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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Aug 25. 2023

그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나의, 회복 탄력성


 정현종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은 1980년대 초에 나온 작품이다. 회복탄력성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한참 전이지만, 작가는 우리들이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 떨어져도 다시 튀어 오르는 공처럼’ 살기를 바랐나 보다.  


 중학교 3학년들에게 이 시를 가르치면서 ‘옳지, 최선의 꼴, 지금 네 모습을’ 부분을 강조한다. 

 

 ‘너희는 이미 최선의 꼴이야. 이미 튀어 오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공이야. 더 높이 올라가라는 말이 아니야. 저 멀리 다른 방향으로 향하라는 말도 아니야. 여기 있는 우리가, 최선의 꼴이야. 반짝이는 존재들이지! 샘을 보고, 한번 웃어봐.  우리 상황이나 때로는 우리들 마음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느낄 때,  선생님 눈앞에 있는 너희, 딱 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연습을 하자.’ 


아이들은 닭살스럽다며 그만하라고... 하지만. 


 회복하기 위해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것은 평소의 ‘나’이다. 학생들에게 평소의 상태를 잘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나’가 어떤 사람인지를 무시하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단순히 회복하려는 노력만 한다면, 그 결과는 성장이 아닌 위선이나 모순뿐이라고. 우리는 ‘나’의 영점을 제대로 맞출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다시 돌아온 후에 내가 가려는 방향에 맞게 성장할 수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회복탄력성의 끝판왕이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라는 글을 보고, 장금이의 행동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방영될 때에도 장금이의 태도를 보며 사람보다는 '로봇'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끝까지 자기다움을 유지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동료들과 서로를 격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한다. 


장금이를 보며, 나는 또 엄마를 떠올린다.  


김 여사에게 회복탄력성이 있다면, 공이 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을 벽에 박아버린 느낌이다. IMF가 터졌을 때,  갑자기 닥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뉴스가 연일 보도되었다. 갑자기 닥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았다.  



 “각자 사정이야 있겠지만, 옛날에는 배고파 나무껍질을 뜯어먹으면서도 살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목숨을 쉬이 끊는지 모르겠다.” 


 방바닥을 닦던 엄마가, 툭하고 던진다. 라떼의 기준이 다르다. 


탈북한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가족과 헤엄을 쳐 강을 건너온 친구였다. 백일장이 열리면, 늘 수상했다. 아프지만 생생한 경험과 깊은 통찰력이 담긴 글이었다. 수업 태도도 늘 한결같았고,  성적도 좋았다. 당시에는 매일 10시까지 야자를 했었다. 감독을 하는 나도 지치는데, 본인은 10시까지 하는 야자도, 공부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고 했다. 또래 친구들과 압박감을 느끼는 정도와 압박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 대단하다 여겼으나,  한 편으로는 속상하기도 했다. 


 전쟁이나 이민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탄력성에 대한 연구를 보면 특정한 스트레스 요인에 대해 더 높은 탄력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회복하고 성장시키는 능력을 키운다. 


 전쟁 직후의 베이비붐 세대. 10남매 중 일곱 번째 딸, 90년대 초반까지 엄마의 친정집은 나무로 불을 때는 부뚜막이었다. 10형제 중 오빠 하나는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놀다 개울에 빠져, 엄마 바로 위의 이모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파서 돌아가셨다. 엄마와 스무 살 차이가 나는 큰 이모는 몇 번 뵌 적도 없다. 할머니의 허리는 항상 굽어 있었는데, 엄마가 어렸을 때, 한겨울 언 땅을 걷다 넘어졌지만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했다 하신다.


 엄마는 중학교 때 영어를 곧잘 했지만, 딸이기에 중학교까지만 졸업할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서울에 있는 공장에서 몇 년간 일을 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으시다. 힘들었지만, 그때는 다 그랬다고. 엄마가 겪은 그 시련들이 엄마를 그렇게 강인하게 만들었을까? 


