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레인베이글 Jan 13. 2019

청송백자 찾아 청송여행

어느 날 우연히 청송백자를 알게 됐고 첫눈에 반했다. 사과 산지로도 유명한 경북 청송의 특산품이자 활도자기인 청송백자는 ‘생활자기’라 하기에는 무척 우아한 모습이었다. 절제된 디자인, 단아한 선, 깊고 맑은 색이 어우러져 차분한 기품을 발산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단정함과 따뜻함. 보면 볼수록 푸근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틈틈이 청송백자를 샀다. 찻잔이나 술잔으로 활용할 수 있는 컵도, 접시도 샀다. 청송백자의 특징 중 하나는 그릇 테두리에 옅은 파란색 줄이 그려져 있다는 건데 이 접시에 김밥을 올려놓으면 단무지, 맛살, 우엉의 빛깔과 어우러지면서 ‘군침이 절로 도는’ 조화를 만들어 낸다. 컵은 막걸리를 마실 때 애용한다. 언뜻 심심한 디자인 같지만 ‘어깨’라 부르는 상부가 듬직하다거나 입이 닿는 부분에 테두리를 따라 동그랗게 미세한 홈을 파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손잡이가 없는 컵은 두 손으로 감싸 쥐면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커피나 차를 마실  자주 사용한다.


또 하나의 장점은 색깔이다. 청송백자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도석이란 돌가루를 빻아 만드는 도자기다. 흰색에도 다양한 층위의 빛깔이 있을 텐데 청송백자의 흰색은 아이보리에 가까운 연한 크림색이다. 청송백자전수관의 윤한성 관장은 ‘맑은 한지색’이라고 했다. 이 색은 어떤 음식을 담든 ‘주인공’을 차분하게 빛내준다. 청송백자를 소개하는 자료에는 내화력에 대한 언급도 있다. “돌을 빻아 만들기 때문에 점력이 약한 반면 내화력은 크지요. 수분 흡수율도 높아 사발에 밥을 담아 놓으면 밥알이 들러붙지 않고 잘 쉬지도 않는답니다.”


지난 해 가을, 청송에 다녀왔다. 만추의 계절이라 주왕산을 포함해 청송의 크고 작은 산이 온통 화사한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청송백자전수관은 야트막한 산세 아래쪽으로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수관이 위치한 법수골 마을 어귀에는 사과를 담는 노란색 플라스틱 바구니가 수십 개씩 쌓여 있고, 구불부불한 길을 지나 한참을 들어가자 비로소 청송백자전수관이 보였다. 마중 나와 있는 윤한성 관장과 악수를 나누었는데 고향 큰 형님 댁에 온 듯 푸근했다.


이곳은 언뜻 민속촌 같았다. 초가집 몇 채가 띄엄띄엄 자리하고 도석 채굴 기계를 한자리에 모아둔 곳도 있었다. 초가집 중 하나는 ‘사기움’이라 부르는 공방이었다. 벽체를 잡석과 진흙으로 쌓아 보온과 습도 조절을 하는 공간. 몇 년 전만 해도 청송백자를 빚고, 말리고, 보관하는 일련의 제조 행위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한성 관장은 여름이면 땀이 계속 흐르고 볏단에서 벌레가 등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또 다른 초가집은 그 옛날 ‘주막’ 모습으로 복원한 곳이다. 청송백자가 활발하게 거래되던 조선 후기, 이곳에서 보부상들은 봇짐을 풀고 밤이면 술도 거나하게 마셨다. 이들이 험준한 산을 타고 집결하는 날은 ‘점날’. 사기굴에서 사기가 나오는 날로 저마다 자기 몫을 챙겨 다시 산을 타고 민가로 이동해 그릇을 팔았단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조선후기 보부상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소설가 김주영의 <객주>가 떠오랐는데 그도 이곳 청송 출신이다.


윤한성 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쪽에서 노인 한 분이 올라오셨다. 15세에 청송백자를 배우기 시작해 1958년 가마 문을 닫을 때까지 13년간 사기대장을 지낸 고만경 선생이었다. 선생은 정정했고 대화를 나누는 데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선생과 윤한성 관장이 서로 보충하며 들려준 이야기는 아득했지만 그 세월의 깊이로 흥미로웠다.


“변기나 양푼, 요강, 제기 갚은 것은 잡사기라고 하고 종지나 접시, 밥, 국 담는 그릇은 생활자기라고 했지. 일제강점기에는 민가에 놋그릇이 안 남아났어요. 그걸로 탄피를 만든다고 공출해 갔으니까. 이후 제기에도 사기를 썼어요. 사기는 가마에 넣고 구우면 되니까 목기보다 만드는 것이 훨씬 수월하지요. 내가 올해 88세인데 15살 때부터 청송백자를 배웠어요.”


“그때는 농림학교라고 있었어요. 동네에 있는 간이 학교 같은 거지. 2년 과정이었는데 그거 배워 어디다 써먹을 수 있을까 싶더라고. 다 치워 버리고 가마터에 들어왔지. 그때는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도자기 굽는다고 하면 사람들 평가도 안 좋았어. 여기 주막에서 보부상들이 밤새 술 마시고 시끄럽게 놀고, 술 떨어지면 더 받아오라 악 쓰고 그라믄서 우리까지 싸잡아 ‘사기놈들’이라고 불렸어요.”


“한 때는 돈벌이가 쏠쏠했지. 물량이 달려 이 가마에서 한 명 저 가마에서 한 명 하는 식으로 도자기를 구워냈거든. 청송군 사람이믄 다 이 자기를 썼다고 보면 돼요 인기가 아주 많았지.”

 

그 자리에 서서 지난 세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는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가장 최근에 지은 청송백자 쇼룸 겸 사무실로 이동했다. 목재와 유리로 마감한 쇼룸은 소박해서 모던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는 그간 만든 수많은 종류의 청송백자가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아래쪽 공방과 어귀가 펼쳐졌다. 윤한성 관장은 청송백자 잔에 커피를 내려 주었다. “커피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하고 여쭈었더니 “한 번 해 볼라고요” 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가 고만경 선생의 제자가 된 사연, 청송백자와의 운명적 만남을 주제로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음에 드는 몇 점을 골라 서울로 올라왔다.


주말 여유를 만끽하며 막걸리를 마시거나 이른 아침 차를 마시청송백자 컵을 어루만진다. 그 담담한 형태와 빛깔의 그릇을 쥐고 있으면 묘하게 위안이 된다. 확실한 내 편 같은 느낌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세이집이 좋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