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항복

by 은색연필

아버지는 요즘 다리가 아프다. 여든둘. 그 긴 세월이 관절에 층층이 쌓였다.


“으응, 괜찮다.”

아버지는 습관처럼 말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른다. 나만 간직한 어느 밤의 장면이 있음을.


초등학생 무렵, 웬일인지 한밤중에 눈을 뜬 나는 낯선 뒷모습과 마주했다. 벽을 향해 돌아앉은 아버지의 어깨가 울음을 참느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족들을 깨우지 않으려 숨죽인 통곡이 어린 내 귓가에 쐐기처럼 박혔다.


불과 몇 시간 전, 쉬지 않고 조잘대던 자식들을 보며 웃던 아버지였다. 그 어깨가 어둠 속에서 흐느끼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 밤, 얼굴을 이불에 묻은 채 생각했다. 아버지가 말하는 ‘괜찮다’는 말과 ‘괜찮지 않다’는 말은 어쩌면 서글픈 동의어일지도 모른다고.


얼마 전, 한라산에 올랐다. 우리 부부의 산행 결심에 마음이 동하셨는지, 뜻밖에도 아버지가 신발을 신으셨다. 한참을 주저하시다 천천히 신발 끈을 묶으시는 모습을 보며, 어쩐지 말리기가 어려웠다. 산 입구에서 공기나 마시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수십 년 만에 산을 찾는 터라, 사실 나도 자신이 없었다.


“이 산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 것 같네.”


주위를 둘러보시던 아버지는 웃으셨다. 행여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발걸음마다 힘을 주셨다. 한라산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위로 올라갈수록 매서운 바람에 코끝이 붉어졌고, 구름이 발밑으로 몰려들었다.


아버지의 숨소리는 짧게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숨을 고르느라 몇 번이나 멈췄지만, 끝내 윗세오름에 닿았다. 우리가 마지막이었다. 김밥을 집는 아버지의 젓가락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아버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 풍광을 단 한 점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아버지는 바람에 섞인 차가운 흙 내음과 조릿대 냄새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 순간만큼은 다리의 통증도, 여든둘의 무게도 잠시 잊으신 듯 보였다.


하지만 산을 내려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다리가 쉴 새 없이 후들거렸다. 아버지의 무릎은 오죽했을까. 평지에 발을 내딛고 나서야 아버지는 긴장을 풀고, 참았던 안도의 숨을 쏟아내셨다.


“휴, 이제 다시는 산에 못 오르겠다.”


그 말이 내 마음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한 시대를 꿋꿋하게 버텨온 한 남자가 뱉은, 정직한 항복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일주일 내내 다리를 절었다. 무릎이 욱신거려 계단 오르기가 힘들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으응, 괜찮다."


그 단단하고도 서글픈 거짓말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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