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은색연필

은필(은색연필)

by 은색연필

"은색이어야만 해."


남편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제발 이제 그만!"


그럴 만도 했다. 며칠째 필명을 짓겠다며 그를 괴롭혔다.


내 눈에 예쁜 이름은 이미 누군가의 것이었다. 흔하지 않으면서도 내 것 같은, 나를 나답게 부를 이름 하나가 간절했다.


그동안은 내 이름에서 두 글자를 따서 필명처럼 썼다. 그런데 브런치에 글을 몇 편 올리고 나니, 숨어있던 진지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럴듯한 필명도 갖고 싶어졌다.


고민은 끝이 없었다. 처음엔 남편도 열심히 아이디어를 줬다. 얼굴만 마주치면 "이건 어때?"라고 묻고 또 묻다 보니, 어느새 그는 처진 입꼬리로 "그것도 좋네..."만 반복하는 자동응답기가 돼버렸다.


이름들 사이를 떠돌다 어제 아침, 브런치에 한 이름을 올렸다. '에라, 모르겠다. 이제 그만하련다'는 항복이었다. 남편 표정이 밝아졌다. 해방된 얼굴이다.


그런데 반나절도 안 돼서 나는 다시 흔들렸다. 동생들의 '별로'라는 한마디에 바로 무너졌다. 괜찮다고 우기면서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이름을 짓는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된장찌개를 먹으면서도 여전히 은색 전쟁 중이었다. 그러다 젓가락을 내려놓는 순간,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은색연필',

줄여서 '은필!'


'은색'은 묘한 색이다. 흰 종이 위에서도 까만 종이 위에서도, 어떤 배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제 빛깔을 낸다. 회색처럼 무표정하지도, 금색처럼 과시하지도 않는다.


은색이 들어간 온갖 물건을 떠올린 끝에 연필에 걸렸다. 닳으면서 문장은 깊어지고, 지울 수도 있다.


이름을 정하고 얼마 안 돼서, 막냇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아직도 그러고 있냐. 지독하다."


투덜대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보던 드라마까지 멈추고 들어주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언니, 브런치 글 읽어봤는데 잘 썼더라. 책 좋아하는 지인이 읽고도 괜찮대."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그래, 이제 너도 작가다'라고 도장을 꾹 찍어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 나는 '은색연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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