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쌓는 소리, 타닥타닥

by 은색연필

봄이 오나 했는데, 추위가 매섭게 옷깃을 파고든다. 바람에 볼이 따끔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온기가 훅 달려든다. 안경에 김이 서려 시야가 흐릿하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삼키자마자 키보드 앞에 앉는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골목에서 놀다가 "밥 먹어!" 하던 엄마 목소리가 들리면 그렇게 속상했다. 밤새도록 놀고 싶었다. 뭐든지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어른들은 그걸 '고집'이라 불렀다.


영어 강사라는 직업은 그런 성향을 부추겼다. 영어 뉴스를 틀어 놓고 잠들었다. 눈뜨자마자 어제 외운 단어를 까먹지 않았나 확인했다. 발음이 입에 붙을 때까지 돌려 듣느라 카세트테이프가 점점 늘어졌다. 그런데도 애쓰는 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점수는 올랐는데 구멍은 또렷해졌다.


열심히 읽고 들어서 아는 것은 많아졌는데 혀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는 표현인데 하면서 머릿속에서만 맴돌다 사라지기 일쑤였다. '꿍꿍이'가 영어로 뭐였더라. 학생이 불쑥 던진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 날엔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멍한 눈으로 단어장을 바라봤다.


<성>에 나오는 주인공 K가 성문 주변을 맴돌 듯, 나도 말이 술술 나오지 않는 영어 앞에서 헤맸다. 가까워지는 듯하면 길은 굽었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마음만 닳았다. 그래도 문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쌓이자 어느 날 문득 그 자리가 익숙해졌다. 닿지 못해도 괜찮은 날이 왔다. 안경에 서린 김이 서서히 걷히듯, 그렇게 천천히.


이제 내게 또 다른 성이 생겼다. 글쓰기다. 이번에는 문이 없다. 그저 타닥타닥 문장을 쌓아 올린다. 어제보다 조금 나은 문장을 쓰기 위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이제 그만 쓰고 밥 먹자는 남편 목소리가 방문을 넘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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