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한쪽

by 은색연필

아삭, 빨간 사과 한쪽을 입에 넣으며 TV를 켰다. <러브 어페어>의 끝부분이 방영 중이었다.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떠났다. 소파에 앉아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여주인공 눈빛이 흔들린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조바심과 다시는 남자를 볼 수 없을 거란 두려움이 뒤엉킨 미소는 연약하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흉측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어땠나. 그의 등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날아와 박혔다. 저것이 정말 오빠라면 알아서 사라졌을 거란 말을 사랑스럽던 여동생이 뱉었다.


등에 박힌 사과를 빼지 못하고 죽어간 그레고르의 방엔 아무도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은 책과 달랐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여느 연인들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휠체어가 여자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았지만, 남자를 보며 웃는 다정한 입꼬리는 잡지 못했다.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얽혔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사라지는 것, 사랑받던 사람이 짐이 되는 것,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인 것.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재 문을 열었다. 남편이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실실 웃고 있다. 흰머리가 돋아나고 주름이 생긴 이마를 바라본다. 저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나는 그레고르의 가족일까? 영화 속 남주인공일까? 남편은 어떨까?


"왜?" 남편이 입모양으로 말한다.


괜히 들고 있던 사과 한쪽을 남편 입에 밀어 넣고, 거실로 다시 나온다. 한 입 베어 문 사과에서 상큼하면서 씁쓸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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