 엄마는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바위와 같은 사람이다. 고등학교 2학년, ‘문학’ 교과서에서 유치환의 ‘바위’를 만났을 때, 운명의 시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이 원태연이나 류시화, 윤동주의 시를 좋아할 때, ‘바위’를 필사하며 되뇌었다.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엄마가 살아온 삶을 닮고 싶지는 않지만,  늘 단단한 엄마의 태도는  닮고 싶었다.



  동생까지 취업을 한 후에야 엄마에게 드디어 정신적,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우리 셋이, 처음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엄마에게는 첫 제주도 여행이었다. 다음 해에는 엄마를 모시고 해외로 가자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해에, 27살이던 동생이 위암 판정을 받았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위 절제 수술을 했다. 동생은 늘 참는 아이였다. 7살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늘 바쁜 엄마와 독불장군 같은 언니와 함께 지내며 많이도 참았을 것이다. 동생이 중3 때, 서울로 대학을 갔고, 10년을 함께 지내지 못했다. 통화는 자주 했지만, 먼 지역에서 각자 자신만의 생활을 했다. 한동안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제는 믿지 않는 신에게 기도를 하고, 아빠를 원망하기도 했다. 많이 울었다.


동생이 입원해 있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엄마에게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느꼈다. 동생이 괜찮을 거라고 굳게 믿으셨다. 나빠진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하듯이, 처음부터 주어진 일인 것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하나씩 해결하는 데에 집중했다.  입 퇴원을 처리하고, 수술 날짜를 잡고, 보험증권을 다 뒤져 이용할 수 있는 보험을 찾고, 은행에 가서 적금을 갰다. 동생 옆에서 간병을 하고, 본인이 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서울에 사는 친척 언니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프긴 아픈가 보다. 생전 짜증 한 번 낸 적 없는 것이, 아프다고 울더라.”


 본인은 단 한 번 슬픔조차 내색하지 않으면서  동생의 통증에는 예민하다. 수술이 끝난 후 동생을 시골집에 데리고 오셨다. 매일 걷기 운동을 시키고, 삼시 세끼 밥을 해 먹이셨다. 위암 환자에게 좋은 음식과 관련된 책을 구입해 읽으셨다. 전국에 있는 유기농 재료를 직접 전화해서 대량으로 구입하고, 음식 조리법을 바꾸신다. 전국에 그렇게 많은 농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집에 가면 어느 날은 흑마늘이 방바닥에 널려 있다.  어느 날은 새로운 조미료로 방 하나가 가득 찬다. 그 일을 해내는 엄마에게서 생기마저 느껴졌다. 


백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것 같은데 지친 기색이 없으셨다. 동생조차 그 긴 시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못했다. 동생은 5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고, 엄마가 되었다.


 마음 근육이 있다면, 엄마의 마음 근육을 얼마나 단단한 걸까? 나는 감히 저런 존재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사람마다 마음의 끈을 놓치게 만드는 부분이 다르다. 특별히 감정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다. 누군가는 직장 일, 누군가에게는 사랑, 과거의 부모의 태도, 누군가에게는 친구, 자녀, 아니면 나만 기분 나쁜 말투나 손짓.   매일 200명이 넘는 학생들을 만난다. 여중, 남중, 남고를 거치며, 때로는 아니 꽤 자주 정제되지 않는 말을 내뱉는 거친 아이들을 만나 씨름하면서도, 잘 지치지 않았다. 


나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아이에게서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을 직면하게 될 때, 아이는 잘못한 게 없는데 그냥 내가 피곤해서 화가 날 때, 나의 못난 모습 만나면, 큰 죄책감과 괴로움이 찾아온다. 도망치고 싶다. 억만금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때, 나는 주문처럼 되뇐다. 



‘나는 김 여사의 딸이다. 정신을 차리자.’  


그리고 방법을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지키는 방식.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은 엄마에게 익힌 ’ 사랑에 대한 책임감‘이다. 책임감은 굳은 살과 같아서, 하루 아침에 얻어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임 있는 삶을 살겠다 다짐하고, 매일을 살다보면 어느새 조금 더 어른이 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는 그 노력들이, 큰 힘이 되어 나에게 돌어온다. 


늘 우리에게만 엄마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엄마에게도 우리가 있었다.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결국 서로였다.  


서로에게 우리는 '회복탄력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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