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으로 허기를 채우다

by 은색연필

"미니멀리스트가 될 거야."

줄 맞춰 정리된 하얀 셔츠, 베이지색 수납 박스. 영상 속 공간에 마음을 빼앗겨 말한다.


가족들 눈초리에 의심이 가득하다. 뭐든 장비부터 사들이는 내 성격을 잘 아는 탓이다. 대가족이 자주 오는 집답게 그릇이며 이불이 가득하고, 차마 버리지 못하는 책들이 빽빽하다. 이삿날이면 어김없이 물건을 정리하는 센터직원의 한숨을 들을 수 있다.


드라마 <폭삭 속았어요>에서 값싼 신발들로 빼곡한 신발장을 보았다. 낭비고 허영이라며 혀를 차는 엄마를, 딸이 가시 돋친 말로 찌른다.


"그 허영이 다 허기래. 없이 커서 그런가 봐. 그냥 계속 뭘 사고 싶어."


한때 나도 그랬다. 학창 시절, 소풍날엔 친구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딸들의 옷이나 신발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배불리만 먹이면 되는 줄 알았다. 아무거나 대충 걸쳤다. 아빠의 헐렁한 점퍼, 남동생의 투박한 외투마저. 꾸미는 데 관심 없는 척, 그게 나를 지키는 방패였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 내 지갑은 아낌없이 열렸다. 퇴근길에 예쁜 옷이나 신발이 보이면 별 고민 없이 카드를 꺼냈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은 더 심했다. 양손에 무겁게 쇼핑백을 걸치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옷장을 열어보면 아직 입지 않은 새 옷이 애처롭게 걸려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지갑은 더 두둑해졌는데, 갖고 싶은 마음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철마다 신상으로 갈아입은 마네킹의 손짓에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걸 몸이 먼저 알아버렸다.


요즘의 허기는 자판 위에서 찾아온다. 허겁지겁 배고픈 사람처럼 문장을 쏟아놓고는, 애써 써놓은 문장들을 지우고 또 지운다. 이 글도 다 쓰고 나서 네 문장이 세 문장이 되고, 세 문장이 두 문장으로 줄었다. 빼고 나니 오히려 남은 문장이 더 선명해졌다. 비울수록 오히려 배가 부르다.


삭제하기 아까운 문장을 지울까 말까 자판 위를 서성이던 손가락이 결국은 탁! 소리를 낸다. 허기가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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