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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Jan 13. 2019

연말엔 반드시 여행을

돌아보고 결산하며 괴로워하지 않기

몇 해전인가 끔찍한 연말을 보냈다. 12월 25일부터 1월 1일까지 쭉 쉬는데 미처 여행 계획을 세우지 못해 집에서만 뒹굴뒹굴, 오늘이 몇일인지도 모르는 나날이 이어졌다. 세수도 안 했고, 기상과 취침 시간은 불규칙했고, 머리칼은 떡이 져 부스스했다. 한 해가 가는데, 또 빈손이라는 게 괴로웠다. 커리어에 필요한 공부를 결정하지도 못했고 중국어공부는 시작과 함께 흐지부지됐다. 아. 이렇게 나이만 먹으면 어떡해하나, 난 왜 이 모양일까.


그 해가 지나고, 다시 반복되는 연말을 보내면서 다짐했다. 집에만 있는 건 너무 괴로우니 무조건 여행을 가자! 돌아보고 결산하지 말자! 일구지 못한 밭. 뒤늦게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올해도 일찌감치 여행 일정을 짜 놓았었다. 경주, 울진, 안동으로 이어지는 동선. 하지만 장인어른을 떠나 보내면서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슬픔을 추스리고, 경주 소쇄당에만 연락을 드려 가게 됐는데 할머니가 운영하는 민박집이란 사실이 아내에게 '정겨운 곳에서 쉬고 싶다'... 하는 바람을 불러일으킨 듯 싶었다. 여정에는 장모님도 함께했다.


소쇄당은 경주 양동마을 언덕 꼭대기에 있다. 가파른 언덕, 오른쪽으로는 대숲이 펼쳐졌다. 소쇄당 위쪽으로는 한 집만이 더 있었다. 양로원에 계시다 나오셨다는 민박집 할머니는 저녁밥부터 챙기셨다. 올해 84세라는데 머리숱이 많고, 주름은 적어 15년은 젊어 보이셨다. 나이를 듣고 감탄하는 우리에게 할머니는 경상도 억양으로 말씀하셨다.  

"어디 가도 10살은 젊게 본다~". 순수하고 당당한 자부심이었다.


기름 보일러를 돌려 뜨끈뜨근한 아랫목에 앉아 할머니 밥상을 받았다. 굴을 넣은 김장 김치, 더덕 무침, 콩나물 무침, 시금치, 자반 구이와 된장 찌개.

할머니는 "입에 맞을랑가 모르겄다. 많이 묵어라. 내가 돈은 없어도 쌀은 많다"시며 당신의 일상을 들려 주셨다.


"아이고 마, 오래 전부터 한쪽 눈이 안 좋았는데 최근에 더 안 좋아지믄서 우울증이 와 혼났다. 칵 죽고 싶은 맴만 들고. 친구들이랑 통화라도 하믄 마음이 좀 가라앉고 한번씩 우울한 기분들라카믄 딸한테 전화도 카고 교회도 간다. 아이고 그 병이 무삽대."


홍상수 감독 영화 중에 유준상이 지인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우울증 약을 먹으며 "나 우울증이거든"..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세상이 우울증을 여름의 모기처럼 성가시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싶었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든 겪을 수 있는.


할머니의 방에서 우리는 정겨운 식사를 했다. 방에는 조화가 많았다. 창호문 손잡이 옆으로는 대나무잎과 단풍잎이 한쪽에 하나씩 붙어 있었다.

"장모 모시고 여행도 다니고 좋은 사위다" 라는 말이 나와 자연스럽게 장인어른이 돌아가셔서 같이 모시고 왔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할머니가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괜찮다. 우리 할아버지도 먼저 갔는데 못 고칠 병이믄 먼저 가는 것이 본인한테도 낫다. 좋은 데로 갔을 끼라."


다음 날 우리는 방에서 종일 뒹글뒹글했다. 동네로 나가 아침만 먹고 들어와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마당의 돌들이 젖었다. 힘든 나날을 보낸 장모님은 잠이 드셨고, 나는 아이들과 TV에서 해 주는 해리포터를 보다가 밖으로 나가 비 구경을 하다가, 서울에 홀로 계신 엄마 생각을 했다. 언덕에 위치한 곳이라 대청마루에 서면 저 아래쪽으로 양동마을이 한눈에 펼쳐졌다.

