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위에 피어난 회복
낯선 나라의 겨울은 유난히 조용했다.
창밖엔 눈이 오지 않았지만, 내 안은 매일처럼 얼어붙었다.
서른넷의 나이에
먼 타국에서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그 누구의 손도 없이 산후의 시간을 버텨야 했다.
갓난아이 하나,
두 살짜리 첫째 하나.
밤낮이 따로 없었다.
젖은 기저귀, 울음소리, 갑자기 열이 나는 아이,
그리고 멍해진 내 정신.
엄마는 곁에 없었다.
친정도, 친구도, 위로도 닿지 않았다.
그렇게 출산 후 몇 개월,
나는 점점 투명해져 갔다.
몸도, 마음도, 말도.
그러다 어느 날,
딸아이가 두 돌이 되던 해,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보냈고
같은 반 학부모 중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한지공예 해보셨어요?”
그 말이 내 삶의 결을 바꿨다.
처음엔 ‘과반’이었다.
작고 둥근 한지 조각을 겹겹이 붙이고, 다듬고,
모양을 잡아내는 그 작업.
처음엔 그저 아이들 낮잠 시간에 짬을 내는 정도였지만
어느새 나는
그 작업 속에서 호흡하고 있었다.
울음도, 외로움도, 한숨도
한지의 풀처럼 묽게 섞여
내 손끝으로 흘러들었다.
그 분은 어떤 공방 선생님도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엄마였고,
유명한 한지 공예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처음으로 ‘가능성’을 믿어준 사람이었다.
“이런 감각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 손끝이 살아 있어요.”
“진짜 작가 느낌 나요.”
지금 돌아보면
조금은 오바스럽고
어쩌면 약간의 ‘립서비스’도 섞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말들은
그 시절의 내게는 생명의 숨결 같았다.
나는 2년간 그분께 개인 사사를 받았다.
과반 만들기로 시작해,
합지를 재단하고 골격을 만들고, 문양을 파고, 한지를 정성스레 붙이는 작업까지.
공예의 공정 하나하나가
손끝에서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과정은 점점 어려워졌지만,
그만큼 나는 더 깊이 빠져들었다.
나중엔
그분보다도 더 섬세하게, 더 단단하게, 더 아름답게
작품을 만들어내게 되었지만
나는 그분을 ‘스승’이라 부르며
지금까지도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실력이 아니라 나의 ‘가능성’을 먼저 보아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기억 하나로
정말 멀리까지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분처럼
공예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누군가의 손을 바라보며
‘실력’보다는
‘진심’과 ‘과정’과 ‘의지’를 먼저 보려 한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서툴러도 괜찮다고,
지금 하고 있는 이 반복이 결국
무언가를 바꿔낼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 한 명만 있으면
사람은 다시 살아난다.
나처럼.
나는 이제야 안다.
마음을 붙이는 일은, 손으로도 가능하다는 걸.
그건 위로이고, 희망이고, 공예다.
한지를 붙이듯,
조각난 내 마음도 그렇게 다시 붙여가며
나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의 조용한 회복을 응원하며
한지를 꺼내 들고
풀을 바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