동을 준다. 가이드님을 믿고 다음에는 온 가족가 함께 와야겠다.


더운 날씨에도 가이드님의 이야기와 지루함을 참아준 딸의 희생으로 엄마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최선을 다해 아저씨의 설명을 듣던 딸은, 80년대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언제 끝나요.'를 몇 번이나 묻는다.  딸의 표정을 보니 우리 둘 만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목표는 멀어진 것 같다.


한옥마을로 돌아와 탕후루와 과일 주스를 먹고, 부채, 풍경 작고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몇 개 사더니 전주가 마음에 든단다. '엄마만 즐거워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엄마랑 같이 와서 본인도 좋았다.'고 한다. 나를 세우더니 예쁘게 찍어준다며 카메라를 들고,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란다.


여행을 가서도 누군가 시키기 전에는 사진을 찍지 않고, 작은 기념품이나 굿즈는 결국 쓰레기통으로 보내는 나의 여행과 딸의 여행은 같은 공간에서도 참 다른 것을 누리고 있다.


"오늘 네가 이해 못 한 내용은 딱 5년만 흐르면 다 알게 될 거야. "


"그럼, 5년 뒤에 또 둘이 오자. "


한복을 입고, 재잘거리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 모습에서 5년 뒤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앞으로 5년, 나의 아이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그리고 나는 얼마나 변할까?  


그 시간 동안 우리만의 모녀 설화를 100개쯤 만들어 보자! 둘 모두를 만족시키는 여행 코스는 어렵겠다. 다음 여행은 딸은 즐겁고, 엄마는 그냥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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