"이곳에서 여름에 앉아 있으믄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다"던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침 식사를 한 밥집 이름이 떠올라서도 몇 번 웃었다. 전 날 밤 할머니는 "저 밑에 내려가면 그림식당이라고 있다"며 손으로 액자 모양까지 그려가며 설명하셨다. 다음 날 아침, 마을을 돌아다녀도 그런 곳은 없었는데 실은 '가림골식당'이었다. 재밌는 건 마을회관에 있던 아주머니께 여기 "그림식당이라고 있나요?" 하고 물으니 단박에 "응 여기 골목으로 올라가면 있어요"하고 바로 알려주셨다는 사실. 엉뚱한 단어를 말해도 용케 답을 맞히는 가족오락관의 한 코너를 보는 듯 했다.


다음 날 교회에 다녀온 할머니는 "여보소. 방에 있나?" 하시며 작은 그릇에 사과와 귤 몇개를 담아오셨다. "참 달다. 먹어 본나~"

할머니는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결혼한 지 7년이 넘도록 애가 안 생겨 구박을 받다가 느즈막히 딸이 하나 생겼는데 6살에 학교를 들어갈 만큼 똑똑하고 효심도 지극해 열 아들 안 부럽다는 이야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큰 손주 이야기, 사위가 서초동 실버타운에 자리를 만들어놓고 서울로 모시고 가려는데 답답해서 죽어도 못 간다는 이야기. 일종의 직업병으로 말끝마다 아, 아이고, 대단하시다, 하하, 추임새를 넣는 나를 보고 할머니는 "아이고 나도 이런 사위를 얻고 싶었는데...장모는 참 좋겠다"며 내게 내내 따뜻한 눈길을 보내셨다.


계속 이야기를 듣자하니 할머니 사위가 훨씬 훌륭했다. 살갑게 말하는 법을 잘 모르고, 애정 표현도 서툴지만 집에 오면 어디 손 볼 데가 없나 둘러보며 다 고쳐주고,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안경은 멋으로 낀다고 생각하는 동네 어르신들을 배려해 나쁜 시력에도 꼭 안경을 벗고 고기를 구워 대접했단다.말보다 행동, 묵직한 됨됨이에 로망이 있는 아내는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최고네요. 할머니. 저는 그런 사람이 좋아요~"  


저녁 식사를 하러 슬슬 나가볼까 옷을 챙겨 입으려는데 할머니가 팥죽을 끓였다며 같이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하셨다. 때마침 배가 고팠던 우리는 네! 좋아요! 할머니의 방으로 뛰어갔고 시원한 동치미와 함께 팥죽 그릇을 싹싹 비웠다.

저 설거지 잘해요! 하고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섰으나 할머니는 "아이코 남자가 무슨 설거지를 하노?" 만류하셨다. 내심 반가웠다. 장모님은 "정 서방 그거 아나?" 시며 "옛말에 국그릇 설거지는 딸 시키고 밥그릇 설거지는 며느리 시킨다는 말이 있다네" 말씀하셨다.


상을 물린 우리는 또 한 동안 수다를 떨었다. 할머니는 "이것 저것 퍼주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며 은수저도 다 줘버렸다"고 하셨다. 그러시더 부엌과 연결된 광 같은 곳에 들어가 봉지에 담긴 수저 한 보따리를 들고 오셨고 "다 줘버렸는갑다. 가만 할아버지가 쓰던 은수저 하나가 있을낀데..."하시며 한참을 뒤적였다. 마침내 은수저 한 세트가 발견됐고 할머니는 "여기 있다. 가져가라 마!" 하고 소중한 물건을 내게 건네셨다.

"정말 주셔도 돼요?"

"당연히. 되지. 나 죽으믄 어차피 다 없어질낀데. 죽기 전에 덕 쌓는다고 생각하믄 나도 좋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은 '약' 같았다. 많이 웃고 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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