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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Jan 13. 2019

에세이집이 좋아

나는 에세이집이 좋다. 그저 솔직하게 일상과 생각을 풀어놓은 글. 나이가 들수록 독서 근육도 퇴화하는지 소설책 한 권을 읽으려면 한 스무 번은 쉬었다 가야 한다. 감질나는 준비운동만 반복하다 포기한 책도 여러 권이다. 에세이집은 살짝 다르다. 짧게는 한 장, 길게는 스무 장 정도의 분량이라 '한 편만 읽고 자야지' 하고 맘 편히 책장을 펼 수 있다. 그러다 의외로 재미가 있어 세 편, 네 편 연달아 읽게 되면 생각지도 않게 공부가 잘 돼 진도를 확 뺀 날 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와 친밀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정 환경도,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사람의 부류도, 몇 번이고 봤던 영화도, 가슴에 묻어버린 슬픔도 알게 된다. 에세이를 읽지 않았다면 하루키가 왜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는지 몰랐을 것이다. 피천득이 왜 그렇게 봄과 수필을 사랑했는지도. 천재작가라 불린 전혜린이 왜 31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자기 고뇌를 가감없이 드러낸 수필을 보고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세련된 유머 감각이 있거나 생각이 재미있는 사람은 섹시하게 느껴지면서 한 번 만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구글에서 이미지를 찾아보기도 한다. 글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용모일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싫어지는 것은 아니다. 음 고집세게 생겼네, 생긴 건 별로지만 그래도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대단하다 생각한다.


솜씨 좋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작가를 만나면 그가 신간을 낼 때마다 반가워하며 사게 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나 하는 설레임과 반가움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일기가 때로 욕도 하고 거친 말도 있는 그대로 쏟아낸 글이라면 에세이는 이런 감정은 채로 한 번 걸러내고 차분하게 쓰는 글이다. 쓰는 이의 능력에 따라 맛있고 향도 좋은 단품 요리도 될 수 있다. 하지만 한상 거하게 차려내는 전라도 한정식 같은 음식은 아니다. 어쩌면 빵이나 떡 같은 음식에 가깝다.  


지난 주 처갓집에 다녀오면서 예전에 장모님이 빌려가신 사노 요코의 <문제가 있습니다>를 다시읽었다. 유 그림책 작가이기도 하고 여러 개의 문학상도 받은 수필가가 생전에 쓴 글을 모은 책. 다시 읽었는데도 재미있다. 중년을 지나 노년기에 쓴 글이 많은데 문장에서 박력이 뚝뚝 묻어난다. 할머니가 아주 배짱이 두둑하다. 미사어구도 일체 없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런 일이 있었고 그렇게저렇게 끝났습니다, 하고 마무리된다.

네 살 때 엄마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친 후로 엄마에게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끼며 평생 불화한 이야기도, 아들에게 '고약한' 엄마였다는 것도, 두 번 이혼했다는 것도  이런 얘기쯤이야 하고 쿨하게 털어넣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것 중 하는 이런 담대함과 자유로움이 아닐까 싶다.


사노 요코 에세이의 가장 큰 매력은 생각이 젊다는 것이다. 이 세상 다 산 듯, 마냥 지혜롭고 아름다운 글이 아닌 여전히 자기 색깔과 주관이 또렷한 생기 넘치는 글. 핵심만 툭툭 던지고, 기억이 안나는 건 "다 잊어버렸다" 솔직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드러나는 '쿨한' 생각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죽을 때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고 생각되면 원통할 것이다. 짧은 일생이리라. 하지만 빈둥빈둥 느긋하게 산 사람은 죽을 때 '아 충분히 살았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에세이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람'. 새로 나온 신간이 없나, 만나고 싶었던 이가 없나 교보문고 사이트를 뒤적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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