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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Jan 13. 2019

휘게와 라곰의 조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시간들

일이 많아 일과 가족 사이의 균형이 깨질 때면 휘게와 라곰을 생각한다.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시작돼 전 세계적으로 행복의 비밀처럼 숭앙되는 삶의 자세. 핵심은 '소소한 행복'인데 그 소소함을 누리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몇 해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휘게와 라곰의 본질을 이해할 기회가 있었다. 리빙 트렌드 세미나강연자가 덴마크와 스웨덴의 라이프스타일 전문가들이었다. 한 분은 덴마크가 자랑하는 가구 브랜드 프리츠 한센 야콥 홀름 대표였 또 한 분은 이케아 코리아 총괄 인테리어 매니저 얀톤 혹크비스트였다.


프리츠 한센 대표의 강의는 예상보다 좋았다.

언론에 덴마크 국민의 높은 행복 지수가 거론 될 때마다 부러움 반, 호기심 반으로 저 국민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궁금했다. 그때마다 공식처럼 떠오른 것이 내일 당장 실업자가 돼도 먹고 살 걱정 없는 사회복지망, 낮은 범죄율, 높은 국민 의식 수준, 사회구성원들간의 건강한 유대감 같은 것이었다.


야콥 홀름 대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덴마크는 예전부터 아주 작은 나라였고, 약한 나라이다보니 돈 자랑, 자식 자랑 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스러워했다.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 다 알게 되니 자랑이나 일삼는 속물적 인간이라 소문이 나는 걸 두려워했다. 사회적 평판에 신경을 쓴 것으로 사람들한테 몰매맞기 전에 조심하자, 하는 의식이 있었단다. 그 과정에서 소박하고 내실있게,

집 밖을 굴러다니는 자동차보다는 집안의 조명과 가구에 더 신경을 쓰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것 같다고. 신기했. 성숙한 의식의 뿌리가 작고 약한 나라에서 기원했다는게.

때로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마을 단위가 작을수록 더 폭력적이고 과시적이 되는 개인과 사회도 지않나. 같은 조건이지만 판이하게 다른 습성과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일까?


덴마크 사람들의 인생 철학인 휘게를 설명하던 대목도 기억에 남는다. 휘게란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소박하고 행복한 순간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야콥 홀름 대표는 남녀 한 쌍이 벽난로 앞에 앉아 발을 쭉 펴고 옆에는 커피를 놔 둔 사진 한 장을 띄우더니 그들의 발가락을 포인터로 가리키며 "집에서 직접 짠 양말, 이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스웨덴 이케아 대표는 그들의 삶의 철학인 라곰Lagom에 관해 들려주었다. 라곰은 이를테면 딱 좋은 순간 같은 거다. 영어로 하면 Not too much, Not too little.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 동양철학의 중용을 떠올리게 하는, 그 어려운 자족의 미학이 한 국민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인생관이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비결이 뭘까 궁금해하다 스스로 억지스러운 추론을 펼치기도 했다. 예전 스웨덴이 이웃 나라를 100년 넘게 지배할 만큼 엄청난 강대국이어서 저런 철학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아닐까?명품을 원 없이 사 본 이들이 종국엔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좀 더  편안하고 간결한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갖게 되는 것처럼 다 가져본 후에 삶의 핵심이나 본질에 눈을 뜨게 된 건 아닐까.  


강의가 끝나고 누군가가 스웨덴 사람들은 라곰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느냐 물었다.

금발의 얀톤 혹크비스트가 화답했다.

"스웨덴 사람들은 아시간을 중요시 .  같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 것 말입니다. 학교 가기 전, 직장 가기 전 다 같이 모여 뉴스고, 일정도 공유지요. 날씨가 좋을 때에는 집 근처 공원으로 피크닉을 가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원에서는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 한 거의 모든 곳에서 돗자리를 펴고 누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가 있는데 금요일 저녁입니다. 금요일 저녁엔 많은 가정에서 요리를 하지 않고 피자 같은 인스턴트 음식을 시켜 먹어요. 다 같이 둘러앉아 피자에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합니다.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대신 다같이 어울리는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거지요."


그날 저녁, 집에 와 아내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며

"앞으로 금요일엔 요리하지 않기!"라선포다. 아내는 물좋아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라고 말하는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런 일상의 약속을 두세 개 갖는 것이 휘게와  라곰의 비결 같았다. 이를테면 벚꽃 피는 4월에는 가능한 한 섬진강쪽으로 여행을 가고, 일요일 아침에는 다 같이 모여 앉아 책을 보는 것 같은.


그런데 이런 삶을 살려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가급적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삶이 이어져야 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이런저런 일로 피곤하다보니 나도, 혼자 육아를 떠맡은 아내도, 피자를 시켜 이야기꽃을 피우며 정겨운 시간을 보내기가 힘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침대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이데 느긋한 화감상은  가당치 않았다. 어느 날은 영화고 뭐고 일찍 자자, 하면서 불을 끄는데 다.      


그 후로 잠시 나라 원망을 좀 했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 복지 시스템, 공동의 가치를 향한 사회적 합의 등이 개개인의 행복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북유럽의 조명과 그릇도 탐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를 위해 정교한 아젠다를 세팅하는 그들의 정치적 수준이 부러웠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클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와 노력을 아끼지않는 교육환경도.

 

그렇다고 국가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생각해보면 내내 편안하고 행복하기만 한 인생이 또 얼마나 될까. 그런 인생은 덴마크와 스웨덴에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성껏 양말을 짜고, 아침 식탁에 다같이 모이려 노력하고, 주말엔 자연으로 나가려 노력하는 것일테다. 휘게와 라곰의 핵심은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가꾸는 것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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