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담배갑 속지를 모아 만든 백합꽃. 일본어로 적힌 바랜 일기장.
지금, 나는 종이를 꼬고 있다.
지승을 만들기 위해 감아올리는 이 손끝의 움직임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나는 기억을 엮는다.
한 올, 또 한 올.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
혹은 아주 오랜 그리움을 다시 만지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여름, 스물셋의 나.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모였고, 나는 그 며칠을 할아버지 집에서 머물렀다.
집은 조용했다.
그 조용함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였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꺼내고, 옷가지를 정리해 마당에서 태웠다.
불꽃은 높지 않았지만, 거기엔 무언가 무겁고 깊은 감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불길을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는 게 싫었다.
남은 흔적들까지 모조리 없애버리는 듯해서.
나는 집 안 구석을 헤매다 오래전 닫혀 있던 방문을 밀었다.
거긴 할아버지의 책방이었다.
더는 쓰지 않게 된 공간.
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던 기억들.
먼지 냄새와 한지 냄새, 말라붙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마치 할아버지가 여전히 그 안에 앉아 계신 것 같았다.
책상 위에 종이 백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구겨진 담배각 속지를 모아 정성껏 접어 만든 꽃.
잎 끝이 살짝 말려 있었고, 중앙은 누렇게 바래 있었지만
그 꽃은 여전히 피어 있었다.
그 옆엔 낡은 일기장이 있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빼곡히 적힌 글씨는 일본어였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필체는 이상하게 정겹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다 한 장의 한지를 발견했다.
접힌 채 숨겨져 있었고, 손때가 누렇게 스며 있었다.
한지를 펼치자, 그 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눈으로는 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손이 대신 짓는다.”
나는 오래도록 그 문장을 들여다봤다.
이건, 손으로 짓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편수였던 할아버지가
절의 기둥을 깎고, 들보를 짜고, 처마의 곡선을 맞추며
말 없이 이뤄낸 수많은 작업의 흔적들.
그리고 그 손끝의 결이
어쩌면 내게도 스며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방 안에서
백합꽃을 손에 쥐고, 일기장을 가슴에 안고
한지 위의 문장을 다시 접어 넣었다.
어디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건 내 유산이었다.
내가 할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조용한 약속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종이를 만질 때마다
할아버지의 손을 떠올린다.
무딘 망치를 들던 손이, 백합을 접을 줄 알았다는 사실이
참 오래도록 내 마음을 붙잡고 있다.
지금, 나는 공방에서 한지를 자르고
물을 적셔 두드리며 줌치를 만든다.
또 어떤 날은 종이를 꼬아 지승을 감는다.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이 길을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무 대신 종이로, 절 대신 공예로
그러나 여전히 한 올 한 올 이어붙이는 일.
가끔 외롭다.
하지만 외로움마저도 손으로 짓고 나면,
무언가 작고 따뜻한 형태가 된다.
나는 그것을 작품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그것을 위로라고 말해준다.
시간은 종이처럼 접히고, 또 펼쳐진다.
바랜 백합꽃도, 일본어 일기장도, 반짇고리 속 실패들도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오늘도 한지 위에 나를 붙이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