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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Aug 10. 2023

소림사의 무술인처럼

매일의 소중함 

MBTI 성향, 극단의 NP형이던 나는 늘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일이 버겁다. 가장 싫어하는 일은, 반복되는 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참기가 힘들다. 학창 시절,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어도 영혼은 늘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던 적이 많다. 


  바람의 딸, 한비야 열풍이 불었었다. 세계를 여행 다니며 의미 있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 오프라 윈프리와 함께 멋진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내 위로 형제가 더 있었으면, 한비야처럼 평생 여행을 다니며 살았을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나를 현실에 붙잡아 놓은 것은 ‘엄마의 하루’이다. 

 

엄마의 하루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렸을 적 TV에서 본 소림사의 스님들이 떠오른다. 스님들은 새벽에 일어나 명상하고, 수련을 한다. 간단한 식사를 하고 수련하고, 집안일을 한다. 매일이 반복이다. 무술가이며 동시에 승려이기도 한 그들의 삶은 외부인의 눈에는 지루하다. 단조로운 일상은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다. 이 과정을 지나야만 깨달음에 다다른다.

 

김 여사의 삶도 꼭 그와 같다. 30년을, 본인 가게도 아니면서 새벽에 나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설날 당일과, 추석 당일만 유일하게 가게 문을 닫는다. 아침 8시가 안 되어 가게 문을 열고, 저녁까지 영업을 한다. 물건을 준비하고, 주문 전화를 받으신다. 가까운 곳은 택시를 불러 배달하기도 한다. 여전히 수기로 쓴 송장을 붙여 고객들에게 택배를 보낸다. 다행스럽게도,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니 인터넷 쇼핑이나 스마트 스토어는 꿈도 못 꾼다. 

  

친구들과의 여행도, 취미 생활도 없이 하루를 살아오셨다. 오로지 일과 자식들뿐. 스님도 아니면서 욕망을 끊어낸 사람처럼 살며, 반복되는 하루를 지겨워하지도 않으신다. 집에 돌아와서도 잠이 들 때까지 단 몇 분을 누워 계시질 않는다. 

 

 스님들은 매일 수행을 통해 득도를 하고, 운동선수는 매일 고된 훈련을 버텨 자신을 단련하고 성과를 낸다. 그 하루하루가 쌓여 각자의 세계를 이룬다. 엄마는 훌륭한 위인도 아니고, 큰돈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김 여사의 하루를 아는 그 누구도 엄마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서른 일곱, 남편과 사별하고, IMF 시기를 거쳤다. 부동산도, 주식도 재테크도 전혀 모르는 엄마는 식당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해, 검소하고 성실한 하루하루를 쌓아 두 자녀를 단 한 푼의 빚 없이, 대학을 졸업시키고, 각자 살 집을 얻어 주고, 결혼을 도왔다.


 우리 집안의 제일 게으름뱅이자 투덜이는 바로 나이다. 30년째 학교에 다니는 중이지만, 퇴근길에는 친구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학교 가기 싫다.’고 징징거린다.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청소를 미루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 아침에 먹은 설거지를 저녁으로 미루고, 여행에 다녀와서 짐을 내일 풀기도 한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엄마와 살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혼자 서울에서 1년 넘게 자취를 했다. 대학에서도 기숙사 생활을 했기에 홀로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홀로 있는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며칠 동안 미드를 보며 시간을 보내거나, 책 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 첫 권부터 완결까지 보기도 했다.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 흘러가는 여유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도 비례한다. 어떤 친구는 매일 12시간을 공부한다. 요약 공책을 몇 권이나 만들었다고 한다. 열 정거장 걸리는 노량진까지 가는 버스를 타다가 빈혈 때문에 중간에 내려와 돌아오던, 저질 체력. 하루 10시간이 넘는 공부 시간은, 어려운 목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매일을 계획했다. 하루 공부할 양을 과목별로 조금씩만 정했다. 점심 식사는 혼자 하지 않았다. 월-금까지만 공부하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공연을 보거나 전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공원을 가서 산책을 했다. 비누방울을 사기도 하고, 만화책을 빌려 보기도 하고 매일 지루함을 깨뜨릴 나를 위한 작은 이벤트를 열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숨통을 틔우기 위해 일주일에 이틀은 과외를 했다. 나답게 매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해에 교사가 되었다.


매일의 힘!  반복적인 작업들은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하고, 나를 천천히 어제보다는 현명하고, 조금 강한 사람으로 만든다.  


학생들을 매일 만나면서도 ‘매일의 힘’을 기억한다. 새 학기가 되면 1년간 맡을 학생들을 만난다. 매일 똑같은 아이들을 만나 같은 잔소리를 한다. 아이들이 눈치챌 수 없게, 같은 잔소리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가끔의 일탈은 괜찮지만, 일상의 체계를 잡아 놓아라. 게임을 정말 좋아한다면, 해야지. 단, 게임하는 하루 안에 독서, 운동을 조금씩 집어넣어라. 너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너의 매일이다. 우리가 매일 행동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것은 나무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는 매일 자라고 있다. 엄마, 아빠가 너를 못 믿는다 탓하지마. 너를 믿게 하고 싶으면 딱 하루의 변화, 그 하루 중에서도 단 몇 분의 변화로 시작하면 된다.’  

 

육아도 마찬가지이다. 엄마 노릇에서 나를 제일 고통스럽게 하는 집안 일이다. 어제도 하고 오늘도 했는데, 내일도 똑같이 해야하는 청소, 빨래, 밥하기. 하지만 안다. 나에게는 그냥 넘길 수 있는 밥 한 끼도 아이의 건강에는 큰 영향을 준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의 결말은 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과연 그녀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 

 

우스갯소리로 집안의 경제력 차이로 구박을 받았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느라 바쁜 남편 때문에 독박육아를 하고, 결국 불행해졌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그들 이야기의 결론은 행복한 결말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계모가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일곱 가족의 살림을 맡아하고, 왕자와의 댄스파티에 다녀와서도 허세에 빠지지도 반대로 좌절감에 허우적대지 않고, 집안일을 해내던 그녀들이다.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한 백설공주는 백성들을 생각하는 정책을 펼치고, 계모의 괴롭힘을 당한 신데렐라가 아동복지에 신경 쓰는 왕비가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문장에는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공주들은 하루의 소중함을 알고, 매일매일을 단단하게 살아 나갔을 것이다. 

 

나다운 매일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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