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짇고리로 남은 상자, 전통함으로 이어지는 기억
겨울 공방의 냄새는 유난히 뚜렷하다.
마른 풀 냄새 같은 한지,
풀칠할 때 스며 나오는 전분의 온기,
자르고 접고 배접할 때 생기는 종이의 숨결.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건 전통함이다.
한지를 겹겹이 배접해 형태를 잡고,
고운 보자기로 감싸듯 마감한다.
나무는 쓰지 않지만,
상자를 만든다는 이 행위만큼은
어릴 적 기억과 닿아 있다.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
오빠는 6학년, 나는 5학년이었다.
우리는 할아버지 댁에서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도편수, 절 짓는 목수셨다.
그날도 아침 일찍 산에 나무하러 가셨고
우리는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공방에 가볼까?”
오빠는 늘 먼저 말하고 먼저 움직였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방 문을 열자, 냉기가 훅 들이쳤다.
그 속엔 얇게 잘라 놓은 나무 판자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하던 걸 흉내 내보기로 했다.
못을 쓰지 않고, 끼워 맞추는 방식.
오빠는 톱을 들고, 나는 끌을 들었다.
대패질은 생각보다 어렵고 무거웠다.
톱밥 냄새가 퍼지고,
서툰 손끝이 나무의 결을 따라 움직이던 순간.
오빠가 갑자기 손을 움켜쥐었다.
“아, 씨…”
그 순간, 나는 피를 보았다.
엄지손가락에서 뼈가 드러날 만큼 깊게 베인 상처.
오빠는 울지 않았다.
울음보다 더 빠르게 말했다.
“야… 우리… 할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말자…”
그 순간, 피보다 무서웠던 건
허락 없이 연장을 썼다는 죄책감이었다.
결국 우리는 병원에 갔다.
오빠는 열두 바늘 넘게 꿰맸고,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며칠 후, 우리가 만든 그 상자를
할아버지가 조용히 손질해주셨다.
사포로 다듬고, 홈을 정리하고, 옻칠까지 해주셨다.
“못 안 쓰고 만든 건, 잘한 일이야.
이음선은 사람 마음 맞추는 거랑 비슷한 기라.”
그 상자는 지금도 엄마 댁에 있다.
실과 바늘, 단추와 골무가 담긴 반짇고리 상자로.
아직도 닫으면 딸깍 소리가 나고,
열면 은은한 나무 냄새가 퍼진다.
나는 그 상자처럼
딱딱한 나무 대신 부드러운 종이로
겹을 만들고, 형태를 세우는 전통함을 만든다.
겹겹의 종이 안에
기억도, 이야기들도,
그리고 아주 오래전 나의 첫 상자도 함께 스며든다.
누군가에겐 작은 종이상자일지 모르지만
내겐 시간과 감정이 접힌
하나의 세계다.
그 겨울, 손끝에 남은 따뜻한 피와 무서운 떨림,
그리고 말없이 옻칠해주던 할아버지의 손길.
지금의 나를 만든 조각들이다.
나는 오늘도 상자를 만든다.
나무가 아닌 종이로,
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인 채.
기억을 감싸고,
감정을 접어 넣고,
함께 닫아두는 일.
이것이 내가 매일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