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일이다. 며칠이나 안 보이던 친구가 어딘가 달라진 얼굴로 나타났다. 핼쑥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어른스러워 보였다. 심한 몸살로 학교에 못 왔다고 했다. 이유를 듣던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미안>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받은 다독상이 여럿이었다. 곧바로 그 문제의 책을 구해서 호기롭게 읽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좋았다.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말 때문에 불량한 친구에게 돈을 빼앗기는 도입부와 해결사처럼 등장한 데미안은 멋있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책장을 넘기던 손이 느려지더니, 창 밖을 내다보며 다른 공상에 빠지기 일쑤였다. 자연스럽게 데미안과 멀어졌다. 친구에게 뭐가 그렇게 충격이었냐고 다시 물어봤다.
"뭐. 그냥..." 얼버무리는 친구의 입술이 단단해 보였다. 또래에 비해 성숙했던 친구였다. 말괄량이 같던 나와는 결이 달랐었다.
고등학생 때 또 한 번 도전했다. 이제 머리가 좀 굵었으니 그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한 도서관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눈에 힘을 주며 읽었다. 책이 자꾸 도망갔다. 아니 내가 또 포기했다. 나는 별로 자란 것 같지 않았다. 이유를 끝까지 물어볼걸. 친구와는 연락이 끊겨 버렸다.
그렇게 흐지부지 잊혔던 궁금증이 다시 나타났다. 직장 생활에 허덕이다 서점으로 도망친 날이었다. 더 힘내서 일하라는 실용서나 자기 계발서 말고, 팍팍한 삶에 다른 질문을 던져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주말 서점은 북새통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답을 찾으려 눈을 빛내며 바삐 책을 훑고 있었다. 그 한 귀퉁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내 눈길이 멈췄다. <데미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새 표지를 입고 환하게 손짓했다. 책을 사들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잔잔한 재즈 선율을 깔았다. 도망가더라도 이번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싱클레어의 성장이 마치 내 얘기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무기력한 마음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해서 인터넷을 떠돌다 익숙한 뜻의 영어 문장을 마주쳤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자주 봤기에 별생각 없이 또 지나치려 했다. 'fight its way out' 그 문장이 나를 멈춰 세웠다. 때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부화하는 'hatch'가 아니었다. 기다림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몸부림치는 싸움이었다.
이 알을 깨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글을 써본다. 타닥타닥 키보드가 알을 깨려 소리를 낸다. 살짝 금이 났나. 잠시 손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여전히 친구에게 묻고 싶다. 몸살까지 난 이유가 정확히 뭐였냐고. 지금의 나는,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