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어린 시절,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아빠가 좋아.'
아빠는 종알대는 내 수다를 몇 시간이고 웃으며 들어주는 다정한 친구 같았으니까.
반면 엄마는 늘 분주했다. 속닥속닥 잠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녀를 향해 "잠 좀 자자!"라며 훼방을 놓곤 했다.
새벽마다 일어나 사 남매 도시락을 챙기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 수행인지, 그땐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점심시간, 뚜껑을 열면 온통 초록색 나물밭인 도시락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친구의 분홍 소시지가 부러웠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장면들이 눈에 밟힌다.
해가 뜨기도 전, 엄마의 도마가 '탁, 탁' 소리를 냈다. 밥솥 뚜껑 닫는 소리.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가!" 고함치던 목소리.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엄마는 한쪽 손목을 다른 손으로 꾹꾹 주물렀다.
막내딸로 자란 엄마가, 팔 남매 맏며느리가 되어 감당해야 했을 무게를 커서야 알았다. 가게 문을 닫고, 늦은 저녁밥을 겨우 먹던 엄마가 떠오른다.
그런데도 참 이상하다. 그 고단한 세월을 건너온 엄마는,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생생하다. 걱정 많은 아빠가 잔소리를 할 때면 얼굴이 뾰로통해지며 소녀처럼 토라지다가도, 금세 돌아서서 웃는다.
최근엔 '교통할머니'가 되어 매일 아침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로 나섰다. 삼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는 열정에 내심 놀랐다. 한겨울 새벽바람을 맞으며 깃발을 딱 치켜드는 엄마 모습을 상상해 본다. 추위를 몹시 타는데도 엄마는 아이들과 인사하는 게 그렇게 좋단다.
복지관 댄스 교실도 열심히 나간다. 어느 날, 노래방에서 아빠 손을 붙들고 그간 연마한 실력을 보여주는데,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래에 맞춰 스텝을 밟는 두 분의 발이 어색하면서도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웃기면서 눈물 났다.
잊을만하면 현관 앞에 거대한 스티로폼 박스가 도착한다. 엄마다. 숨구멍 하나 없이 테이프로 칭칭 감아놓은 박스를 뜯으면 흙냄새가 난다. 엄마가 밭에서 막 따서 보낸 호박, 가지, 고추, 그리고 겨울엔 귤. 숨 쉴 틈도 없이 꽉꽉 들어차 있다.
하나같이 못생겼다. 마트 진열대에서 매끈하게 포장된 예쁜 상품들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울퉁불퉁하고 제멋대로 자란 투박한 농산물들. 거친 껍질.
'이렇게 많이 보내면 어쩐담.' 투덜대며 정리하다가 묵직한 호박의 무게를 느낀다.
"엄마, 이번에 보내준 호박으로 나물 무쳤어. 달더라."
수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
"그래? 다행이다. 또 보내주까?"
"아아니~ 아직 한참 남았어. 냉장고 터져."
엄마가 웃는다.
전화를 끊고, 선반 위에 놓인 못생긴 호박을 쳐다본다. 호박이 나를 보고 묻는 것 같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매끈하고 예쁜 상품보다, 못생긴 이 호박의 단맛을 알아버려서. 내일은 남은 호박을 몽땅 썰어 넣고 된장찌개나 끓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